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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우소 Oct 26. 2023

우리 중 그 누구도

가까운 미래

동물들이 모두 모여 인류퇴진비상행동을 열었다.


먼저 문어가 발언대에 섰다. 오랫동안 인간들에 의해 맛 좋고 영양 좋은 산해진미로 여겨져 산 채로 펄펄 끓는 물에 담가지는 고통을 겪어온 기억력 좋은 문어는 자신들의 유구한 역사와 선조들의 희생을 기억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 문어 추모비와 기념관을 세웠다. 문어들은 인간과 진심으로 교감하고 공존할 수 있길 원했지만 인간은 자신들을 한낱 미물 식재료로 취급하며 무자비한 살육을 정당화해왔다고 분개했다. 자신들은 생명이 위협받는 순간에도 오직 먹물을 뿌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철저한 약자임을 다른 동물들에게 호소하고 개미와 꿀벌 등 비슷한 지능을 갖춘 생명체들의 연대를 촉구했다.


개미와 꿀벌은 자신들이 흙에 있는 영양분을 순환시키고 식물의 씨앗을 퍼뜨리는 등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에도 그 업적을 제대로 인정받거나 동등한 생태계 구성원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꿀벌들은 양봉업자들이 자신들을 식민지 노예처럼 부리며 애써 모은 피같은 꿀을 약탈해간다고 분개했다. 불합리한 노동관행을 하루빨리 개선하지 않았을 때 자신들의 파업이 생태계에 미칠 영향을 생각해보라며 협상이 결렬될 경우 인류는 종말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해야할 것이고 자신들이 인류를 대체할 새로운 제국을 독립적으로 세울 것임을 선포했다.


여기에 돼지와 소도 동조했다. 도살장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소 한 마리가 자신들은 인간과 특별히 가까이 지내며 번영을 누린 것처럼 보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말 못할 비극이 많았다고 눈물고백을 했다. 그 소는 자신의 주인을 위해 평생 몸바쳐 일했는데 어느 날 주인이 요리사에게 자신을 팔아넘기며 우리 안의 다른 식구들도 다 데려가라 요구했다고 한다. 한 마리만 데려가면 그 소가 죽으러 가는 걸 눈치챈 나머지 소들이 충격을 받아 육질이 나빠져 상품가치가 떨어진다는게 이유였다. 동물들은 소의 이야기에 탄식하며 수군거렸고 지능도 높고 감성이 풍부해 인간에 대한 배신감, 심한 좌절과 분노를 느낀 가축연대는 무력시위를 일으키기 일보 직전에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주요지침을 서로 공유했다. 발언대에 선 소는 먹잇감이 되어 인간들의 식탁에 오르기 위한 삶을 살며 굴욕적인 종족의 번영을 누리느니 더 이상 새끼를 낳지 않겠다는 선언을 끝으로 퇴장했다.


연어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힘겹게 남긴 자신의 소중한 후손들이 미처 알에서 깨기도 전에 무차별적으로 잡아먹어버린 인간들의 잔인함을 규탄하고 사죄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산란기에 접어들어 강을 거슬러오르는 고통을 견뎌내느라 스스로 통각을 차단하고 면역억제를 시작해 반송장 상태로 비늘이 떨어지고 살이 썩은 채 시가행진을 이어가는 연어들의 좀비같은 모습에 이를 지켜보던 모든 동물들이 으스스함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발언대에 선 쥐는 인간이 자신들을 불결해서 박멸해야할 존재로 정의하며 인류의 발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무자비한 생체실험과 대학살을 당연시해 온 만행을 고발했다. 쥐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전쟁을 지휘할 총책임자를 세계최초로 임명한 뉴욕시에 사는 200만 마리의 쥐들도 같은 시각 광장에 모여 반전과 평화를 촉구하는 촛불을 들고앉아 다큐멘터리 영화를 함께 감상하고 문어의 꿈을 열창하며 인간이 최소한의 연민과 감사의 마음을 갖길 바란다는 기도를 올린 뒤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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