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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원 Aug 22. 2023

노른자를 위하여

에그타르트와 쿠키슈, 그리고 바닐라

 레시피 중에는 달걀흰자만 필요하거나, 반대로 노른자만 필요한 경우가 있다. 흰자는 단독으로 사용하는 디저트가 꽤 많다. 마카롱, 다쿠아즈, 티그레, 휘낭시에 등등. 일부 쿠키나 타르트지처럼 노른자만 넣고 만드는 빵도 있지만 나는 노른자는 주로 필링이나 크림에 활용하는 편이다. 특히 에그타르트의 필링이나 슈 안에 채울 디플로마트 크림을 만들 때는 노른자가 아주 많이 필요하다. 아, 여기서 디플로마트 크림이란 커스터드 크림에 휘핑한 생크림을 섞은 크림을 말한다. 당연하게도, 아주 맛있다.


 회사에 다니면서 일하는 능력이 크게 오르는 순간은 1. 사고 친 후 수습할 때, 2. 사고 친 걸 티 안 나게 덮으려고 할 때가 아닐까 싶은데, 슬프게도 그게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실수한 게 너무 잘 보일 때. 조금 과장해서 KTX를 타고 지나가면서 봐도 잘못한 게 눈에 띌 때. 슈를 만드는 게 그렇다. 망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너무나도 확실하게 보인다. 누가 봐도 한눈에 ‘망했구나’하는 상태가 되기 십상인 게 바로 슈다. 내가 제과기능사 시험을 본 품목도 바로 슈였는데, 그때의 힘들었던 기억 때문인지 시험 본 이후로 지금껏 다시 만들지 않았다. 하하.


 베이킹을 하는 사람이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바로 갓 구운 빵을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방금 구운 슈에 디플로마트 크림을 터지기 직전까지 채워서 한입 크게 깨물면 정말이지 오늘 하루 겪었던 거지 같은 일들이 모두 잊힐 정도로 행복해진다. 상상해 보라. 홈런볼을 에어프라이어에 잠깐 돌려먹기만 해도 맛있는데, 갓 구운 바삭한 슈에 바닐라향 가득한 크림을 채워 넣은 슈는 얼마나 맛있을지. 나는 그냥 슈보다 쿠키 반죽을 얹어서 구운 쿠키슈를 자주 만드는 편이다. 슈 반죽 위에 납작한 쿠키 반죽을 얹어서 오븐에 넣으면, 슈 반죽은 부풀고 쿠키 반죽은 녹으면서 부풀어 오른 슈의 표면을 코팅하듯 감싸 안는다. 마치 모카번처럼. 대부분의 빵이 그렇지만 특히 슈는 만든 직후가 가장 맛있다. 쿠키슈를 퇴근 후에 만들기엔 체력도 달리고, 저녁에 시작하면 밤에 완성되기 때문에 쿠키 반죽은 전날 저녁에 만들고 다음날에 슈 반죽을 해서 굽는다. 아니면 주말에 작정하고 만든 다음, 허리를 부여잡고 드러누워있기도 한다.


쿠키슈. 집에서 먹을 땐 크림을 터질 정도로 채워서 먹는다.

 에그타르트 필링이나 디플로마트 크림을 더 맛있어지게 하기 위해 꼭 넣어야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바닐라다. 계란의 비린내를 잡아주기도 하고 맛을 더 풍부하게 하는 용도로 쓰이는 바닐라는 바닐라 익스트랙, 바닐라 오일, 바닐라 페이스트, 바닐라빈 등 다양한 제형이 있다. 나는 주로 바닐라 오일과 바닐라빈을 쓴다. 에그타르트나 커스터드 크림, 마카롱 필링으로 사용하는 앙글레즈 버터크림처럼 풍부한 바닐라 맛을 원할 때는 바닐라빈을, 케이크 시트같이 계란 비린내를 잡는 정도로만 사용할 때는 바닐라 오일을 넣는다. 물론 바닐라가 필요한 모든 베이킹에 바닐라빈을 넣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내 지갑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바닐라빈은 원산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가격대가 높은 편이다. 바닐라빈을 처음 봤을 때는 대체 이 검은 쭉정이가 왜 이렇게 비싼가 의아했지만, 바닐라빈을 넣은 베이킹을 하고나니 ‘음, 이래서 비싸구나!’하고 수긍해버렸다.


 바닐라빈 하면 떠오르는 사건이 하나 있다. 그날의 베이킹을 마치고 설거지를 하던 중 바닐라빈이 남아있는 봉지를 부엌 조리대에 올려놨었는데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사라져 버렸다. 아니, 이게 갑자기 봉지째 승화할 리도 없는데 어디 갔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쓰레기통을 비우려고 보니 세상에. 내 바닐라빈이 쓰레기통에 떡하니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아빠가 내가 다 쓴 건 줄 알고 대신 버려줬다는 이야기...


 그러고 보니 문득 궁금하다. 슈크림 붕어빵은 왜 슈크림 붕어빵인가. 슈크림=슈에 들어가는 크림=커스터드 크림이나 디플로마트 크림이어야 하지 않나 싶은데, 슈크림 붕어빵에 들어가는 크림은 인공과일향이 나는 불투명한 노란색의 크림이다. 모든 노란색 크림이 다 슈크림은 아닌데, 슈크림 붕어빵은 왜 슈크림 붕어빵이라고 부르는 걸까. 뭐, 장미는 장미라 부르지 않아도 그 향기에 변함이 없는 것처럼 슈크림 붕어빵은 슈크림 붕어빵이라 부르지 않아도 여전히 맛있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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