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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혜원 Apr 11. 2021

세계정복이 꿈이던 아이

혜원의 이야기(1) - 시드(진로탐색)

세계정복이 꿈이던 아이

삼국지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세계 정복이 꿈이었다. 아니, 적어도 세계를 정복한다기보다는 다양한 나라들을 유람하면서 살고 싶었다. 한번 태어난 인생, 세계 역사에 스크래치 한번은 낼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고,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영향을 주고 싶었다.

중국 대륙의 진시황제, 몽골의 칭기즈칸, 이집트의 람세스 이런 사람들 그림만 주구장창 그려 놓았던 어린 시절의 그림을 보면, 지금도 엄마는 보통 여자아이가 아니라며 절레 절레한다

그렇게, 고등학교 때 어느 학과로 진학할 건지 결정하는 때에 자소서에 꾹꾹 눌러 쓴 장래희망은 '국제 통상 전문가'였다. 어릴 적 꿈만큼이나 거창한 장래희망이었다. 고려시대 서희의 외교 담판에 영감을 받아 외교학도 좋아하면서, 경제학도 배워 보고 싶고, 뭔진 모르겠지만 그쪽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싶은 순수하게 어린 마음이 반영되어서일 것이다. 그렇게 사회과학대에서 외교학을 전공하려고 마음 먹었다. 감사하게도 원하는 대학에 진학을 하였고, 1학년 때 계열로 진학을 해서 여러 전공 탐색을 해보고 2학년에 전공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결론은 외교학이 아닌 경제학과로 진학하게 되었다. 이유는 많았는데, 꿈에 부풀어서 순수한 마음에 들었던 외교학과 과목들이 리딩도 너무 많고 이론에 치우쳐져 있어 재미가 없게 느껴지기도 하였고, 그런 상황에서 불현듯 그렇게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해서 앞으로의 삶이 망가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앞서서였다. 그렇게 열정이 없는 상황에서 만일에 대비해 학점은 미리 챙겨 두었겠다, 남들이 그래도 중타는 간다고 이야기하는 경제학부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때는 내가 원하던 어릴 적 꿈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20살이 넘는 성인이 되어가지고 굉장히 서럽게 울었었는데, 지금은 왜 그랬는진 모르겠다. 옆에서 대수롭지 않게 괜찮다고 말하고 안방으로 들어가셨던 쿨한 어머니의 지혜가 느껴진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세계 정복이 꿈이던 아이, 앉아서 공부하기보다는 남들과의 상호작용에서 힘을 얻던 아이는 솔직히 말하면 경제학과에 그렇게 정을 많이 붙이지 못하였다. 경제학과 수업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수업도 사실 안 들어도 되고 중간고사도 없고 기말고사 한방으로 학점이 결정되는 과, 교수님들이 학생들에 관심이 없는 과라고 생각하여 정을 붙일 데가 없다고 생각 했었다. 그렇게 방황이 시작되었다. 세계 정복은 커녕,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자아실현도 제대로 못할 것 같은데 어떡하지? 망했다.


누군가의 삶을 바꿔보는 경험

그렇게 시작한 전공 진입 후의 방황은 어떤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면서 생각보다 쉽게 끝이 난다.

'사회적 약자에게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주어 경제적 자유를 얻게 한다'는 비전 아래 운영되는 인액터스라는 연합 동아리였는데, 긍정적인 사회적 임팩트에도 관심 있고, 비즈니스라는 것이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있던 터라 아주 매력적인 동아리였다. 그리고 그렇게 재미있는 대학시절에 춤 동아리나 음악 동아리도 아니고, 그렇게 취업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경영 컨설팅 학회도 아니고,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사회적 약자들을 도와 주고 싶다고 모인 대학생들은 보통 사람들은 아니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꽤 이상한 애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꽤 이상한 애들'끼리는 뭔가가 잘 통했다. 괜히 사회적 가치에 관심 많고, 아무도 안 시켰는데 사회적 약자들을 도와주겠다고 학업을 병행하면서 무급 노동을 하는 사람들. 아워스펜트(Hour Spent)라고 일주일에 몇 시간 일하는지를 대결하기도 하였는데, 어느 주는 100시간을 넘긴 적도 있었다. 학업을 병행하면서 이에 상응하는 로드를 이겨내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름대로 좋은 의미를 가지고 모인 '이상한 사람들'과는 복작복작 꽤 의미 있는 임팩트를 만들어 냈다. 처음엔 관악구 저소득층 어머니들과 함께 대학교에 주먹밥을 납품하는 모델을 도전했었고, 이건 깔끔하게 망했다. 그리고 다음에는 퇴폐업소에서 일하는 시각 장애인 안마사 분들이 안정적인 수입을 떳떳하게 가져 가실 수 있도록 양성화된 안마 센터를 만들어 프랜차이즈화하는 사업을 했다. 사당역에 첫 센터를 낼 때는 장애인에게 자리를 내어 줄 수 없다고 빌딩 주인에게 가차 없이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었고, 오픈 때는 영하 8도보다 내려갔던 추운 겨울날에 사당역 8번 출구 앞에서 우리가 직접 만든 안마센터 브로셔를 하나 하나씩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사업 계획서부터, 안마센터의 컨셉, 마케팅 문구와 마케팅 전략 그리고 실행까지, 사업의 기획부터 모델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기까지의 실행까지 해보는 경험은 정말 값진 경험이었다. 그리고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처럼, '사회적 가치', '사회적 기업의 의의' 텍스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안마사 분들의 삶이 경제적으로 자리가 잡히고, 당당하게 자아를 찾아 나가시는 과정을 만들고, 보고, 느끼고, 그리고 그분들의 입에서 우리가 있어 너무 고맙다고 듣는 것만큼 짜릿한 것은 없었다.  그렇게 1호점이 잘 자리잡고 나서, 우리 다음 기수부터 매뉴얼화를 잘하여 선릉, 합정 등등에 계속 프랜차이즈를 확장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9개의 프랜차이즈가 안마사 분들의 손으로 직접 운영이 되고 있다. 아직도 종종 1호점을 찾아가면 이름을 기억해주시는 안마사 님들과 옛날 이야기를 하면,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었던 것도 눈이 녹듯이 사르르 녹을 때가 많다.


그리고 내 삶이 더 깊게 바뀌는 경험

이런 강렬한 경험으로 두가지를 크게 배웠다.


첫째, 누구나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남의 삶을 바꾼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건방진 말일 수 있다. 누가 누군데 누구의 삶을 바꾸고 좌지우지하나. 하지만 확실히 '남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대학생이든 경력이 많은 사람이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성이 중요한 것이다.


둘째, 누구를 만나고 영향을 주면서 바뀌는 것은 사실 나 자신이다. 나는 이런 사업을 하면서, 나 자신에 대하여 몇가지를 확실하게 느꼈다.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구나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달려 갈 때, 신나서 같이 달려 가는 사람임을 느꼈다. 그들이 지쳐 있을 때는 지쳐 있고, 그들이 슬퍼할 때는 슬퍼했다. 야망 있고 꿈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꿈을 꿀 때 가슴이 뛰었다.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을 하고 싶구나

대학교 수업에서 수동적으로 앉아서 공부를 하는 것보다, 직접 나가서 주먹밥을 만들고, 협동조합을 만들고, 브로셔를 만들고, 페이스북 마케팅을 해보고, 고객들과 직접 맞닿아서 소리를 듣는 것이 너무 재미 있었다. 이런 지점에서, 동기들 대부분이 하고 있었던 고시 공부나 대학원 진학, 로스쿨은 진작에 접었다. 진즉하게 앉아 있지를 못하는 엉덩이를 가지고 애초에 못하는 건 깔끔하게 포기하자였다.


내가 펼치고 있는 일들의 직접적인 피드백을 보고 싶어 하는구나

내가 조물 조물 만드는 것들의 결과물을 즉각적으로 보는 것이 너무 재미 있었다. 이 안마 상품은 직장인을 위해서 저렴하고 시간도 알맞다는 리뷰들을 찾아보는 것, 또 이 사업의 직접적인 수혜자이자 이해관계자인 시각 장애인 안마사 분들이 이제 살맛 난다고 직접 말씀해주시는 것만큼 신나는 일은 없었다. 성격이 급한 것 다시 확인. 적어도 10년, 2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한 주제에 대하여 천천히 완성도를 올려 가며 연구에 몰두하는 학문의 길이나, 아니면 그 정도 규모의 사업 규모를 가지고 5년, 10년 뒤의 사업 기획을 하는 것은 재미가 없어 보였다.


내 손으로 직접 만드는 것이 중요하구나

어릴 때부터 욕심이 많았다. 남이 하는 것보단, 내 손으로 조물 조물 만드는 것이 재미 있었다. 적어도 내가 담당한 것 안에서는 오너십을 가지고, 책임감을 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 보고 싶었다.


이런 것들을 느끼다보니, 해야 하는 일이 외교관이나 국제 통상 전문가는 아니었다. 응, 아니야. 확실해. 외무고시를 칠만큼의 꾸준한 엉덩이 힘을 보여줄 수 없었고, 아무나 합격할 수 있는 시험도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학부 다니면서 괴물 같은 친구들을 보면서, 아, 저런 친구들이 훗날에 나라의 중책을 맡게 되는구나 멀리서 감탄하며, 나와는 다르다 생각했던 경험이 많다. 안되는 건 빨리 손절. 또한 지금 당장 어떤 자격증을 공부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고 생각 했었다.


그럼 그때부터 진격의 거인처럼 스타트업에 뛰어 들었는가? 아니다. 그때만 해도 스타트업이라는 개념을 몰랐었기에, 내가 펼치고 있는 일들의 직접적인 피드백을 볼 수 있고, 연차가 조금이라도 쌓이면 내 손으로 어떤 영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열정적인 사람들이 많은 곳. 뭔진 모르겠지만, public sector가 아닌 private sector의 어떤 기업에 취직을 하자 정도 결론을 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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