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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장흥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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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와 Apr 07. 2019

그래, 내가 다 잘못했다.

2019.4.7

오후 2시, 비가온다. 어젯밤 물을 듬뿍 줬더니 며칠 째 기운없던 대파모종이 꼿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에 흡족해서 오늘은 흠뻑 비를 내려줄테니 물을 줄 필요는 없겠다며 오후가 되도록 목이 빠져라 비를 기다렸다. 비를 기다리는 일이 있었던가. 텃밭 농사를 시작하고 나니 비도 기다릴 줄 알게되고 다 컷구나 싶다.(풉) 


장흥에 이사오고 첫 비다. 연결한 전선들에 문제는 없을까. 오래된 시골집이라 노후되서 어디 무너지거나 허물어지는 것을 아닐까 걱정스럽다가도 그 오랜시간 잘 버틴 집이니 문제없겠지라며 쓸데없는 걱정을 넣어둔다. 처마에 부딧히는 빗소리가 시끄럽다. 천둥도 줄기차게 치고 있다. 하늘이 원래 저렇게나 큰소리를 낼 줄 알았던가.


이제는 어둠이 오기를 기다린다. 집 앞 가로등 아래 빗줄기를 감상하는 기분이 궁금하다. 도시에서도 비오는 날이면 방 창문 앞에 가로등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왠지 낭만적이랄까. 비오는 날 가로등이라니. 그래도 뭐 여기서는 낭만이라고 하면 약간 부끄럽고, 로맨스는 너무 황당한 상황이니까. 그냥 그 모습이 궁금하다는거다.


도시에서 나는 이리도 크고, 깊고, 오래되고, 높고, 웅장한 자연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지냈던 거구나 싶다. 내 머리위에, 내 발 밑에, 내 앞에, 내가 숨쉬는 모든 순간에 자연이 있는데 그토록 다른 것들에 신경 곤두세우며 살았구나. 그래, 모든 살아있는 것은 신경 곤두세워야 할 것들 뿐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저마다 섬세하고 예민해서 귀찮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충 존재하는 것들이 없지 않은가. 나도 너도, 저 마당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신경쓰자면 귀찮은 일들 뿐이다. 마당에 매화인 줄 알았던 복숭아 꽃잎이 비를 맞으며 밭으로 떨어진다. 저 색깔의 조화가 쓸데없이 이쁘고 지랄이냐.


머리 위에서 천둥이 쳤다. 세상 태어나서 이렇게나 큰 천둥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뭔가 하나는 죽어나갔겠다 싶다. 하늘이 화내는 거라고 식상한 표현하고 싶지 않지만 엄청 화내고 있다. 왜 그러는데, 왜 그렇게 화가났는데. 말로하라고 말로. 아, 그게 말이었니. 그래, 내가 다 잘못했다. 미안하다.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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