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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원 Aug 02. 2023

벼락치기 인생의 제과기능사 도전기-실기편(4)

나에게도 수첩형 자격증이 생겼다

 시험 시작 전, 감독관님이 수험생들을 오븐 앞에 불러 모으고는 오븐 사용법을 알려주셨다. 나는 윗불과 아랫불 온도 모두 조절할 수 있는 오븐은 처음이어서 떨리면서도 살짝 설렜다. (이런 오븐… 완전 전문가 같잖아..!) 오븐 한 줄에는 세 칸이 있는데 1번을 뽑은 나는 맨 위 칸의 오븐을 쓰게 되었다. 대부분의 레시피는 가운데에 있는 오븐을 사용할 때 기준이기 때문에 맨 위나 맨 아래의 오븐을 사용할 때는 온도를 추가로 조절해야 한다. 기능장님이 유튜브에서 맨 위 칸은 위에 오븐이 없으니 기존 레시피보다 윗불을 10도 올리라고 하셨었지? 가운데 칸 오븐을 쓰는 옆 사람이 중도 퇴장을 해버려서 내 밑에 있는 오븐이 비어있으니 아랫불 온도는 외워간 온도 그대로 설정했다.


 슈는 오븐에서 30분 정도 굽는데 시험장용 오븐에는 타이머가 없다. 평소에 쓰는 오븐은 내가 설정한 시간이 지나면 ‘띵!’ 소리를 내고 불이 꺼지는데, 이 오븐은 내가 집어넣은 시간을 기억했다가 30분이 지나면 알아서 꺼내야 했다. 슈를 굽는 동안 설거지를 하고 틈틈이 주변을 정리했다. 슈는 조금만 잘못돼도 부풀지 않고, 무엇보다 굽는 도중에 절대로 오븐 문을 열면 안 된다. 오븐 문을 열면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기 때문이다. 슈를 오븐에서 굽는 동안 또 몇 명이 짐을 싸서 나갔다. 15분쯤 지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오븐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만든 슈들이 봉긋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만세!!!


 30분 후, 다 구워진 슈를 꺼내고 애매하게 남은 반죽을 빨리 팬닝해 오븐에 넣었다. 구워진 슈를 식히는 동안 커스터드크림을 계량해 자리로 가져왔다. 개인물품으로 챙긴 쇠젓가락으로 슈의 바닥에 구멍을 뽕뽕 뚫었다. 크림을 채우려고 짤주머니 앞에 낄 깍지를 가지러 갔는데 시험장에서 제공하는 깍지들이 너무 컸다. 크림 채우는 크기가 아니라 마카롱을 짜는 크기여서 그냥 깍지를 쓰지 않기로 했다. 가져간 비닐 짤주머니의 아랫부분을 살짝 잘라 그대로 크림을 짰다. 모양이 엄청 예쁘지는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부풀어 오르기는 한 내 슈들에 크림을 채우고 있으니 갑자기 기분이 벅차올랐다. 뭘까 이 기분. 망한 거 같은데 왜 신나지?


 오븐에서 마지막 판도 꺼내 식히고 전부 크림을 채워 넣었다. 제출용 트레이에 가득 담긴 슈들은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누가 봐도 서툰 솜씨가 묻어나는 내 엉망진창 슈들이 제법 귀여워 보였다. 오늘 하루, 아니 두 시간 동안의 고군분투가 담겨있는 결과물이기 때문일까. 내가 차고 있던 1번 번호표와 함께 완성된 슈를 제출했다. 개수대 찌꺼기까지 깨끗이 정리하고 제한 시간을 아주 꽉꽉 채워 쓰고 짐을 챙겨 나오는데 시험장에 감독관님들 외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마지막이었다.

하하. 망했다.


 시험장에서 나오자마자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왔노라. 슈 나왔노라. 망했노라.

 그렇게 장렬한 전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씻고 기절하듯 침대에 누웠다. 가져갔던 개인물품을 정리할 기력도 없었다. 몸살이 날 것 같았다. 합격발표는 6일 후. 떨어지면 이 짓을 또 해야 하는 건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안 그래도 없는 식욕이 절반으로 줄고 심지어 악몽까지 꿨다. 아니, 이게 뭐라고. 이게 대체 뭐라고 나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혼자 벌여놓고 사서 고생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가.


 그렇게 어찌어찌 한 달 같은 6일이 지나 드디어 발표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큐넷에 로그인을 했다. 제발!

 그리고 결과는.

합격! 역시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었어


 제조공정 A, 제조공정 B 점수는 거의 반타작 수준이었지만 제품평가가 생각보다 잘 나와서 총 66점. 합격이었다. 턱걸이지만 뭐 어때, 60점만 넘으면 합격인데! 계량부터 망해서 걱정했지만 어쨌든 붙었다. 역시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인가? 곧바로 수첩형 자격증을 신청했다. 발급 수수료가 있었지만, 그 정도야 기꺼이 지불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작고 생각보다 얇았던 내 첫 수첩형 자격증


 일주일 후, 수첩형 자격증을 하나쯤 가지고 싶었던 내 로망이 실현되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사서 고생하는 건 고생 뒤에 따라오는 결과물의 짜릿함 때문일 거라고. 나는 내가 성취중독이라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고 드러누워 여유롭게 지내는 삶을 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극한의 상태로 몰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근데 뭐 알코올이나 니코틴도 아니고 성취에 중독된 삶이면 나름… 괜찮지 않나? 둘 다 도파민 중독인 것 같지만 약간의 차이점은 있다. 알코올과 니코틴은 섭취하는 순간에는 즐겁지만 결국 몸을 병들게 하고, 성취는 추구하는 순간에는 힘겹지만 결국 정신을 건강하게 한다는 것. 그래도 다음부터는 이렇게 정신을 병들게 하는 극단적인 벼락치기는 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해 본다. 하지만 나는 안다. 30여 년 벼락을 치며 살아온 습관이 그리 쉽게 바뀌지 않을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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