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 마지막에 본 「트루먼쇼」. 당시 내 사생활은 입시라는 공공의 적에 담보 잡혀 있었다. 자유와 감시의 경계는 모호했고, 선의 경쟁이란 이유로 교실 게시판에는 1등부터 53등의 이름과 성적이 적힌 성적표가 학기 내내 꽂혀 있었다.
개인이란곤 존재하지 않는 학교만 떠날 수 있으면, 자유를 보장받는 법적 어른이 되기만 하면 사생활은 온전히 내 것이 될 줄 알았다.
웬걸, 지금의 나는 그 어떤 때보다 강력한 빅브라더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것도 매일 업데이트되는 빅파더의 세계에서 사생활을 탈탈 털리고 있는 중이다. 정보를 명분으로, 공유를 미덕으로.
다수가 원한다면, 그것이 다수에게 이익이 된다면 사생활 공개는 기본값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사생활이 공개되면 개인정보 유출이니 명예훼손이니, 같은 것들을 들먹이며 자신의 사생활은 국가와 타인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가장 숭고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이중성을 보여주는 현상 중 하나가 코로나바이러스19 확진자의 동선 공개를 두고 보이는 태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취지나 명분은 분명했지만 그 원칙가 제도가 본래의 의도에서 한참 멀어진 것이 문제였다.
안전을 이유로, 공익을 명분으로 확진자들의 사생활은 까발려졌다. 어떤 이에게 확진자의 동선은 꼭 필요한 정보였을지 모르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저 (잠재적) 부도덕함을 증명하는 증거물에 불과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정보, 공익, 안전이란 단어가 사생활과 충돌하게 될 때 드러나는 개인의 이중성에 관해 이야기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참고로 소설의 소제목은 영화 <트루먼쇼>에서 인상 깊은 대사를 따왔다. 각각 트루먼의 아내, 트루먼의 빅파더인 크리스토프, 그리고 트루먼이 했던 대사들이다. 영화를 가까이 들여다보면 크리스토프가 제일 빌런인 것 같지만 멀리서 보면 모두가 트루먼의 빌런이다.
살면서 빌런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빌런을 선택할 수는 있지 않을까. 물론 문제는 그 빌런이 개떡인지 찰떡인지는 바닥까지 가 본 후에야 안다는 게 함정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