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한해를 정리하고, 다음 해를 준비할 때, 내가 생각하는 올해와 내가 바라는 내년을 사자성어로 표현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네 글자 안에 한글자 한글자 뜻을 담을 수 있고, 시의적절하게 쓸 수 있는 유래가 되는 상황까지 연결되어, 자신이 처한 어떤 상황을 이렇게만큼 잘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은 흔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이상 중국빠순이..).
물론 이걸 혼자 하면 거기까진 좋은데, 꼭 주변 사람들에게 당신의 올해의 사자성어와 내년의 사자성어를 묻는 버릇까지 생겨 연말연시마다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재작년, 작년,,,, 항상 대충 이런 반응들...
다행인 건, 이또한 유유상종이라,
반짝반짝 진지한 눈으로 훈장님 같은 질문을 하는 나에게 주변 사람들이 마지못해 하나 둘씩 자기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이다. 한자는 너무 어려워서 네 글자로 말할래~라고 하는 사람부터, 나보다 한술 더 떠서 엄청난 중국 고사를 대면서 중국문학사 수업을 하는 사람까지. 레벨은 천차만별이다.
누구든 이걸 한두번 이상 당했던, 그러니까 나를 2년 이상 알고 지냈던 사람들은 이제 연말 모임이 되고, 내가 온다고 하면 슬슬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아 최혜원 또 물어볼텐데 뭐하지...
그리고 나를 5년 이상 알고 지낸 친한 친구들은 연말연시 모임 때 와서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먼저 말하고 시작할게. 나는 사면초가.
라고 말하며 맥주를 들고 벌컥벌컥 들이마시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 글을 빌어, 나의 진지충스러움에 마지못해 응해주었던 모든 지인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다만 진지충도 때와 장소는 가린다고 말하고 싶다. 어색한 상황에서도 이 사람은 진심으로 어떤 알맹이가 있을 거야!라고, 진정으로 그의 일년이 궁금한 소중한 사람에게만 부끄러움을 머금고 넌지시 물어보는 것임을 알아주시길 바란다. 아무한테나 물어보는 건 아니라구!)
나의 2019년의 사자성어는 기호지세였다.
말탈 (기), 호랑이 (호), 갈 (지), 형세 (세). 즉,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사람이 도중에서 내릴 수 없는 것처럼 도중에서 그만두거나 물러설 수 없는 형세를 이르는 말이다.
작년은 그랬다.
매스프레소가 글로벌 사업을 시작한 원년이었고, 8명 정도의 팀을 이끌어본 것도 처음이었고,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 로켓에 속해본 것도 처음이었고, 회사 입장에서 여러가지 중대한 의사결정들을 했던 것도 처음이었다. 서툴 땐 한없이 서툴었었고, 속도는 감당할 수 없을만큼 빠를 때도 많았다. 단적으로 2018년 12월 31일에는 한국 제외한 콴다의 글로벌 월간활성유저수가 1만명 정도였고, 2019년 12월 31일에는 70만명으로 절대적으로 70배가 늘었으니까. 호랑이를 타고 달리느라 정말 빠르긴 빠른데, 정신 똑바로 차리고 목덜미 제대로 안 잡고 떨어지면, 말그대로 주옥되는 거였다;;
하지만 그렇게 호랑이 등을 타고 달리면서,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넓은 세상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많은 의사결정들을 해야했기에, 호랑이 목덜미를 꽈악 쥐고 빠르게, 그러나 그전에는 집중해서 보지 못했던 시장과 사람들을 정면으로 꿰뚫어 볼 수 있는 몰입의 시간이 있었다.
때론 힘들고 지쳐서 나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이 손을 놓아버리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꽤나 절실하게 매달렸었다.
그렇게 몰입의 시간이 지나고 난 2019년 말에는 바야흐로 팀도 어느 정도 안정화되고, 회사도 아직 이러쿵저러쿵 해결해나가야 할 일들이 산더미인 스타트업이지만, 그래도 정말 멋있는 곳, 정말 똑똑하고 야망있는 인재들을 자신있게 모실 수 있는 실력 있는 곳으로 성장했다. (누적 240억원 투자도 받아서 TechCrunch에도 나와보고..)
그리고 나 자신도 일년 전과 비교해 많이 단단해지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들이 생겼고,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익힌 인간이 되었다.
바야흐로 피가 안 통할만큼 꽉 쥔 손을 놓고, "아, 올해 (정말 죽을 똥 살 똥) 호랑이 한번 잘 탔다"라고 회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제 시작이지만.
이 아줌마처럼 간지나게...
2020년 새해의 사자성어는 괄목상대가 될 것 같다.
긁을 (괄), 눈 (목), 서로 (상), 대할 (대). 눈을 비비고 다시 보며 상대를 대한다는 뜻으로, 어떤 사람의 학식이나 업적이 크게 진보한 것을 말할 때 쓴다. 삼국지의 손권이 '장군이 무슨 공부인가'라고 생각하던 장군 여몽에게 쿠사리를 주자, 여몽이 결국 깨닫고 열심히 학문을 닦기 시작하였고, 삼년 후 과거에 비해 학식이 매우 해박해진 여몽의 모습에 노숙이 크게 놀라자 여몽이 "선비란 사흘만 떨어져도 눈을 비비며 다시 대해야 합니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이상 설명충...)
나는 딱히 학문을 닦는다기보다,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에 정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정진하여, 이 한해가 끝나는 즈음에 나를 돌아보았을 때, 다방면에서 "와, 인간 최혜원,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라고 스스로를 칭찬할 수 있을만큼의 성과를 이뤄보기를 소망한다.
일적으로는 회사와 팀을 next level의 단단하고 강한 팀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일구고,
육체적으로는 테니스와 헬스 등 운동을 열심히 하여(아직 작심삼일 유효 시기) 건강을 되찾고,
개인적으로는 화목한 가족과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독서도 50권 이상해서 위대한 사람들의 생각과 인생을 살펴보고,
영화도 100개 이상 보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간접체험하고,
최대한 많은 나라들을 가보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정말 다양하다는 것을, 한국 사회에서 말하는 것만이 정답이 아님을 계속 인지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