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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리 Dec 08. 2024

약을 먹는 것보단 문제를 해결하는 게 먼저 아닐까요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한 후로 감정이라는 녀석이 죽어버렸다.

아침을 먹고난 후 약 한 알을 먹으면

미친듯이 날뛰던 감정이 고요해지다가 그대로 팍 죽어버렸다.

행복도 슬픔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눈을 뜨고 있고 숨쉬고 있다는 것, 그게 내가 느끼는 전부였다.

남자친구는 내가 평소랑 좀 다른 것 같다고 했다.


출근을 해서도 늘 쿵쿵거리던 심장이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누가 화를 내도, 소리를 쳐도, 아무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퇴근을 하고 집으로 가면 저녁 7시부터 밤 10시까지 이유없이 엉엉 울었다.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


우리팀 팀장은 '잘 드는 칼만 쓴다'는 신조를 가진 나르시스트이자 소시오패스로 업무의 70%를 나에게 몰빵시켰다. 그렇다고 그 노고를 인정해주느냐? 전혀. 더 채찍질하고 바라기만 할뿐이었다.


우리팀 특성 상 출장이 굉장히 많았는데, 나는 거의 한달 내내 사무실에 없고 해외에만 있는 날도 있었다.

다양한 시차가 있는 국가들을 정신없이 돌다보니 몸은 망가질대로 망가져 있었다.

그래도 해외출장이 주는 메리트가 크지 않냐고? 해외출장은 모든 사람들의 로망 아니냐고?

해외에서 온갖 부당한 일을 겪고, 밤마다 울고, 일주일간 같이 출장가는 이들의 시녀노릇을 톡톡히 하고 나면, 나의 자존심은 상할대로 상하고 매일 영혼이 죽어나가는 느낌이었다.

"근처에 발마사지 샵 알아봐 놔. 맥주 마시고 싶으니까 맥주집도 알아봐놓구."

팀장은 나보다도 한참 어린 상위기관 담당자들 앞에서 그런 말을 참 쉽게 쉽게 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어른의 모습이란.

 

우리팀 과장이라는 놈은 일이 하기 싫어 죽을 것 같아 하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공조직은 일을 잘하든 못하든 철밥통이니 일을 열심히 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는 소리를 참 잘도 했다. 이 사람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툭하면 그만둔다 소리를 해서 팀장이 일을 시키지 못했다. 안그래도 인원이 부족한데 한명이 나갈까봐 전전긍긍.

하지만 나에겐 차라리 과장이 없는 편이 나았다. 신입사원만큼의 업무량도 소화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거기다가 짬때리기는 말할 것도 없다.


***


"사업 담당자는 따로따로인데, 저랑 상의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발주를 넣고선 저보고 입금을 하라는게 어딨어요! 엄연히 다른 사업이잖아요."

"그래서, 지금 못하겠다는 거예요?"

"네. 재고는 확인해보셨나요? 저로서는 재고가 있는데도 발주를 하신 부분이 이해가 잘 안가요. 상위기관이랑도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잖아요. 이 건은 절차대로 안하신 부분이구요."

과장은 절차적인 과정을 이야기 할 때마다 내 말을 툭툭 자르고는 "그건 모르겠고~"라는 소리를 앵무새처럼 해댔다. 무책임하고 무능한 사람.


어떤 선배가 말했다. 본인이 맡은 일 대충 하는 사람 치고 인생 똑바로 사는 사람 못봤다고. 결혼도 하고 가정도 있으면서 툭하면 그만두겠다느니 뭐라느니, 해보지도 않고 그런 말들을 내뱉는 과장이 나에겐 이 회사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이었다.


"과장님, 원래는 계약을 하고, 물건을 받고, 보고를 하고, 상식적인 과정들이 있잖아요."

"지금 나 가르치려 드는 거예요?"

"업무 이야기를 하는데 왜 그런식으로 말씀하세요?"

"됐고, 계속 얘기해봐요."

"지금 절차대로 되지 않은게 첫번째 문제고, 계약부서에서도 해당 업체와의 계약이 불가능하다고 통보가 왔어요. 그래서 계약은 불가능합니다."

"알겠어요."


"과장님, 그리고 소통방식에 대해 좀 부탁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요."

"1절만 하세요. 일 얘기만 해요."

'1절만 하세요'라는 말이 회사에서 할 수 있는 말이었나?

"하하... 소통도 업무의 일환이에요."

기가 막혀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봐라, 또 가르치려 든다."

과장은 기분나쁘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버렸다.


약 효과가 꽤 좋은 것 같다. 평소였으면 나도 언성이 높아져 큰소리가 오갔을텐데, 개싸움을 하듯 짜증을 내고 막말을 퍼부어대는 과장 앞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과장은 귀까지 빨개져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


수능을 치고 많은 학생들이 자살시도를 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내가 수능을 봤던 날을 떠올렸다. 나는 언어영역 마킹을 밀려 쓰는 바람에 2교시 수리영역도, 3교시 외국어영역도, 그 이후의 사회과목도 모두 울면서 시험을 치렀다. 마지막 제2외국어 시험을 보고 깜깜한 6시 교문을 나서는데 내 인생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할 것도 없이 수능 성적은 평소보다 훨씬 나쁘게 나왔다.


아빠는 나보고 쓰레기라고 했다. 무식하고 쓸모없는 년이라고 했다. 엄마는 나와 두달간 말을 하지 않았다.

아빠와 엄마는 매일 죽일 듯이 싸웠다. 당신은 집에서 전업주부하면서 애 대학도 똑바로 못보내고 도대체 뭘 한거야, 당신은 생활비 교육비 넉넉하게 줘본 적 있어? 난 당신이랑 더이상 못살아. 둘째 데리고 언니네 학원 들어가서 강사나 하며 살거야.


수능이 끝난 후 우리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가족 모두가 말했다. 이렇게 된 건 모두 니 책임이라고.


***


요즘들어 부쩍 모르는 사람을 차로 치는 꿈을 많이 꾼다. 화들짝 놀라서 잠에서 깬다. 죽음에 대한 생각도 늘었다. 내가 죽으면 누가 슬퍼해줄까? 가족들은 별로 슬퍼하지 않을 것 같고, 친구들도 적당히 슬퍼하다 자기들의 삶으로 돌아갈 거고, 좀 많이 슬퍼할 것 같은 남자친구가 마음에 걸렸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면 내 시신을 보게 될 주민들이 트라우마를 얻을 거고, 한강에 뛰어내리면 내 시신을 건져낸 사람이 트라우마를 얻을 거고, 집에서 조용히 죽으면? 집값이 떨어져 아파트 주민들이 피해를 보겠지? 죽는 것도 어떤 방식으로든 남에게 피해주는 일이라 참 쉽지 않다.


내 앞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무기력하기만 한,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모습에 절망해 매일 밤 울며 잠이 들었다. 내 감정을 마음대로 들었다 놨다 하는 이 신비로운 약이 주는 반응들을 그대로 관찰하기로 했다.

  

***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의사의 한마디 말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니요..."

"약은 잘 드셨어요? 그동안 어떠셨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의사선생님이 건네준 휴지로 눈물을 닦으며 한참을 펑펑 울고난 후, 2주 간 있었던 나의 감정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의사선생님은 그게 당연한 과정이라고 했다.

"감정을 바닥까지 떨어뜨렸다가, 다시 약으로 조절하면서 올리는 과정들을 겪을 거예요."

위험한 생각까지하면서 극한까지 치달았는데, 이게 당연한 과정이었다고?


"선생님... 약을 먹는 것보단 눈 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먼저 아닐까요. 회사를 그만두든, 휴직을 하든. 이 약을 먹고 제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죠? 주변 상황들과 환경은 여전할테고, 모두가 저를 힘들게 할거고, 살아갈 이유가 없는 건 여전한데요."

"환자분, 지금 상황을 바꿀 수 없는 처지 아니에요? 일단 살고 봐야하잖아요."

"저는... 희망이 없는 것 같아요. 삶에 스위치가 있다면, 그 스위치를 끄고, 아주 긴긴 잠을 자고 싶어요. 지쳤어요 저는."

"환자분, 이번엔 약을 좀 세게 넣어드렸구요. 일주일 뒤에 뵐게요."


아... 결국 더 힘들어지기만 했잖아.

병원... 그만다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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