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 년 동안 도전이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 중 하나가 음주다. 다른 건 죽어라 노력하면 중간 언저리쯤이라도 가는데 도대체 음주는 늘지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은 하루에 한잔씩 마시는 연습을 하면 어느 순간 훅 늘어있을 것이라고 권장하지만 사실 하루에 한잔씩 꼭꼭 챙겨 마실 정도로 술이 맛있다는 걸 아직 모르겠고, 제 때 밥 챙겨 먹는 부지런함도 없는 내가 술을 챙겨 먹는 버릇까지 들이기는 아무래도 게으른 탓도 있다. 암튼 나에게 술은 ‘돈’만큼이나 늘지 않는 항목 중 하나다.
(사실 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좀 민망한 게 나는 주량을 늘리려고 부지런히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 주량이 늘지 않았다기보다 늘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으른의 특권 중에 하나가 술이지만 내가 이 특권을 포기하는 이유, 주량을 늘리지 않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서른 중반 이후로 이상하게도 술만 마시면…… 울기 때문이다. 아, 그런데 나도 내가 왜 우는지 정말 모르겠다. 분명한 건 술만 마시면 눈물이 난다. 알코올이 내 몸의 모든 구녕은 죄다 틀어막아놓고 눈물샘만 열어 놓는 건지, 아니면 알코올이 몸으로 들어오는 순간 평소 80% 정도의 수분을 유지하고 있는 동공이 수분을 쫘악 빨아들여 나머지 20%를 채워서 밖으로 흘러넘치게 만들어버리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알코올이 동공 내부를 죽창으로 마구 찔러대는 건지 모르겠지만, 암튼 이상하게 술만 마시면 나는 눈물이 그렇게 날 수가 없다.
그럼 얼마 정도 먹었을 때 눈물이 나나? 싶어서 한번 지켜봤는데 정확히 소주 2잔, 맥주 두 잔을 먹으면 슬슬 눈에서 물이 차오르더라. 솔직히 그 정도의 양은 인간의 감정을 요동치게 만드는 수준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눈물을 흘리는 순간 나는 너무 창피하고 부끄럽다. 꼴 사납기가 그지없다. 남들은 이제 목 좀 축였는데 나는 주사가 시작된 거니 이 무슨 개망신인가. 게다가 그 술자리가 초면인 사람이 많은 자리거나 공적인 업무와 관련된 자리라도 되면 세상 그런 진상은 또 없다. 내일은 없는 것처럼 부어라 마셔라 하고 질질 짜면 그럴 수 있다 치지만, 이 건 뭐 남들은 목말라서 마신 수준의 양을 먹고 갑자기 눈물바람이라니. 더 마시고 싶어도 창피해서 마실 수가 없다.
술에 취해서 정신이나 놔버리면 차라리 이 때다 싶어 꺼이꺼이 하고 울기라도 할 텐데, 정신은 지극히 멀쩡한데 하염없이 눈물이 나오니 이건 아무리 안 취했다고 백번을 정색하고 저항해도, 남이 보기에는 “아놔, 나 안 취했니까!”를 외치며 한 손으로는 격하게 손사래를 치고 한 손으로는 눈물을 훔치는 추잡한 주사를 가진 딱한 사람으로 기억이라도 되면 이를 무슨 수로 되돌리랴.
게다가 오늘의 괴로움을 다 잊고 즐겁게 놀자고 마시는 술인데 이 놈의 술만 마시면 시작과 동시에 질질 짜 대는 사람과 누가 술을 마시고 싶겠는가. 세상에서 제일 싫은 사람이 아무나 붙들고 질질 짜는 사람이란 걸 익히 들은 나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인류애를 장착한 까닭에 술친구를 만들지 않는다. 함부로.
사실 어릴 적에는 조금만 술을 마셔도 빨갛게 변하는 얼굴이 너무 창피해서 싫었다. 빨개지는 얼굴만 아니면 ‘이고는 못가도 마시고는 간다’는 말술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십 대 시절에는 내 마음을 들키는 것보다 못생긴 얼굴을 들키는 게 가장 수치였고 치욕이었다. 그래서 술 약속이 있는 날에는 세상 제일 밝은 21호 파운데이션, 컨실러, 팩트 이렇게 3겹을 장착하고 외출했더랬다. 결국 남아 있는 건 모공에 끼어 있어 있는 허연 파운데이션뿐일지라도.
그런데 나이가 들고 보니 술을 마시면 빨개지는 얼굴보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눈물, 로 환유되는 감정이 창피해서 싫다. 못생긴 얼굴은 세상이 다 아는 바니 가려도 소용없고, 이 나이쯤 되면 생긴 게 그닥 중요하지도 않다는 걸 나만의 논리로 삼은 이후 빨간 얼굴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들키는 건 왠지 절대적 약자가 되는 것 같고, 눈물 하나도 컨트롤 못하는 나잇값이 만천하게 공개되는 것 같다. 나이가 들면 감정이 무뎌지거나 둔해진다고들 생각하지만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작은 일에 더 예민해지고 발끈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감정을 무뎌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들쑥날쑥한 감정을 잘 조절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다. 평균 수명이 길어진 만큼 우리의 인생에서 의혹이 없어지는 나이가 언제가 되어야 하는지 쉽게 말할 수 없지만 확실한 건 마흔은 절대 아니라는 데 내 팔목 두 개 건다.
하루에도 골백번 씩 흔들리는 게 마흔의 마음이다. 수백 번씩 의심하는 게 마흔의 마음이다. 앞으로도 향후 몇 년 간 나는 나잇값을 못하는 마흔의 언저리에 있을 것이 분명한데 때때로 찌질하고 싶은, 추잡하고 싶은 날이 필요할 때 앞으로 나는 술의 힘을 빌릴지도 모르겠다. 맨 정신으로는 독헌년이라 눈물이 잘 안 나기 때문에.
나랑 술친구 할 사람, 손!!
덧붙이자면 술을 마시지 않는 까닭에 늦은 저녁 약속이나 대놓고 술을 마시는 모임은 거의 없다. 물론 먹다 보면 불가피하게 술이 끼기도 하지만 술이 주가 되는 자리가 아니라 늦어도 열 시 전에는 끝나는 모임이 대부분이다. 술을 마시지 않는 까닭에 지금까지 대리운전 서비스를 이용해본 적이 없다. 대리 기사님을 어떻게 호출하는지 잘 모르고, 혹 그런 날이 오게 되면 나는 어디에 앉아야 할지 잘 모른다. 옆자리? 뒷자리? 가운데? 뒷자리에 타자니 태생이 을인지라 혼자 뒤에 앉는 건 뭔가 어색하고 불편하고, 옆에 앉자니 괜히 부끄럽고, 그렇다고 어색한 건 싫어서 대화하기 쉽게 뒷좌석 가운데에 앉아 양손으로 의자를 제치고 얼굴을 내밀자니… 그건 누가 봐도 기사님에게 찝쩍거리는 또라이 취객으로 보일까 봐 영 고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