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우울증-오늘도 안영희(2)

by 최예지

“레몬밤이 좋대.” 선지는 민아에게 작은 봉투를 건넸다. 그 안에는 네모반듯한 상자가 있었다. 민아는 3년 만에 봉투를 열었다. 한번 더 포장되어 있던 봉투는 시간을 비켜갈 수 없었다. 여름의 이슬은 가을을 자라게 했고, 가을은 민아의 겨울을 시리게 했다. 가을이 되면 민아의 안부를 묻는 연락이 많아졌다. 가을은 민아에게 그런 계절이었다. 민아는 작은 한숨을 뱉으며 제때 봉투를 열어보지 않았던 때를 돌아봤다. “어쩔 수 없었어.” 마치 옆에 선지가 있는 것처럼 어딘가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그곳에는 액자가 있었다. “어?” 민아는 서둘러 상자를 열어보았다. 향초가 노란색 병에 담겨 있었다. “노란색?” 봉투도, 상자도, 안의 향초도 액자와 조금 다르면서도 닮은 노란색이었다. 어둑한 방에 향초를 켰다. 레몬밤 향은 가장 어두운 곳부터 차근차근 여행을 시작했다. 책상 위에 놓인 레몬밤 향초를 보며 턱을 괴었다. ‘툭’ 상자가 떨어졌다. 안에는 편지가 있었다. 작은 곰돌이 초 스티커를 보며 웃다가 라일락 스티커가 붙인 구간을 읽을 땐 울먹였다. 두 번째 편지지에는 웃는 표시 ‘ :) ’ 만 적혀 있었다. 무릎을 모아 고개를 푹 숙이고 감정을 누르며 울었다. 초인종 소리가 났다. 서둘러 눈물을 닦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옆집에는 배달음식 봉투가 놓여 있었다. 선지해장국이라고 적힌 영수증이 보였다. 그때 옆집에서 문이 열리더니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봉투를 들고 문을 쾅 닫았다. 민아는 옆집 문이 닫힐 때까지 자신의 슬리퍼를 보고 있었다. “슬리퍼, 바꿔야겠어.” 혼잣말을 하며 문을 닫았다.


민아는 코를 풀었다. 세수를 했다. 샤워를 했다. 머리도 감고 양치도 했다. 선지가 두고 간 수건이 있었다. 노란색이었다. “여기도?” 민아는 오늘따라 노란색이 자주 보인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말렸다. 빗으로 머리를 정돈했다. 재작년 겨울만큼 머리가 길었다. 선지가 언젠가 민아에게 머리 어떻게 할 거냐며 넌지시 물었던 적이 떠올랐다. 그때 민아는 대답했다. “어떻게든.” 그러자 선지는 자신의 집에 초대해 대뜸 미용가위를 내밀었다. 언제라도 빌려줄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민아는 선지를 엉뚱하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따듯한 케모마일 차가 식고도 남은 시간이 되어, 민아는 다음에 보자며 일어났다. 선지는 민아의 가방에 뭔가를 넣고선 방긋 웃었다. 노란색 장식이 달린 보랏빛 머리끈이었다. 민아는 치렁치렁한 머리를 한데 모아 질끈 묶었다. 답답한 목 뒤가 시원해졌고 곧이어 으슬으슬 몸이 떨렸다. 이불을 덮고 누웠다. 레몬밤 향에 일어났다. 향초를 끄고 무드등을 켰다.


“레몬밤이 좋네.” 민아는 윗마을에 사는 선지를 떠올리며 말했다. 선지에게 연락을 하려고 핸드폰을 찾는데 보이질 않았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환청이 들렸다. 노트북을 켰다. 메신저에 로그인하니까 선지에게 연락이 와있었다. 스크롤을 올렸다 내려가며 몇 번 읽다가 대충 옷을 차려입고 나갔다. 선지가 자신의 핸드폰을 보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민아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선지는 위층에 사니까…” 열림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계단으로 통하는 비상구 문을 열었다. 문이 무척 무거웠다. 계단 하나씩 밟을 때마다 다리가 너무 아팠다. “원래 이렇게 멀었나?” 그때 비상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내려오고 있었다. 잔뜩 긴장하며 걸음을 멈췄다.


“인생에는 다양한 선지가 있다. 하나의 문장처럼 보이는 그것은 여러 개의 단어로 조합되어 있다. 똑같은 단어를 쓴 선지여도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어떻게 읽느냐는 지금 당신의 마음에 달려있다."


선지가 좋아하는 문장이 들렸다. 민아는 선지일까 생각하며 계단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반가운 얼굴이 보일 거라고 기대하면서. 문장을 외우는 소리가 더 가까이 들렸다. 민아의 시선은 점점 위로 올라갔다. 선지가 아니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가 코앞으로 왔을 때, 민아의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어깨가 차가웠다. 미처 덜 말린 뒷머리가 민아의 어깨를 시나브로 적시고 있었다. 문장을 외우는 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민아는 고민했다. 이대로 다시 내려갈지, 위로 올라가서 선지를 보러 갈지. 그 사이 여러 명의 사람이 민아를 이상하게 쳐다보며 비상구 문을 열고 계단을 빠져나갔다.


“선생님, 신고받고 출동했습니다.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잠옷 차림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민아를 누군가가 신고했다. 옆집 남자였다. 경찰은 민아의 안위 혹은 정체를 묻고 있었다. 경찰은 민아의 손에 쥐어진 핸드폰을 빼내려 했다. 옆집 남자는 팔짱을 끼고 쳐다봤다. 손목에 찬 머리끈으로 여자는 머리를 질끈 묶었다. 여자는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물었지만 목소리가 작아 들리지 않았다. “어?” 여자는 경찰의 손에 있는 핸드폰을 봤다. 옆집 남자는 여자가 당황하고 있다고 느꼈고 이내 지겨워했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여자는 어떤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선지… 단어… 마음…” 여자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작아져 겨우 단어나 간신히 들릴 정도였다. 그때 안영희가 말했다. “언니!” 여자는 안영희를 쳐다보고 말했다. “선지야.” 안영희는 주변 사람들에게 대충 상황 설명을 한 뒤, 여자를 데리고 집에 들어왔다. 역시나 일주일 전과 방 상태가 똑같았다. 안영희는 여자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불에서 쉰내가 났다. 안영희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했다. ”나 퇴사했어, 이제 언니랑 살 거야. 그런 줄 알아. “ 여자는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안영희는 헤드셋을 꼈다. 자신이 퇴근할 때 지하철 안에서 듣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난 언제 퇴근해, 언니?” 안영희는 대답이 없는 여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여자가 완벽히 잠에 든 것을 확인하고 베란다문을 열어 환기했다. 여자가 작은 소리를 냈다. 안영희는 들리지 않는데도 여자 근처로 가 전기장판을 켰다. 안영희의 시선 안에는 늘 여자가 있었다. 안영희는 여자가 늘어놓은 물건을 하나씩 정리했다. 자신이 선물한 레몬밤 향초를 보며 작년 가을을 떠올렸다.


“영희야, 이것 봐봐.”

작년 가을이 되기 전까지 여자는, 그러니까 안민아는. 안영희를 선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작가의 말 : 제목이 우울증인 이유는, 제가 느끼기에 우울증은. 여기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매일 사투하는 하나의 전쟁같기 때문입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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