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의 이야기(2) - 엑젤투자(선택)
나에게는 이상한 미국인 사촌 오빠가 있다. 스무살 때 홀홀단신으로 한국에 와서 한국어를 배웠고, 스물 두살에는 요르단, 인도 같은 오지 세계여행을 다니며 의자 사진을 찍었다. 하필 평범한 의자 사진을. 그리고 따뜻한 캘리포니아 사람이라 함박눈이 내리는 것을 한국에 와서 처음 본 오빠는 한겨울에 반바지 차림으로 나가 신이 나서 놀자고 했고, 그걸 보고 부모님이 손을 내저으며 말리곤 했다. 내가 고3 때는 우리 집에서 같이 머물곤 했었는데, 어느 날 '페이스북'이라는 웹사이트를 보여 주며, 나중에 너가 대학에 가면 전 남자친구 사진을 이렇게 찾아보게 될 날이 올 거라며 얼굴 인식이 되는 기술의 신세계를 보여주곤 했다. 괴짜 중에 괴짜였고, 한국이란 조그마한 나라에서 공부만 줄곧 했던 나에게는 참 재미있는 오빠였다.
대학교 3학년 때 인생을 바쳐서 했던 인액터스라는 창업 동아리 생활을 뒤로 하고, 캐나다로 1년을 떠나버렸다. 교환학생 신청서를 쓰던 날, 6개월에 체크하려다가 바로 뒤에 있던 엄마에게, "1년 가도 돼?" 물었고, 엄마는 "글쎄? 고민해봐."라고 꽤 쿨하게 대답을 했고, 30분 정도 고민을 하고 그냥 1년이라고 내버렸다. 쿨한 모녀의 대화로 갑자기 타국에 일년을 가게 되어 버린 것이다. 벤쿠버로 가게 되었는데, 마침 그 사촌오빠가 미국 구글 본사에 다니고 있었던 때였다. 조용하고 친절한 캐나다에 별로 뜻이 없던 터라, 말로만 듣던 '아메리칸 스타일 실리콘밸리의 열정'을 느끼고자 자주 미국에 내려갔다. 샌프란시스코와 레드우드를 왔다갔다 했는데, 말로만 듣던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의 본사가 오빠 집에서 차타고 다 5분거리에 있었다. 신세계와도 같았다. 오빠는 붙임성이 세계 최강인 사람이라, 북극에 가서도 아이스크림을 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만큼 말도 잘하고 친구가 정말 많았고, 덕분에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의 큰 기업이나, 실리콘밸리의 작은 기업들에서 일하는 친구들도 캐주얼하게 만나 small talk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이 났던 건, 얕고 넓게 아는 사람이 많아서 어떤 친구네 파티에 가서 모르는 사람들에 섞여 맥주를 훔쳐 마시고 나올 수도 있었다. 해리포터의 위즐리 형제가 된 것마냥 즐거운 소소한 일탈이었다.
그렇게 그날도 어떤 파티에 갔는데, 오빠가 친구를 소개시켜 준다고 했다. Korean American이었는데, 한국말을 아예 못하는 말그대로 '검머외(검은 머리 외국인)'이었다. 딱 봐도 오빠보다 5-6살은 많아 보였는데 친구라고 fist bump를 하는 것을 보며, 이것이 미국 스타일인가 갸우뚱하며 어떨결에 인사를 했다. 내가 미국에 처음 온 꼬맹이 대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쾌활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자기의 인생 계획을 말해주었다. Linkedin과 Zynga 등 미국에서 잘 나가는 IT 기업에서 꽤 잘 나가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억대 연봉을 뒤로 하고 한국에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모처럼 간 한국에서 어떤 작은 기업의 대표를 만났고, 그때 그 사람에게서 받은 영감과 열정을 잊을 수 없어 지금 미국에서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화에서 나는 '스타트업'이라는 개념을 처음 들었다.
솔직히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만해도 기업이 삼성과 LG 밖에 없는 줄 알았던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는 한국말도 못하는 사람이 왜 잘 나가는 대기업을 뿌리치고 작은 나라의 이름도 없는 기업에 가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들어보니 두 가지 때문이었는데, 첫째, 대표의 비전에 완벽하게 매료되어서 이 사람의 비전과 함께라면 세상에 정말 좋은 영향력을 줄 것이란 확신이 들었고, 둘째, 이 사람과 함께라면 자신의 성장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취직을 하려는 기업을 선택함에 있어서, '대표'와 '성장'이라는 키워드는 생각해보지 못한 나는 머리를 띵하고 망치로 맞은 기분이었고, 어떨떨했다. 그렇게 한국으로 곧 떠난다는 그 사람에게 건투를 빈다고 말해주었다. 바를 나오면서, 오빠처럼 참 이상한 사람이라고 이야기 나누며 집으로 돌아갔다.
캐나다로 돌아와서 인터넷 서치를 시작했다. 스타트업이 도대체 뭔데 저런 미친 선택을 하는 것인가. 어차피 한국에 돌아가면 어느 기업에서든지 인턴십을 하려고 알아보고 있던 나는, 이제 키워드를 '스타트업'에 집중해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J 커브를 그리며 성장하는 초기 기업.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이상한 사람이 괜히 그런 선택을 하진 않았을 것이란 생각에 점점 사로 잡히면서, 이력서를 '스타트업'에 집중해서 보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외에 있던 나에게 스카이프로라도 면접 기회를 주었던 곳의 젊은 대표님과 면접을 보았고, 그렇게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스타트업에서 첫 인턴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참고로 그 사람이 간다는 그 기업은 바로 2014년의 '배달의 민족'이었고, 그 대표는 김봉진 대표였다. 2021년 지금에야 한국을 휘어잡는 1위 배달 앱이자 대한민국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IT기업으로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지만, 당시는 시리즈 A 투자를 받고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를 첫 TV 광고에 실었던, 이제 막 성장하는 스타트업이었다. 지금처럼 대한민국 누구나 아는 친숙한 거대 IT 기업이 될지 그 당시에는 누가 알았을까.
이것이 '처음' 스타트업에 왜 가게 되었냐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다. 강렬한 첫 스타트가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어떤 우연한 만남이었다면, 그 이후 나는 '마음을 확실히 정하기 전까지' 모바일 마케팅 스타트업, 중국 마케팅 대행사, 컨설팅 기업을 경험했다. 학생 때야 아직 졸업도 안했기 때문에 나의 결정에 생각보다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몸이 가는대로, 마음이 가는대로, 기회가 닿는대로 움직였지만, 졸업이 다가오면 다가올 수록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대기업 타이틀을 버리고, 간판도 없는 작은 기업을 첫 직장으로 선택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깜냥이 되는 인간인가.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럴 수 있을까. 지금이야 너무나도 확고하게 나의 기준들과 삶의 방향성이 세워져 있지만, 그때만해도 나의 앞길에 1도 확신이 없는 쫄보 대학생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련의 회사들을 거치고 경험들을 쌓으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남이 이야기 하는 기준'이 아니라 '내 마음의 목소리가 허락하는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엄마가 어디 가서 '우리 딸 어디 다녀요'라고 말할 수 있고, 지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딸을 잘 키우셨어요 이야기할 수 있는, 부모님이 으쓱할 수 있는 그 찰나의 순간이 아니라, 일년 365일 24시간 그 삶을 살아내고 있는 바로 나 자신의 행복과 만족이 더 중요했다. 아니, 남이 내 인생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닌데 왜이렇게 남 듣기에 좋은 삶을 위해 살아왔던 것인가. 지금까지 엉덩이 깔고 열심히 공부했던 것, 많은 사회과학대 전공들 중 경제학과에 진학했던 것, 좋은 학점을 따려고 아둥바둥했던 것은 솔직히 이야기하면 남의 만족을 위함이었다. 부끄러웠다. 이 껍질을 힘겹게 벗겨내는 데에 적게는 4년이 걸렸고, 학생이었던 시간을 다 더해본다면 20년이 족히 걸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