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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원 Apr 29. 2024

나를 들여다보는, 글쓰기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가끔 드라마나 소설이 이상한 전개로 흘러갈 때 사람들은 말한다. “작가 미친 거 아냐?” 끝내주는 작품을 봤을 때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작가 미친 거 아냐?” 작가만큼 미쳤다는 말과 자주 쓰이는 직업이 있을까? 이쯤 되면 작가들이 미치광이인 건지, 글을 쓰다 보면 미치는 건지, 미친 사람들이 작가가 되는 건지, 미쳐야만 글을 쓸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연극이나 뮤지컬에 작가가 직업인 주인공 중에 왜 멀쩡한 인간이 없는지 알 것도 같다. 어떤 날은 내 글이 너무 재밌다가, 어떤 날은 내 글이 쓰레기만도 못 한 것 같고, 그렇게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기분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어디 쉽겠는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좋았다. 어렸을 때는 당시에 하던 게임 캐릭터들로 2차 창작 소설을 쓰기도 했었는데 아무래도 그때부터 과몰입 오타쿠 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이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어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시작한 행동은 생각보다 마법 같은 결과를 일으키기도 하니까. 마리사 마이어 작가는 열네 살에 <세일러 문> 팬픽션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데렐라, 빨간 모자, 라푼젤, 백설공주, 눈의 여왕을 모티프로 한 <루나 크로니클> 시리즈는 정말 명작이니 제목 보고 뒷걸음질 치지 마시고 다들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누워서 왕자님을 기다리는 여주인공보다 내가 직접 왕자를 구하러 가는 여주인공이 취향인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어쨌든 나는 어릴 때부터 집구석에서 글을 끄적이곤 했다. 놀랍게도 지금도 그때 쓴 소설 한글 파일이 남아 있는데, 판도라의 상자 같아서 열기 무섭다. 작가를 괴롭히는 효과적인 방법이 자기가 쓴 문장을 작가 앞에서 읽어주는 거라고 어디서 봤는데 맞는 말인 것 같다.


 내가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했던 게 얼마만큼의 영향을 끼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대학을 운 좋게도 논술 전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학에서 필수 교양이었던 ‘글쓰기’를 듣게 되었는데, 교수님 무척 좋은 분이셨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배우는 글쓰기가 너무 좋았다. 혼자서 글을 쓸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고 다른 수업들처럼 과제가 있어도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교양 수업은 전공 수업과 달리 학교 전체의 다양한 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고, 나는 합평 때마다 무시무시한(?) 국문학과 학생들의 날카로운 질문 세례를 받아내야 했다. 이과생 나부랭이에게도 최선을 다하는 그들을 보며 나는 내가 합평을 하고 있는 건지 인사청문회에 와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아니,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게다가 나는 말보다 글이 편한 사람이라 적당한 대답을 바로 떠올릴 수 없었고, 어버버거리며 내가 무슨 말을 지껄인 거지 하면서 대답을 마칠 때가 많았기 때문에 두 배로 고통스러웠다. 아무튼 그 뒤로 잔뜩 위축돼서 안 그래도 소심한 편인 나는 공개적인 합평 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글을 쓰고 있으며, 글쓰기를 나 자신을 위로하는 방식으로 선택했다. 사실 나는 아직도 나라는 복잡한 인간에 대해 완벽히 알지는 못한 상태인데, 글을 쓰다 보면 나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넓어지는 기분이 든다. 이전에 쓴 글들을 읽고 있으면 부끄럽지만, 한편으로는 당시에 내가 어떤 상처를 받았으며 어떠한 마음으로 이런 글을 썼고 어떤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가 느껴져서 스스로가 좀 짠하기도 하다. 여기서처럼 이렇게 공개적으로 쓰는 글도 있고,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아 비공개로 두고 가끔 들여다보며 고치고 있는 글도 있다. 갑자기 뭔가 꽂힌 날에는 노트북을 켜고 쓰기도 하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의 조각들은 휴대전화 메모장에 끄적여둔다. 언젠가는 써먹겠지 하면서.


 나는 이혼한 집 딸, 전문대 출신,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라는 몇 가지 단어로 간편하게 설명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밀크티와 공포영화, 비 오는 날, 동물, 따뜻한 대화,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책 읽는 걸 좋아하고, 뭔가 이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자주 우울하고, 주기적으로 모든 걸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어 하는,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무엇이었다. 쓰는 과정을 통해 나는 배웠다. 사람은 몇 가지 키워드로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확실한 존재라는 사실을. - 홍승은,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중에서


 나는 고쳐쓰기에 강박이 있는 것처럼 글을 쓰고 고치고 또 고치고 계속 뜯어고치다가 이제는 더 이상 못 해 먹겠다 싶을 때 글을 발행하는데, 사실 그것도 완성해서라기보다는 지쳐서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내보내는 것에 가깝다. 지금 이 글도 몇 번 고친 건지 세다가 포기했다. 노트북으로 쓴 글을 휴대전화 화면으로도 읽어보고, 메모장에 썼던 글을 브런치에서 읽어보며 수정하고 또 수정한다. 무서운 점은 그렇게 고친다고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고치고 고쳐도 계속 고치고 싶은 게 눈에 보여서, 완성은 아니어도 고쳐쓰기를 끝낼 지점은 찾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가끔은 내가 내 글에 파묻히는 기분도 든다. 역시 이래서 마감이 있어야 한다. 마감이 없다면 나는 아마 끊임없이 고쳐 쓰고 고쳐 쓰다가 영원히 글을 완성하지 못한 채 내 글들을 끌어안고만 있을지도 모른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로 시작하는 시 <해변의 묘지>로 유명한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작품을 완성할 수는 없다. 단지 어느 시점에서 포기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유명한 작가들도 이런데 나 같은 사람은 당연하겠구나! 그냥, 내가 할 수 있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봐야지. 그리고 아무래도 고민하고 고쳐가며 고생해서 고통스럽게 쓴 글이 쉽게 쓴 글보다는 조금 더 낫겠지…. 그래야 할 텐데.

유명한 작가들도 이런데 나 같은 사람은 당연하겠구나!
 글이 쉽게 쓰일 때면 최은영 작가의 <내게 무해한 사람>을 찾아 읽는다. 특히 마지막 <작가의 말>에 실린 진심을 되새긴다. “내 마음이라고, 내 자유랍시고 쓴 글로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그들에게 상처를 줄까 봐 두려웠다. 어떤 글도, 어떤 예술도 사람보다 앞설 순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지닌 어떤 무디고 어리석은 점으로 인해 사람을 해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겁이 났다. 나쁜 어른, 나쁜 작가가 되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쉽게 말고 어렵게, 편하게 말고 불편하게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 홍승은,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중에서


 글을 쓴다는 건 마냥 즐겁기만 한 취미는 아니다. 주말에 방에서 글을 쓰다 보면 몇몇 작가들이 왜 규칙적으로 생활하며 정해진 시간에 자리에 앉아서 글을 쓰고 꾸준히 운동하는 너무 잘 알겠고, 나는 전업 작가를 했다가는 몸도 정신도 피폐해져서 병들겠구나 싶을 정도다. 에세이는 그나마 괜찮은데 소설은 정말 답이 없다. 하필 소설도 단편보다 장편을 좋아해서 쓰고 있는 것들이 죄다 장편인데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작가가 되려면 조금 더 미쳐야 하는데 나는 아직 미치지 못한 듯싶다. 뭐, 그래도 죽기 전에는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무책임한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에게 이렇게 외쳐본다. “미래의 나, 파이팅!”



글을 쓰며 알게 된 점

글은 마감이 있어야 완성된다.

아무래도 전업 작가는 어려울 듯


글쓰기,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나라는 존재를 더 깊게 알아가고 싶은 분

내가 가진 상처를 들여다보고 위로하고 싶은 분

꾸준하고 성실하며 정신이 건강한 분


사진: UnsplashDebby Hud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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