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수학여행 가는 날 아침.
'잘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하러 할아버지가 계신 병원에 들렀다.
이상했다. 할아버지를 보는 일이 낯선 일도 아닌데 그날은 유독 낯설게 느껴졌다.
아,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수도 있겠구나. 침대에 늘어져있는 생기 없는 모습에 입원실 문 앞에서부터 눈물을 쏟았다.
화장실에 가서 눈물을 쓱쓱 훔치고 코도 휑 풀고. 또다시 눈물을 쏟지 않기 위해 몇 번이나 큰 숨을 쉬어 보고 입원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말할 힘도 없는 할아버지가 아주 느릿하게, 또 간절하게 내 손에 용돈을 쥐어주시기에 참지 못하고 엉엉 울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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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부터 새 교과서를 받아 오는 날이면 아빠와 할아버지가 벽걸이 달력으로 책을 싸주셨다.
아빠와 할아버지는 책을 싸는 동안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1년에 두 번 있는 이 의식은 말하지 않아도 아는, 부자(父子)의 유대감을 확인하는 시간일지도 몰랐다.
나보다 먼저 내 교과서를 펴고, 훑고. 아마도 그 손길과 눈길에는 올해도 내가 씩씩하기를 염원하는 부자의 마음이 깃들어 있었을거다.
달력은 ○○농약, ○○조합처럼 시골 냄새 가득한 광고가 큼직하게 적혀 있었는데 뒷면은 하얀 도화지 같아서 책커버가 되기 충분했다.
한 권씩 책커버가 완성되면 나는 그 옆에서 마지막 작업을 했다. 굵은 매직으로 과목 이름을, 가는 매직으로 학년, 반, 내 이름을 적었다.
여러 가지 글씨체를 여러 가지 크기로 적는 연습을 하고 교과서에 옮겨 적을 때는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혹시나 비뚤게 쓸까 봐.
그리고 깨달았다. 세상에서 제일 쓰기 어려운 글씨는 내 이름이구나. 내 이름은 어떻게 써도 예쁘게 쓸 수 없겠더라.
새것이 헌것이 되면 소홀해진다.
책을 싼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새것처럼 여기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헌것으로 느끼기까지의 속도가 늦춰진다.
아마 우리 아빠도 할아버지도 그런 마음을 잘 알아서 수고로운 작업을 하셨겠지. 처음 새 책을 받았을 때, 그 마음 그대로 간직하라고.
어릴 때부터 이 느낌을 알아서 지금도 책을 싸서 가지고 다니는가 보다.
오늘 책장 정리를 하다가 너무 정갈하게 아세테이지가 싸여있는 책들을 보고…. 에이이~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