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라는 직업의 비애
번듯한 직업과 멀쩡한 일상을 지내는 나에게 명절은 그렇게 달갑지 않은 날이다. 광고, 홍보 등을 다루는 마케터라는 직업과 디자인그래픽을 다루는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언제나 고연령자분들에게 설명하기란 참 어려운 직종이라는 걸 매년 느낀다. 조부모님의 연세가 6-70세 정도이시라면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겠지만 필자의 조부모님은 90세를 가까이하시는 연세이시다 보니 직업을 선택한 지 4년이 지나도록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명확히 설명드린 적이 없다.
3년 전 명절, 디자인한 제품들을 선물로 들고 명절에 찾아뵈었을 때 분명 본인의 직업에 대해 잘 설명드린 줄 알았지만 얼마 후 듣은 바로는 박스 만드는 작은 회사에 다니는 줄 알고 계셨다 하니 세대 차이의 극복은 여전한 과제로 남아있고, 취업은 평생 생각 없는 본인의 입장에서 조부모님께서 살아계시는 기간에는 그분들의 기준에 맞는 대기업 직업의 연봉은 우습게 볼 어마무시한 뉴스거리를 갖추지 못하는 이상 이러한 오해와 잔소리는 평생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될 터이다.
올해 추석에는 또 새로운 이야기도 들었다. 신차출고한 지 얼마 안 되어 올해 법인사업자 경비처리를 위해 신차를 한대 더 출고한 내 모습이 젊어서 돈도 안 모으고 놀러 다니는 카푸어로 보이셨을까, 반가움의 인사 뒤로 많은 잔소리와 함께 결혼하신 직장인 친척지인들과의 비교대상이 되었다. 매년 매입매출의 비례문제로 세금 때문에 골머리 썩고 있는 나의 마음속 어떤 말들도 다 핑계로밖에 들릴 것이 확실하기에 별다른 부연설명 없이 잔소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얼마 전의 나보다 한 살 많은 친척형의 기분 좋은 결혼소식도 결국 조부모님을 통하면 비교라는 무기로 가다듬어져 날카로운 창으로 돌아와 꽂히기는 매한가지일 뿐, 번듯한 집과 사업장을 자력으로 갖추지 않는 한 결혼생각이 없는 본인의 의사를 밝혔다가 등짝 한번 세게 맞고 야 말았다.
아무리 사업자로 몇천, 몇억의 매출과 과정의 좋은 성과가 있어도 나는 그렇게 조부모님께는 간간히 돈벌이하는 철부지 대학원생일 뿐이다. 유년기 시절 명절과는 달리 각자의 바쁜 삶에 아무도 찾아주지 않아 적막이 흐르는 추석에 나이 제일 어린 손자가 남아서 해드릴 거라곤 이야기 친구인데, 창업이 섞인 나의 삶의 이야기는 나이 많으신 분들에게는 달갑지 않을 뿐이다.
흐려져가는 20대 마지막 끝자락에 서서, 이제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는 건 바라지 않는다. 사업을 하면서 항상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고 매일 새로운 상황에 놓여 극복하는데 애를 태우다 보니, 일상의 흥미에 많이 무뎌지게 되어 어느 순간 살아가는데 그저 안정적이고 한 만큼만의 결과만 도출되어도 만족하는 요즘의 현실은 누군가에게 내가 과하게 좋게 비추어지는 모습조차 꺼려지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있는 수많은 비즈니스 만남에서는 좋은 첫인상과 일에 대한 내 진심이 잘 느껴져 직업적 파트너로 최선의 선택이라 느껴지길 바랄 뿐이며, 지인으로써는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젊은 청년이기를 바랄 뿐 그 이상을 바라진 않는 것은 정말 사실이다. 그저 단지 내가 정말 열심히 살고 있고, 좋은 결과가 있으면 같이 좋아해 주고 성과물들을 나눠가질 수 있는 사람들로 하루하루가 채워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런 나에게 앞으로도 명절에는 어떤 좋은 일이 있어도 어른들의 근심거리를 끌고 올 내 자랑은 더욱이 피하고자 한다.
평소 같았으면 웃어넘길 조부모님의 잔소리가 한 달 한 달 노력하며 쌓아 올리는 올해가 유독 힘들어서일까 가볍게 스쳐지나지 않고 깊게 파고들었는지 유난히 밤공기가 차게 느껴지긴 했다. 올해는 내년 신사업을 준비하는 게 많아 용돈도 못 챙겨드렸는데 다음 명절에는 용돈이라도 두둑하게 넣어드려 잔소리규모라도 조금 줄여봐야지 싶다.
문뜩 궁금해진다. 그래픽 디자이너분들은 나이 많으신 조부모님께 본인 직업을 뭐라고 소개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