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는 꿈을 꿨다. 27살이 된 이래로 처음 꾸는 꿈이었다. 민지는 꿈에서 꿈이라는 것을 깨닫곤 하고 싶은 것을 상상하며 자유롭게 놀았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구름을 먹어보고 달토끼와 대화했다. 갑자기 하늘이 번쩍하더니 천둥소리가 들리면서 비가 세차게 내렸다. 민지는 당황해서 숨을 곳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무 아래는 번개를 맞을까 걱정이 되어 가지 않았다. 움막 같은 곳은 약해 보여 역시나 가지 않았다. 그나마 있는 집도 금방 날아갈 듯이 휘청댔다. 민지는 구멍을 파야겠다고 생각했다. 땅이 파인 모습을 상상했지만 민지의 상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결국 구멍이 파진 상상을 하다가 되질 않자 잔뜩 지쳐버린 민지는 풀썩 주저앉고 손으로 파기 시작했다. 구멍이 조금씩 넓어질 때마다 빗물이 고여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민지는 비가 그치는지도 모르고 구멍을 파고 있었다.
그때 꿈에서 깼다. 민지는 습관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소리 지를 틈도 없이 후다닥 출근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섰다. 20분을 기다려 시내버스를 탄 뒤 환승을 하여 회사로 향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은 휴대폰을 하고 있었다. 민지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배터리가 나가서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민지는 자연스레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이 정겨웠다. 민지는 장염 걸렸다고 할까 생각하며 출근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다.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민지는 아까의 생각을 모두 던져버리고 지각하지 않으려 회사로 뛰어갔다. 숨을 한 번 고른 뒤 회사 문을 열었다. 회사 사람들은 회의에 열중이었다. 민지의 등장에 대리는 눈을 찌푸리며 눈치를 줬다. 민지는 죄송합니다, 작은 소리로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민지는 과일청 판매업체 회사의 고객상담원이다. 회사 분위기가 좋아 힘겹게 1년을 버텼지만 2년이 되기 전에 백수가 되어야겠다고 줄곧 생각했다. 휴식시간이 자유롭지 못하고 근무시간 내내 긴장을 놓칠 수 없으며 화가 난 고객을 상대하는 경우 마음이 산산조각 나는 듯 괴롭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감정노동하고 싶지 않았다. 가방에 늘 퇴직서를 넣고 다니지만 오늘도 꺼내지 못하고 퇴근했다. 축 늘어진 몸을 이끌고 버스를 탔다. 낮에 봤던 풍경과는 달리 까만 밤과 어우러진 모습이 운치 있었다. 마치 대학시절 신나게 놀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처럼 느껴졌다. 민지는 집에 오자마자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했다. 알람이 미친 듯이 울렸다. 지민이었다. 지민이는 상담해 줄 수 있냐며, 몇 차례나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얘기를 줄줄 보냈다. 민지는 이제야 확인해서 미안하다며 다 읽고 다시 답장 주겠다고 연락한 뒤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내용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 자신이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친구라서 민지의 마음을 늘 불편하게 만들곤 했다. 그런데도 관계 끊는 것이 어려워 질질 끌고 오던 관계였다. 민지는 서로 어색해지는 상황이 싫어 모든 관계에 최선을 다하곤 했다. 그것이 회사에 붙은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제는 바뀌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민지는 꿈에서 자신이 파던 구멍이 얼마나 커져 있을지 생각했다. 대충 상담업무 하듯이 대답을 해주고 민지는 드러누웠다. 파, 하며 숨을 내쉬었다. 소리치고 싶었다. 가슴이 답답한 것이 답답했다. 민지는 매운 닭발 1인분과 막창 1인분을 주문했다. 50분이 걸린다는 얘기에도 괜찮다며 친절히 대답하고 끊었다. “짜증 나.” 민지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다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민지는 샤워를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이 좋아졌다.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영수증을 확인해 보니 다른 메뉴가 적혀 있었다. 다시 서둘러 내려갔으나 배달원은 막 길목을 벗어나고 있었다. 민지는 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냥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들어왔다. 닭발이 들어 있는 일회용기 뚜껑을 열자 닭발 대신 커다란 구멍이 있었다. 일회용기 바닥을 만지자 막혀있는 느낌이 들었다. 거꾸로 들어보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구멍은 다른 시공간으로 통하는 문인 것 마냥 웅웅 작은 진동을 내고 있었다. 민지는 두려웠고 긴장했으며 또한 설레기도 했다. 이 구멍을 만진다면, 어딘가로든 데려다줄 것 같은 묘한 예감이 들었다. 그곳은 좋든 싫든, 이곳보단 낫지 않겠느냐며. 이 날을 기념해야겠다고 생각한 민지는, 원룸의 모서리에 처박혀 있는 냉장고로 갔다. 맥주와 소주를 각각 한 병씩 꺼냈다. 주방과 신발장이 붙어 있어 늘 냄새가 난다는 불평도 잊지 않고, 민지는 유리문을 닫고 들어왔는데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구멍이 방만큼 커져 있었다. 사실 민지는 속으로 말도 안 된다고,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내가 많이 피곤한가.” 소리는 구멍을 타고 메아리처럼 퍼졌다. 민지는 눈을 비비며 앞으로 걸어가다가 구멍 안으로 굴러 떨어졌다. 무릎이 까지고 머리는 띵하고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민지는 절뚝거리며 먼지를 털었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생각하는데 어쩐지 구멍 안에 들어오니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의 감정노동 없는, 고요한 고립. 어쩌면 민지가 제일 필요로 했던 것이 배달 온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민지는 구멍을 더 깊게 만들어서 아무도 찾을 수 없게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손에 흙이 껴도 신경 쓰지 않고 땅을 팠다. 구멍은 민지가 원하는 것처럼 깊어졌다. 그때 꿈에서처럼 비가 내렸다. 아니 천장에서 물이 떨어졌다. 민지는 구멍을 더 파라는 신의 계시로 느껴져 더 빠르게 땅을 파기 시작했다. 구멍 곳곳에서 솟아나는 물은 이내 구멍을 채우기 시작했다. 민지는 점점 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천장에서 돛단배가 떨어졌다. 민지는 돛단배를 탔다. 물이 구멍이 시작되는 부분까지 찼을 때 민지는 거실을 밟을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돛단배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지는 영적인 체험을 했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민지 씨! 식사!” 대리가 민지를 깨웠다. 민지는 하늘에 가득 찬 대리 얼굴을 보며 모든 게 꿈이었구나 생각했다. 그럼 나는 출근을 한 상태일까? 민지는 생각했다. 대리는 민지에게 다시 말했고 민지는 깨어났다. 민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 중앙에 걸린 하얀 시계를 확인한 뒤 안심했다. 점심시간이 30분 정도 남아 있을 때였다. “여기서 자고 있는지는 몰랐네, 많이 피곤했나 봐?” 민지는 상담업무하듯이 대답을 한 뒤 식사를 하러 2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민지는 생각했다. 구멍이 아니라 돛단배를 구해야겠구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