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생활
큰아이의 초등학교 첫 여름방학이다. 유치원 내내 배운 영어도 공립학교를 가며 쓸 일이 줄어드니 아이 스스로 왜 배워야 하는지 동기를 잃고, 다른 교과과목도 특별히 학원을 다니고자 하는 의지가 없어 나는 곁에서 일단 지켜보는 중이다. 지금은 아이가 학교생활에 집중하고 충실한 것만으로도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역할은 아이의 호기심을 일깨워주고 배우고 싶은 이유를 찾도록 도와주는거라 생각해 요즘은 거기에 집중하고 있다. 공공 서비스 예약 시스템 덕분에 평생 가 본 적 없는 서울 구석구석을 아이와 함께 낯선 시선으로 놀라움을 갖고 들여다보고 있다.
오늘의 목적지는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 체험관인 금천 순이의 집이다. 주변의 패션 아울렛만 가봤지, 60년대 섬유공장 여공들이 살던 쪽방촌이 그 곳에 남아있는 줄은 몰랐다. 다세대 주택 좁은 골목 한 켠에 자리한 체험관 건물을 찾아가니, 누구 하나 지키고 선 사람도 없어서 아이와 담력훈련하는 심정으로 캄캄한 지하 쪽방부터 삐걱거리는 문을 하나씩 열어젖혔다. 분위기가 납량특집 귀곡산장 저리가라였지만 둘이 손을 꼭 잡고 겨우 끝까지 들어가 볼 수 있었다.
기껏 몸 하나 누일 공간에 서너 명이 붙어 창문도 없이 살았지만 틈틈이 소설도 읽고, 기타도 치고 야학도 다니며 미래를 꿈꾼 사람들 중에 지금은 작가와 정치인으로 잘 알려진 이들도 있었다. 비록 당시에 가진 것, 배운 것이 없어서 들어간 열악한 곳이지만 그 곳에서 누군가는 또 세상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되려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 자신들의 꿈을 다듬어갔나보다.
“너 이런 데서 살라면 살 수 있겠어?”
“음, 혼자선 안되는데 같이 살 수는 있을 것 같아.”
내 질문에 아이는 좁고 어두운 방보다 외롭고 무서운 마음이 더 큰 문제라도 되는 것처럼 대답했다. 나도 그래. 너랑 같이 있으면 겁이 안 난다.
“엄마 어릴 때도 이랬어?”
“할머니 시절에 생긴 곳이래. 전쟁 끝나고 너무 가난해서 여공들이 이런 데 모여 살며 근처 공장에서 열심히 옷 만들어 다른 나라에 팔아 돈을 벌었대. 지금은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었으니 중국, 베트남 같은 나라에 이런 공장이 돌아가고 있을까?“
딸은 엄마처럼 만들고 그리는 게 좋다는 얘기를 종종 하는데 그런 것들이 누군가에겐 여가이고 취미,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배부른 사치였겠구나. 먹고 살기 위해 옷을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는 교과서 속 근현대사가 이번 방문을 통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사건으로 다가왔다. 대한민국이라는 갱년기 아줌마가 질풍노도 시절 써나간 일기장의 미처 찢겨나가지 않은 흑역사 한 페이지를 살짝 들춰본 기분이다. 기억할 수 있도록 보존되어 다행이고 이런 날들이 있었기에 지금이 있는 거겠지. 옛날 구멍가게를 재현한 1층의 가리봉상회에서 초등학생도 직접 만들 수 있는 간단하고 알록달록 예쁜 가죽지갑 만들기 체험을 해보는 것으로 오늘의 탐방을 마무리 했다. 엄마의 나이를 도무지 가늠하기 힘든 우리 딸은 엄마 어릴적에도 이런게 있었냐며 진열된 과자와 장난감 하나하나 신기하고 궁금해했다. 과거와 현재, 세대와 세대가 연결되는 특별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