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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과 사이비 교주를 착각하지 마세요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종교와 정치 이야기. 단단한 관계도 통째로 흔들 만큼 치명적인 주제다. 실제로 종교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랑을 포기한 사람들은 흔하며, 선거 앞두고 부부끼리 정치 이야기를 했다가 각방 쓴다는 이야기는 지나가는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다. 도대체 종교와 정치가 뭐 길래 사랑하는 사람들을 갈라놓게 만드는 것이냐!          

종교와 정치라는 제한적인 용어를 써서 그렇지 좀 더 보편적인 시각으로 보면 종교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자신이 추구하는 신념이고, 정치는 세계를 해석하는 데 적용하는 자신만의 관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인생에 있어 신념과 관점이 필요하고 또 중요한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선택을 하고 관점에 따라 타인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념과 관점은 인생의 나침반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이성적 매력에 끌려 연인 관계를 시작할 수는 있어도 신념과 관점이 맞지 않는다는 걸 체감하면서도 그 관계를 오래 유지할 확률은 그렇지 않을 확률보다 낮다. 특히 사회적 시선에 민감한 주제나 제도(예를 들어 성에 따른 역할, 육아, 부양 등)들과 관련하여 단 하나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기로에 있다면 격렬하게 부딪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개인마다 신념과 관점이 다른 것이야 당연하지만 각자 서로의 사각지대에 서 있어서 접점을 찾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거나 또는 무조건 한쪽이 포기하길 바라는 경우 그 심각성은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만신창이 된 마음은 트라우마가 되고 나중에는 법적으로 이별 사유로 인정받기도 한다. 우리가 흔하게 듣는 ‘결별 이유: 성격 차이’는 신념과 관점의 차이를 두고서 서로가 갈등을 겪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뻔한 핑계가 아니라 분명한 사유의 가장 쉽고도 명확한 표현일 뿐이다. 사실 성격 차이는 각자 서로가 지닌 신념과 관점이 얼마가 강한지, 그리고 상대방의 신념과 관점에 대해 나는 얼마만큼의 유연성을 보여주는지에 따라 규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신념이나 입장을 구분하고 정의하는 데 있어 그것이 ‘옳다 /그르다’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논쟁이다. 단지 ‘나’가 상대방의 신념과 관점을 수용하고 인정하느냐, 혹은 아니냐의 태도만 있을 뿐이다. 보통의 인간관계에서는 자신의 신념과 관점을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투쟁하거나 손절하면 되지만,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이별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받아들일 자신이 (아직은) 없기 때문에 투쟁이나 손절을 택지에 두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인정해 주는 것이, 더 많이 사랑을 받는 사람은 인정을 받아내는 것이 습관처럼 된다. 총량만 따져 봤을 때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문제가 안 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것은 없고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의 것만 남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밀려오는 허탈함은 오롯이 내 몫이 된다. 게다가 집착이란 놈이 가세하게 되면 이건 연애 관계가 아니라 교주와 신도의 관계와 다를 바가 없다. 연인은 곧 나에게 교주가 되고 나의 눈은 차 안대(경주마의 좌우 시야를 가려 앞만 보고 달리게 하는 장치)에 차단되어 오로지 연인의 모진 채찍질만 느끼게 되는 건 너무나 비극적인 일이다.      

사랑에는 육체적인 궁합도 분명 중요하지만 이것만큼이나 정서적, 감정적 궁합도 중요하다. 궁합은 맞춰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일치하는 지점들이 저변에 깔려 있어야 돈독한 감정적 연대를 형성할 수 있다. 혹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연인 또는 부부의 경계를 뛰어넘어 ‘소울 메이트’라고 자신 있게 부를 수 있다면 그건 나와 연인(부부)이 이른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만큼 신념과 관점 두 가지 모두가 일치하여 의심이 없는 관계이거나 혹은 이 두 가지 중 하나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진심으로 서로가 차이를 서로 인정하고 또 인정받고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일 것이다.           

진지한 만남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종교와 정치(꼭 ‘찝’어 어느 종교, 특정 정당 이야기했다가 괜히 마음만 상하지 말고 신념과 관점을 담고 있는 폭넓은 주제를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대화가 훨씬 풍부해질 것이다)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쯤 진지하게 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연인에게 시비를 걸기 위해서가 아니라 알기 위해서다. 너와 나 사이의 신념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는지,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내가 하는 노력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 등을 따져보는 과정은 필수다. 좁힐 수 있다는 가능성, 혹은 좁히기 어려울 것이라는 불가능성 정도는 가늠하고 있어야 좀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 거리가 아무래도 내게는 버거다고 느낀다면 그 관계는 진지하게 생각해보길 권한다. 혹 지금이 너무 좋아서, 괜히 싸우기 싫어서, 두려워서 피하기만 한다면 언제가 그것은 분명 화살이 되어 나를 아프게 찌를지도 모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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