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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원 Apr 22. 2024

인생 운동을 찾아서, 수영(2)

매일을 헤엄치는 법

 나한테는 수영이라는 운동의 진입 장벽이 너무 높았다. 하지만 막상 수영을 시작하고 나니, 모든 상황에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적용되어 수영에 내 생활을 맞추게 되었다. 먼저, 수영을 안 가는 날에만 약속을 잡게 됐다. 그런데 내가 수영을 안 가는 날은 수영장이 문을 안 여는 날인 일요일뿐이었다. 월수금은 강습, 화목토는 자유 수영을 갔다. 심지어 추석 연휴에 수영장이 쉬자 기어코 문을 여는 수영장을 찾아내서 가족들과 함께 원정 수영을 갔다. 나는 승부욕이 있는 편은 아니다. 누구를 아득바득 이겨보고 싶었던 적도 없다. 다만 내가 못 참는 건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상대’가 아니라 ‘이게 뭐라고 이걸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초기에는 강습 진도가 워낙 빠르기도 하고 매일 새로운 배울 거리가 하나씩 생겨났다. 배우자마자 바로 되는 게 당연할 리 없는데도 ‘이게 왜 안 되지?’하는 답답한 마음에 강습이 없는 날에도 퇴근하자마자 저녁을 간단히 먹고 수영장에 갔다. 18시~19시 사이에는 강습도 없고 자유 수영하러 온 사람이 많지 않아 수영장이 한산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영장에서 어제 배운 걸 복습하며 한 시간 넘게 연습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운동을 매일 하는 것도 기본적인 체력이 있는 사람이 해야 체력이 느는 거지, 나처럼 하루살이 체력을 가진 사람이 매일 운동을 하면 오히려 체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체력을 늘리려고 운동을 하는 건데, 나는 안 그래도 얼마 없는 체력을 바닥까지 끌어다 쓰고 있었다. 문득 이러다가 쌍코피가 터지겠다 싶어서 조금씩 수영장을 매일 가겠다는 욕심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보니 정말 초반에는 수영에 미쳐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게, 물이 너무 좋았다. 예전에는 귀에 물이 들어갔을 때의 먹먹함이 싫었는데 이제는 약간 차가운 물이 나를 감싸며 사방이 고요해지는 포근함에 중독되었다. 물 밖에서는 항상 정신없이 살다가, 어떠한 전자기기도 없이 수영장에 들어가면 왠지 전화가 터지지 않는 어느 먼 나라로 떠나 온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물은 내가 몸을 던지는 대로 나를 받아주었고, 나는 내가 혹시 태어나기 전 엄마 뱃속에서 양수 안에 떠다니던 느낌을 무의식적으로 그리워하는 건가 생각했다. 더운 여름날 시원한 수영장에서 수영하고 집에 돌아오면 얼마나 개운하게 잠들 수 있는지 모른다. 심지어 운동을 했는데 땀이 나서 찝찝한 느낌도 없다는 점이 정말 최고다. 수영장 딸린 저택을 살면서 부러워한 적이 없었는데, 수영을 시작하고 나서야 그게 그렇게 부러워졌다. 그래서 작년 가족여행을 큰맘 먹고 11m 수영장이 딸린 풀빌라로 갔다. 우리 수영장은 촬영이 안 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수영하는 모습이 대체 어떤 꼴지 항상 궁금했다. 풀빌라에서 가족들과 서로 휴대폰으로 영상을 찍어줬다. 운동메이트가 있으면 이래서 좋구나. 서로 자세를 봐주며 같이 연구하고, 무엇보다 공통의 관심사가 생기다 보니 가족간에 대화도 많이 늘었다.


 나는 4개의 영법 중에 배영을 제일 배우고 싶었다. 물 위에 누운 채 둥둥 떠 있는 게 신기했고 저렇게 떠 있으면 어떤 기분이 들지 항상 궁금했다. 배영은 예상대로 재미있었다. 자유형은 매번 숨이  힘든데 배영은 호흡이 힘들지 않다. 게다가 필라테스를 하며 생긴 근육들이 수영을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내가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코어에 힘이 들어가서 희한하게 몸이 물 위에 잘 떴다. 문제는 발차기였는데, 아무리 열심히 발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다. 뭐가 문제지? 도무지 앞으로 갈 수 없어서 다음 날도 그다음 다음 날도 자유 수영을 갔다. 그렇게 계속 고민하며 유아 풀장에서 표류하고 있는 나에게 갑자기 고인물로 추정되는 고수분이 오시더니 발차는 방법을 고쳐주시고 쿨하게 떠나셨다. 그런데 그대로 하니까 앞으로 가졌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그 뒤로 시간대가 안 맞았는지 뵐 수가 없었다. 여기서나마 감사를 전한다. 선생님 덕분에 저는 더 이상 표류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답니다. 접영까지 모두 배운 지금도 여전히 배영이 제일 좋다. 가끔 똑바로 못 가고 엉뚱한 곳으로 향하기도 하고, 코에 물이 들어가기도 하지만, 물 위에 누워 수영장 천장을 보면서 물살을 가르고 나가는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사실 수영장에 다니면 같은 반 사람들이랑 술도 먹고 야식도 먹고 한다고 해서 살짝 겁을 먹었다. 나는 그렇게 분위기에 휩쓸려서 친해져야 하는 상황을 싫어했고 그건 내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도 우리 반이 늦은 저녁 수업이라 끝나면 밤이 너무 늦었고 수영장 문을 닫을 시간이라 그런 사적인 만남이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우리 반 사람들 역시 하나같이 다 내향형 인간들이어서, 두 달쯤 지나서야 서로 고개로 꾸벅 인사를 했고 네 달쯤 지나서야 말을 하고 그랬다. 처음에 25명 정도였던 우리 반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줄어서, 접영을 배울 즈음에는 6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중간쯤 서던 내가 이제 1, 2번에 서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지만 수영은 아니었다. 뒷사람은 앞사람이 헤치고 간 물길을 따라가면 되는데 맨 앞에서는 내가 물살을 가르며 길을 개척해야 하니 물의 저항을 그대로 받아내야 한다. 그러니 똑같이 50분 강습을 받아도 맨 앞에 서는 날은 진짜 너무 힘들어서 화장실을 핑계로 탈주해 버릴까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하하.


 수영을 시작하기 전의 나는 내가 운동을 가고 싶어서 가게 되는 날이 올 줄 상상도 못 했다. 필라테스는 일주일에 두세 번을 간신히 다녔는데 수영은 수업이 없는 날에도 짐 챙겨서 연습하러 갔다. 심지어 수영을 잘하기 위해 근력 운동을 하려고 알아보는 중이다. 운동을 잘하기 위해 또 운동을 하려고 한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 나에게 일어난 건지. 게다가 수영은 성취가 피부로 와닿는 운동이라 나 같은 성취 중독자에게 딱이다. 필라테스는 물론 좋은 운동이지만, 갈 때마다 항상 근육들이 조져져서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아니, 왜 1년 넘게 해도 맨날 힘들지?’하며 내 실력이 늘고 있기는 한 건가 의문이 들었다. 인바디를 재도 눈에 보일만한 큰 변화가 없는 시기가 오자 의욕도 점점 떨어졌다. 그런데 수영은 어제는 25m 레인의 반도 못 갔는데 이제 반은 가고, 그러다 어느덧 25m를 한 번에 갈 수 있게 되는, 내가 이뤄낸 성취가 눈에 보인다. 이게 왜 안 되는지 고민하 가설을 세워서 다시 내 몸으로 검증하며 결과를 도출해 가는 과정이 제법 뿌듯하다. 실패해도 괜찮다. 다시 하면 되니까. 수영을 배우며 나는 조금은 실패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 실패들이 쌓여서 어느 날 갑자기 커다란 깨달음으로 찾아오곤 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비록 접영이 지금은 죽어도 안되지만 언젠가는 지금의 실패들이 내가 접영을 할 수 있게 되는 거름이 되어 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다.


멀리 갈 수 있겠지. 지금까지 걸어온 것처럼. 매일을 헤엄치면 돼. 다이빙은 여전히 서툴지만 그래도 용기 내어 시도해 본다. 물을 잔뜩 먹어도 괜찮다. 나는 이제 헤엄칠 줄 아는 사람이니까. 처음 수영을 배울 때, 선생님이 이런 농담을 하더라고. "생각보다 물 많이 먹죠? 수영인들 사이에 이런 말이 있어요. 여기 수영장에 있는 물 다 마시면 그때는 국가대표가 된다고.” - 이연, <매일을 헤엄치는 법> 중에서


 오늘도 다짐한다. 나중에 근육질 할머니가 되어야지. 수영장 고인물, 조용히 와서는 자유형 뺑뺑이를 돌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은둔 고수가 되고 말 테다.



수영을 하며 알게 된

운동도 재미있을 수 있다.

사람은 물에 뜬다.

지금의 실패들은 언젠가 큰 깨달음으로 돌아온다.


수영,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실력이 느는 걸 체감할 수 있는 운동을 찾는 분

땀냄새나는 운동을 싫어하는 분

연구하고 탐구하는 걸 좋아하는 분


사진: Unsplash의CHUTTERSN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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