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느껴졌다.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고 할까 혹은 낯선 에너지의 흐름이 느껴졌다고 할까? 실제로는 마주보고 있는 예진이의 눈빛이 달라진 것이었다.
예진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했다.
“들켰어요.”
“들키다니?”
순간 주변을 둘러본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카페의 몇 안되는 손님은 물론 바리스타까지 우리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하던 이야기 계속 하시면 되어요. 황급히 자리 옮기고 그러면 ‘지니 중년 남성과....’ 이런 이야기가 되니까. 선생님의 단정하고 소박한 차림 때문에 이상한 스토리로는 안 흘러요. 걱정 마세요. 제가 해결할게요.”
나는 예진이에게 협조했다. 즉 가장 궁금해 하던 이야기를 끄집어 냈다.
“그런데, 너 예고 안 가고, 외고 간 거.”
그 말을 듣자마자 예진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두 손을 마주 잡고 허리를 숙였다. 잘못했습니다 하는 표정도 보였다.
표정도 포즈도 너무 과했다. 예진이는 혼 날 일이 워낙 없긴 했지만 일년에 한 두번 야단 맞을 일이 생기면 무릎 꿇어 과였지 허리 꾸벅 과는 아니었다.
“죄송해요.”
“우선 앉아. 그런데 뭐가 죄송해?”
“그때 일, 지금 일. 둘 다요. 이렇게 하면 저 분들도 알아채실거거든요.”
예진이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외고 간 게 잘못이야? 난 내 일처럼 좋아했는데?”
“아뇨. 그 때, 대치역 카페에서. 사실 전 그날 예고 학비 받아낼 생각으로 선생님 뵙자고 했어요. 죄송해요. 정말,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너무 부끄러워 땅이라도 파고 싶어요. 그만큼 간절했어요. 수십번 망설이고 뒤돌아 섰어요. 하지만 간절함이 더 컸어요. 아마 예니 이야기 듣지 않았으면 받아 냈을 거에요.”
순간 나는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 학비를 대줄 생각까지 했으니까. 예진이가 조금만 애원하거나 아니 슬픈 표정만 지었어도 내어 주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의도된 상황이었다고? 그렇다면 그때 이미 예진이는 자신의 매력자산이 얼마나 강력한지 의식하고 심지어 활용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긴 어떻게 의식 못할 수가 있겠는가? 예진이 같이 머리 좋은 아이가 그걸 의식 안하고 사용 안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 너무 순진한 발상이다. 더 어릴 때부터 전략적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럴 가능성을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그야말로 청순돌의 정의에 딱 들어맞았다. 매혹적인데 매혹을 의식 못하는 순진함의 연출. 이 아이는 타고난 청순돌이었다. 연예인이 된 이후에는 그 매혹의 능력을 체계화하고 강화했을뿐.
그런데 예진이는 굳이 감추어도 될 과거의 이런 이야기, 자칫 나를 분노하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 끝내 내가 모르고 넘어갔을 수도 있는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일까? 이건 마술사가 트릭을 공개하는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자신을 아꼈던 선생님 앞에서 “저 그때 선생님을 돈 주머니로 봤어요.” 심지어 “그 주머니에서 제가 필요한 돈을 받아내려고 선생님을 유혹하려 했어요.” 라고까지 들릴수 있는 이런 이야기를 왜 굳이 밝히는 것일까?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그런데 예니가 왜?”
“그때 예니 이야기를 들었고.”
순간 예진이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던 두 여성에게 슬쩍 눈웃음을 날렸다. 순간 두 사람의 입에서 “꺅” 하는 소리가 새어나왔고, 그 시선은 마법처럼 사라졌다.
이어 예진이는 바리스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윙크를 보냈다. 바리스타는 무슨 상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말없이 미소 지으며 다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무슨 마술을 보는 것 같았다. 순간 카페는 작은 무대가 되었고 예진이는 관객들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한번의 눈웃음과 윙크로 “여러분, 알아봐줘서 고마워요. 그 마음 받았어요. 그런데 지금 제 사생활을 조금만 존중해 주시면 더 고마울 거에요.” 이런 메시지를 던진 것이고 그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 날, 대치동 카페 브라운에서의 기억이 세밀하게 되살아났다. 예니가 곧 데뷔한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반짝였던 예진이의 눈빛. ‘데뷔’라는 그 말. 그리고 바로 이어져 나왔던 말.
“딸 할래요.”
그 이후 예고 이야기가 사라졌다. 그 순간이 팽팽하게 장전되어 발사 직전이었던 이 아이의 매혹이라는 위험한 무기가 거두어진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제야 이야기가 한 줄로 이어졌다. 대중 예술을 낮잡아 보던 나, 학문적 성취를 존중하던 나, 외고로 진로를 결정한 예진이. 그리고 졸업한 그해 5월, 외고 교복을 빳빳하게 다려 입고 코스모스 같은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던 예진이.
예진이 목소리가 나를 과거로부터 현재로 돌려세웠다.
“그때 너무 부러웠어요. 내가 예니 언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딸 이야기 했어요. 선생님이 그러려무나 한거, 진짜 나 입양하고 그럴 건 아니었잖아요? 그래도 좋았어요. 그래서 막 시물레이션 돌렸죠. 선생님이 진짜 아빠였다면? 그래서 서공예 생각 접었어요.”
“하지만 난 네가 노래하고 춤추는 거 진심으로 사랑하는 거 다 이해하고 있었어.”
“그래서 외고 간 거에요. 학비 문제 뿐 아니라 그 때문에.”
“으응?”
이렇게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외고 가도 노래하고 춤은 계속 연습할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영문과 같은데 진학해서 드라마 공부 제대로 하고, 뮤지컬로 갈 생각이었어요. 예니 첼로 보고 생각했어요. 만약 내가 진짜 예니 언니라면? 그리고 노래하고 춤추는 걸 너무 좋아한다면?
선생님이 공부하는 쪽으로 강요하실 분도, 또 클래식만 강요하실 분은 아닐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요 쪽은 영 아닐 것 같고. 그래서 찾은 타협점이 뮤지컬이었죠. 원없이 노래하고 춤추지만 인정해 주실 것 같은 선. 대기실에 쿠키랑 꽃다발만 조용히 들여보내 주실지도 몰라. 이런 생각하면서. 어머, 선생님. 우시면 안되요. ”
“아니, 울긴. 괜찮아.”
나는 얼른 고개를 흔들어 사태를 수습했다.
이 모든 서사를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제야 타임라인이 정리되었다.
그 동안의 분위기를 보면 나는 까맣게 모르던 사실을 오히려 예니가 더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예진이가 지니로 활동하던 동안 나한테는 연락하지 않았지만 예니와는 종종 연락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괘씸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예니가 틈만 나면 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아이돌’이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을 덜어내려 애썼던 것이 누구를 위해서였는지 이제야 알았다.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니는 지니가 된 예진이를 진작 언니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나도 그렇게 해주기 바랬던 것이다. 그때 예니가 간파한 내 마음의 문턱이 바로 아이돌이었다.
“나도 클래식 아이돌이야.”
예니가 이 말을 했던 것은 예진이를 위해 자신을 낮춘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진이를 아낀다면 지니도 받아들이라는 호소였다. 자신을 아이돌로 낮춘 것이 아니라 아이돌을 내가 예술가 수준으로 높여 봐 달라는 항의였다.
문득 예니 역시 두 개의 이름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식적으로는 권예니와 예니. 자기 딸을 성까지 부를 일이 없어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그 둘은 분명 다른 이름이었다. 콘서트 홍보물에서도 어김없이 ‘첼리스트 예니’ 이런 식으로 소개되었고, ‘첼로 요정 예니’ 이렇게 찍힌 홍보물도 있었다. 그 어디에도 권예니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을 내가 저지르고 말았다. 이중잣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이 벌써 자매가 되어 서로를 살펴주고 있었는데 나는 케케묵은 예술의 하이어아르키를 따지며 어느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마음을 닫고 있었다.
하지만 예진이는 물론 예니조차 모르고 있었다. 내가 그 아이돌이라는 말에 거의 발작할 정도의 거부감을 가졌던 진짜 이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