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별이 잠드는 바다 8화 너무 늦은 인사

3

by 권재원

3

마음이 아주 먼 옛날로 나를 끌고 갔다. 그곳에 내 친구 정우가 있었다.

권정우, 아니 디누. 그는 천재였다. 피아노 한 대만 있으면 그 소리가 닿는 범위 안에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내는 존재였다. 그 우주의 서사가 희극이 될지 비극이 될지는 순전히 그 손 끝에 달려 있었다.

피아노가 없어도 작곡가이고 지휘자였기에 얼마든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악기가 없어도 알고리듬을 악보 삼아 컴퓨터에 직접 코딩하여 음악을 만들어내곤 했다.

디누는 천재라는 말이 품고 있는 그 찬란한 면과 어두운 면을 다 가지고 있는 그런 존재였다. 천사이자 악마였고, 사랑의 대상이자 미움의 대상이었으며, 자기애의 화신이었지만 스스로를 파괴했고,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지만 언제나 외로웠다.

사람들은 공식석상이든 사적인 자리든 가리지 않고 그를 디누라고 불렀다. 심지어 그의 아내도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나는 한번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국민학교 4학년 때 부터 그가 숨을 거둔 서른 다섯 살 때까지 나는 언제나 정우라고 불렀다.

요즘은 클래식 아이돌이라는 말이 그리 낯설지 않다. 하지만 1980년대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나마 오페라에서 스타, 디바 이런 말이 허용되었다. 아네소피 무터 같은 탁월한 연주자가 수려한 외모 때문에 평가절하 당하기까지 하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시 클래식 기획사들이 아네소피 무터의 탁월한 비주얼을 티켓파워로 활용했음을 틀림없이 기억한다.

디누가 바로 그 시절에 연주했다. 열 네 살에 이미 국제 무대에 데뷔했던 디누는 드러내지 않으면서 연주자의 외모를 활용하는 클래식 마케팅의 수혜자이자 희생자였다. 인간 권정우가 천재 디누로 불리는 순간 사람들이 기대하는 천재 음악가의 이상적인 모습이 그 이름에 부여되었다. 그 기대의 목록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 이름은 천재 음악가의 이데아, 바로 아이돌이었다.

디누는 정우를 연료로 하여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대중은 디누에게 끝없이 더 많은 것을 요구했고, 디누는 그 기대에 응하기 위해 정우를 더욱 깊이 태워야 했다.

불행히도 정우는 대중의 열망 뿐 아니라 스스로의 열망까지 디누 이미지에 추가하였다. 1980년대, 우리나라가 제5공화국 독재에 시달리던 시절, 정우는 클래식 음악가들이 민주화 운동에 무관심한 것에 대해 분노했고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정우는 각종 집회나 시위현장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선동적인 음악을 연주했다. 외신은 디누에게 건반 위의 체 게바라라는 별명을 붙였다. 덕분에 디누라는 페르소나는 어마어마하게 확장되었고, 당연히 훨씬 더 많은 땔감을 요구하게 되었다.

천재를 넘어 체 게바라 까지 삼킨 디누는 소외 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연주를 명령했고, 정우는 기꺼이 그 명을 받아 전국을 다니며 저소득층, 노동자를 위한 무료 연주회를 개최하였다. 그렇다고 정규 투어를 소홀히 한 것도 아니었다. 유럽, 아시아, 미국 연주 역시 한 치의 빈틈 없이 완벽하게 해치웠다.

1989년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에 통일의 기운이 일어나자 새로운 미래에 대한 설렘과 동시에 수십년간 믿어왔던 신념을 잃어버린 불안에 고통받는 동독과 동유럽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며 계획에도 없던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투어를 조직하여 10회 이상의 연주회를 추가하는 무모한 짓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온갖 서사들이 더더욱 디누를 아이돌로 만들었다. 그의 연주를 이해하고 느끼기도 전에 이미 열광하기로 작정한 청중들이 몰려들었고, 진지하게 연주를 듣던 청중들이 오히려 뒤로 밀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누는 더 많은 관심과 열광을 원했고, 정우는 점점 쪼그라들었다. 그 무렵 디누의 연주는 나 같이 오랫동안 클래식 음악을 들어왔던 사람의 귀에는 파격을 위한 파격, 과도한 감정이입, 원곡을 지워버리는 연주자의 비대한 자아가 한데 섞인 일대 혼란이었다. 하지만 이 혼란이 매혹적인 그의 모습에 얹히면 공기의 진동으로 전해지는 페로몬이 되었다.

나의 자랑이었던 천재 음악가는 대중의 열광에 취한 아이돌이 되고 말았다. 나는 정우가 이미 열다섯 때 부터 크고 작은 손가락 트러블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물 두 살 무렵에는 거의 눈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몸을 하고서도 그는 연주했고 대중을 열광시켰고, 돌아와서는 부어오른 손가락을 움켜쥐고 바닥을 구르며 고통스러워했다.

마침내 정우는, 손대지 말았어야 할 것에 손을 대고 말았다.

두 번의 발작과 실신 이후, 피아노를 두려워하게 된 정우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작곡과 지휘로 방향을 틀었다. 피아노는 오직 가르치는 용도로만 손댔다.

“레슨에도 전문성이 있어야 해.”

이렇게 말하며 서울대학교 사범대 대학원에 진학했고, 끝내 교육학 박사 학위까지 받아냈다. 덕분에 나는 녀석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는 물론 대학원까지 동창이 되었다.

내 눈엔 그 시절이 정우가 가장 행복해 보이던 시절이었다.

디누의 열광에서 물러난 정우는 문하생을 가르치기 위해 악보를 하나하나 새로 읽었고, 그 과정에서 음악을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믿었다. 이 시간이 천재 디누를 예술적으로 숙성시키는 시간이 되리라고.

실제로 서른 넘어 다시 피아니스트로 복귀한 정우는 더 이상 옛날의 디누가 아니었다.

연주는 따뜻했고, 겸손했고, 다정했다. 청중들을 휘어잡는 파격이나 감정의 격랑은 없었지만, 그 자리를 잔잔한 위로와 고요한 기쁨이 대신하였다.

나도 행복했다. 내 친구가 마침내 천재를 넘어 거장의 문턱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기다리던 거장의 탄생이, 바로 내 가장 오래된 친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2002년, 정우가 새로 얻은 제자가 모든 것을 수포로 돌렸다. 아, 이렇게 말할 일은 아니다. 제자가 무슨 잘못이겠는가? 단지 재능이 너무 컸을 뿐, 그리고 최선을 다해 연주했을 뿐.

어쨌든 자신의 10대 시절을 연상케 하는 그 제자의 강력한 연주의 자극을 받은 정우는 예전 스타일로 돌아가려 하였다. 디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봉인을 뚫고 튀어나와 깊이 있는 잔잔한 박수보다 열광적인 청중의 환호성에 대한 갈망에 불을 질렀다. 다시 땔감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미 여러 차례 망가졌던 그의 신체는 더 이상 태울 무엇이 남아 있지 않았고, 정우는 다시 손대지 말아야 할 것에 손을 대어 억지로 땔감을 마련했다.

그리고 아이돌 디누는 인간 권정우에게서 더 이상 뽑아낼 땔감이 남지 않은 순간 그를 배신하고 떠나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친구를 잃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며칠 전 그를 잡을 수 있는 암시와 기회가 있었는데 그걸 무심히 흘려 보냈다는 것이다. 그 상처와 죄책감은 그가 떠난지 20년이 지나도 아물지 않았다.

내가 긴 머리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는 것은 나의 진보 좌파 성향 때문이 아니라 바로 정우를 잊지 않으려는 작은 몸부림이었다. 내가 아이돌이라는 말만 들으면 소스라치는 것 역시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이분법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과 다른 존재를 입어야 하는 그 상황, 자신이 입은 다른 존재가 자신을 지배하며 조종하는 그 상황 자체가 싫었던 것이다. 아이돌은 가장 친한 친구를 앗아갔고,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도 앗아갔다.

청량한 목소리가 하마터면 더 깊게 잠길뻔한 나를 끌어 올렸다.

“선생님.”

“아, 어?”

“그만 돌아오세요.”

“아, 미안.”

“선생님 틈만 나면 의식의 흐름 모드 들어가시잖아요? 무슨 버지아 울프처럼. 시간 3분 흘러가는 동안 의식은 거의 반 평생 돌아보고 계셨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해 보니 이 아이가 내가 말한 이데아라는 단어를 받아 시뮬라크르까지 이야기 했던 기억이 났다. 아이돌 가수에게 들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대화 내용이었지만 예진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연스럽게 넘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예진이는 중학교때 그 똑똑한 모범생이 잘 자라 서른이 되었을 경우 예상할 법한 수준에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디누 생각하셨죠? 선생님 친구분?”

“내 속을 들여다 보는구나.”

“선생님 책 읽었거든요. 디누라는 천재를 기리던 그 어마어마하게 긴 여섯 권짜리 전기. 이틀만에 다 읽었어요. 그리고 생각했거든요. 아, 이 분도 아이돌이었어.”

“그래. 아이돌이었지. 아티스트가 되었어야 했는데 아이돌이 되고 말았고, 결국 아이돌로 세상을 떠났어. 내가 믿고 꿈꾸던 세계, 그 친구만이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세계도 공기 방울이 되어 날아갔지. 그래서 디누가 밉고 아이돌이 미운지 몰라. 미안하지만 너의 지니도.”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디누도, 지니도, 그리고 예니도. 아이돌은 결국 이데아의 인격화고 모든 사람은 다 무엇인가를 표상하는 아이돌이에요. 뭐, 저희들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조작된 이데아라고 깎아 내릴수는 있죠.

그래요. 누구였죠, 헷갈리네. 보드리야르 맞죠? 시물라시옹. 대중문화를 형상에 대한 조악한 모사품이라고 비판한 사람?

인정해요. 저 같은 청순돌이 대중에게 던져진 젊은 여성에 대한 조작된 이데아라는 것. 그 조작된 형상을 여성들이 내면화해서 수동적이고 대상화된 존재로 머무르게 하려는 가부장제의 수단일 수도 있고.

그런데 현명하신 분들이 간과한 게 있어요. 조작된 이데아는 아이돌로 의인화 되어야만 하고, 그것을 담고 있는 아이돌은 자아와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요. 아무리 가부장제의 권력자들이 판을 짜도 어쨌든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건 우리에요. 아티스트 대신 아이돌, 심지어 딴따라라 불러도 말이죠. 예진이만 생각이 있고, 지니는 조작된 이미지고 그런 거 아니라고요. 선생님 친구분도 마찬가지였을 거에요.

지니 말고 예진이도 아이돌이었답니다.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의 판타지가 만들어낸. 설마 그 모범생 예진이가 겉도 속도 다 그렇게 반듯했을 거라고 믿는 건 아니시죠?”

갑자기 쏟아지는 예진이의 때 아닌 강의 때문에 나는 말문을 잃었다. 이런 식이라면 아도르노로, 맥루언으로 뻗어갈 분위기였다. 아이돌 스타와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을지는 몰랐다. 오히려 30년 넘게 사회를 가르쳤던 권오석 박사의 밑천이 드러날 판이었다.

이렇게 상담의 첫번째 세션이 끝났다. 예진이는 두 시간을 같이 이야기 했는데도 대체 뭘 상담하고 싶다는 것인지 말하지 않았다. 그냥 많이 늦어진 인사를 했다는데 만족하기로 했다.

“자, 종례 끝.”

“네. 이제 일어나요.”

“주차권 받아올까?”

“아뇨. 저 차 없어요. 그럴 형편이 아니라서.”

뜻밖의 대답이다. 나는 예진이가 입고 있는 옷, 매고 있는 가방, 그리고 세련된 앵클부츠 까지 슬쩍 훔쳐봤다. 하나같이 상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장담하는데 100만원 아래는 없었다. 그런데 그럴 형편이 안 된다니?

궁금하면 직설적이 되는 나는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막 G바겐이나 포르셰 몰고 다닐거라 생각했는데.”

“세상의 편견 중 하나죠.”

“얼마나 벌었는데?”

예진이 역시 놀랄 정도로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6년 아이돌 해서 번 돈, 음원이며, 콘서트며, 광고까지 다 털어서 25억 정도? 7억으로 위례에 우리 다섯 가족 사는 아파트 샀고, 정작 저는 거기서 나와 보증금 1억 주고 원룸 월세 살아요. 솔로 데뷔 하려고 끄적거리다 코로나 때문에 1억 말아 먹고, 4년 동안 CF, 피팅 미친듯이 뛰어서 한 4억 정도 메꾸고. 계산해 보세요.”

돈 계산이 빠른 나는 순식간에 예진이의 자산 상황을 파악했다. 금융자산 약 20억, 그리고 2017년 당시 7억이던 위례 신도시 아파트. 지금은 12억 정도 할 것이다.

“아니 그거 밖에 안돼?”

깜짝 놀랐다. 하고 많은 말 중에 왜 하필 이런 말이 반사적으로 이 말이 튀어나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예진이의 수익이 내가 예상했던 것 보다 자리수가 하나 모자랐던 것이다.

유노이아는 히트 곡 하나 내고 사라진 그룹이 아니었다. 데뷔 하자마자 인기 그룹이 되어 거의 6년 내내 탑 아이돌 자리를 지켰던 그룹이다. 일본, 대만, 동남아시아에서도 국내만큼 인기가 많았고, 활동 막바지던 2016-17년에는 미국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선입견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팝스타 하면 떠오르는 그 엄청난 부를 상상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예진이의 재산이 적은 것은 아니다. 저 정도 자산을 일구려면 웬만한 직장인은 연봉을 평생 모아도 어려울 것이며, 틀림없는 대한민국 5% 이내다. 하지만 20대 중반에 경력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댓가로서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았다.

글로벌 스타가 저 정도라면 적당히 주목 받고 인기 끌다 사라지는 아이돌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고작 몇 억이란 뜻이다. 그나마 인기를 끌었다는 전제에서 그렇고, 한 푼도 못 건지고 끝나는 아이돌도 수두룩 할 것이다. 겨우 20대 중반에 말이다.

교육자로서 내 본성이 움직였다. 그 젊은이들의 앞날이 너무 걱정되고 안타까웠다. 따지고 보면 다 학생이거나 학생이었어야 할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고마워요.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갑자기 예진이가 이렇게 대답하자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이 아이가 독심술을 하나 싶었다.

“아니, 고맙다니? 뭐가?”

“그렇게 생각해 주는 분들 거의 없거든요. 다들 새파란 20대 계집아이가 뭐, 이, 이십억? 부들부들. 이런 반응이죠. 여성시대 이런 커뮤니티 가서 지니 한번 검색해 보세요.뭐라고 나오나. 지니 숨만 쉬어도 월수 600 이런 식일걸요?”

그 동안 내 머리는 부지런히 그 20억을 보수적인 포트폴리오로 운용해 보고 있었다. 내 계산으로는 600까지는 아니고 -소득세를 빼먹었을 것이다- 숨만 쉬어도 최소 월 400씩은 나온다는 결론이 나왔다.

내가 예상했던 스타의 화려한 삶은 아니라도 어쨌든 일반인에게 부러운 삶이긴 마찬가지였다.

“내 계산으로는 숨만 쉬어도 월 400이네? 네 또래 직장 여성들 월급보다 훨씬 많아.”

“맞아요. 와! 선생님, 머리 속에 엑셀이 기본 깔려 있어요? 네. 중산층 가장이 죽어라 일해야 받는 돈이죠. 하지만 뷰티 루틴에만 최소 150이 들어가서 막 쓰고 살수는 없어요.”

“미용에만 150?”

“네. 기본만. 촬영이나 공연 일정 잡히면 한 달 전 부터 강화 루틴 들어가고요.”

충격적인 숫자였다.

“방송인 할인, 지인 할인, 이런 저런 할인, 서비스 챙기면 30% 줄일 순 있어요. 하지만 지니 정도 레벨에선 고맙지만 마음만 받겠다 이러고 정가대로 딱딱 결재 해야 해요. 그러다 보니 좀 많이 들어가요.”

순간 내 머리 속은 카오스 상태가 되었다. 도무지 이 아이를 종잡을 수 없었다. 탑 스타였는데도 절약해야 한다며 자기 차도 없는 전직 아이돌. 그런데 온 몸을 명품으로 두르고 매달 200만원 가까이 뷰티 비용에 쓴다? 다른 한편에서는 플라톤을 말하고 보드리야르를 말한다. 내가 잘 아는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내가 상담할 처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만나면 상담 말고 경청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올 것 같다. 나는 몰랐던 세계를 알아가는 것이 언제나 즐거웠고, 예진이는 그 세계에서 살아남은 아이였다.


keyword
이전 07화별이 잠드는 바다 7화 너무늦은 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