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고, 구둣발로 시멘트 바닥을 비비적거렸다.
도글도글, 발바닥에서 작은 모래들이 더 잘게 부스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핸드폰 쥐고 있느라 손 시리겠다.
손이 얼겠다고 앓는 소리를 내려다 코만 한 번 훌쩍이고는 괜찮다고 했다.
-겨울은 원래 손도 시리고 발도 시린 거예요.
그러니 선배는 내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전화를 끊지 않아도 돼요.
-오랜만에 연락한다.
-그 '오랜만에'에 내 책임은 없잖아요~
-알아, 알지.
나는 가끔 불필요하게 묵직한 단어들을 선택한다. 책임이라니.
그간 연락이 닿지 않았다는 건 쌍방의 소홀함이 오래도록 쌓여 만든 결과인데,
내 책임은 없다고 발 빼면 선배는 정말 자기에게 잘못이 있는 것처럼 책임을 떠안는다.
-선배가 결혼해버렸는데 어떡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지~
사실 선배가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점점 소원해졌겠지만
뽀얀 입김 흩어지듯, 웃음도 흩어져보라고 던진 말이다.
몇 번 웃고 나서야 정말로 하고 싶은 말들이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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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는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교사로 임용되어 직장 생활을 했다.
선배의 20대는 느렸던 적이 없다. 뒤돌아볼 틈 없이 취업, 결혼, 육아….
물론 남들도 이렇게 살겠지만 남들이 이렇게 산다고 해서 그게 당연하거나 쉬워 보인 적은 없다.
아마도 선배는 나를 돌아보려는 게 아니라 선배 스스로를 돌아보려는 마음으로 전화하는 게 아닐까?
이미 벌어진 과거는 알 수 없는 미래보다 편히 대할 수 있는 시간이니까, 그 시간에 머무르며 잠시 쉬고 싶어서.
-우리 애기 백일 때, 네가 내복 보내줬잖아. 나 그때 진짜 고마웠어. 그 내복 무늬가 원숭이였잖아. 우리 애기가 원숭이띠라 엄청 많이 입혔어.
-나도 선배한테 고마웠던 거 있어요. 나 입원했을 때 우유먹고 싶댔더니 선배가 딸기우유, 초코우유, 바나나우유, 커피우유 다 사왔잖아. 그리고 넷북에 게임도 깔아주고 갔어. 롤러코스터!
-내가 그랬어?
-됐어. 나만 기억하면 되지, 뭐.
-그래도 너한테 내가 고마웠던 기억이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네.
교회 오빠 같은 소리만 한다고 징그럽다고 학을 떼고, 다음의 어떤 날에 또 통화하자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우리가 공유했던 것은 과거뿐이라 다음의 어떤 날에도 오늘 했던 이야기들과 같은 이야기를 읊고 있겠지만,
나도 꾸준히 내 일상을 살다가 삶의 이벤트처럼 선배의 전화를 기다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