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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교사 May 01. 2020

젊은 교사들에게 드리는 두번째 편지 (2)

성공이라는 신기루

약속한 것 보다 훨씬 오래 걸렸습니다. 적어도 매주 하나씩 편지를 띄워 드리고 싶었는데, 요즘 온라인 수업 자료 제작하느라 시간이 너무 모자랐습니다. 처음 이 글을 접하신 분은 첫번째 편지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https://brunch.co.kr/@hagi814/20


뭐가 그렇게 바쁘냐면, 아무래도 가을에 대유행 또 할 것 같아서 1학기 전체과정, 그리고 2학기 과정까지 제작하고 있거든요. 만사 불여튼튼이고, 만약 등교개학 하면, 온오프라인 결합형 수업 자료로 쓰면 되니까요. 또 자료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교과 전체를 점검하는 효과도 있고, 두달 전만 해도 유튜브에 영상 올리는 법도 몰랐고, 아이폰으로 동영상 한 장면 찍어 본 적 없었던 사람이 이제 크로마키 기법까지 활용하면서 영상을 제작하게 된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니, 그것만으로도 대만족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왜 드리는지 의아하시죠? 바로 이게 교사가 힘을 내며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교직은 큰 야심을 가진 사람, 풍부한 상상력과 넘치는 창조성을 가진 사람에게 어울리는 곳이 아닙니다. 큰 야심 보다는 작은 성취에 만족하고, 넘치는 창조성 보다는 그때 그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곳입니다. 슬램 덩크를 꿈꾸지는 않지만 어제보다 오늘 1센티미터 더 높이 점프할 수 있게 되면 마치 플레이오프에서 승리라도 한 것 같은 기쁨을 느낄수 있는 사람이라면 교직에 적합한 사람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른 진로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그런 쪽에 익숙해 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교사는 어린 학생들을 상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학생들은 그 재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천재가 아닙니다.  물론 때로는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래 봐야 아이들 수준에서의 비약입니다.


학생들은 결국 적절한 도움이 없다면 그날 하루 하루가 너무 힘겨울 수 있는 연약한 어린 생명입니다. 심지어 중학생들은 그 연약함과 거기서 비롯되는 두려움을 과장된 공격성과 자기과시로 감추려 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그들의 성장과 발달 과정은 답답할 정도로 느립니다. 아니 느리더라도 계속 향상되는 학생이라면 아주 고마운 학생입니다.  완강히 제자리에서 버티거나 아예 뒤로 돌아 가버리는 학생들도 드물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성취라는 것이 어른의 기준으로 보면 정말 하찮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하찮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매일 매일이 새로운 일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새로운 것을 알게되고, 새로운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경험은  세상을 다 얻은 것 보다 더 큰 즐거움입니다. 무엇인가를 얻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확장시켜나가는 것이니까요. 그야말로 행복인 것이죠.


하지만 이미 웬만한 성장과 발달을 다 마친 어른들에게는 뻔히 보이는 경로입니다. 그 뻔히 보이는 경로를 가면서 마치 세상에 없는 창조라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아이들이 한심해 보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그런 삐딱한 시선을 본능적으로 간파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은 반감과 저항 혹은 수동성과 침묵이라는 방패 뒤로 숨어버립니다. 이미 교육은 글러버린 것이죠.


 그러니 그 느림을 견딜수 있고, 그 시시한 성취에 함께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사람만이 교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시시한 성취에 진심으로 기뻐하려면, 자기 자신도 시시한 성취를 즐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사회적 시선은 갈수록 차가워지고, 생각보다 훨씬 얇은 월급봉투와 훨씬 두꺼운 문서처리철에 멘탈이 흔들리더라도, 어제보다 오늘 리코더를 조금 더 잘 불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교실에서 키우는 강낭콩이 어제보다 조금 더 키를 키운 것에 대해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교사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그대로 아이들에게 전해지면서 배움의 길, 성장의 길, 발달의 길로 가는 초대장이 되는 것입니다.


흔히 교사는 삶을 기울여 아이들을 가르친다라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썼던 책에 나오는 문장이네요. 뭐 좋습니다. 그런데 그 기울이는 삶이 무엇일까요?  훌륭한 삶을 살고, 그 삶을 교실에 와서 기울여 나눠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교실에서 훌륭한 삶을 살고, 그것을 현장에서 바루 기울여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교실에서의 훌륭한 삶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시시하고 사소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학교 밖에서 훌륭한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꼭 교사가 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일단 학교 밖에서 교사가 아닌 시민으로서 열심히 살면 됩니다. 다만 그것이 학생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라 기대하면 안됩니다.  학생들은 교사가 학교 밖에서 하는 온갖 요란하고 위대한 활동에 대해 알지 못하며 관심도 없습니다.


교사가 아무리 환경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더라도, 그 삶은 기울여서 학생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그 보다는 차라리 매일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모습이 학생들에게 기울일 수 있는 삶입니다. 아닌 것 같아 보여도 학생들은 교사의 그런 사소하고 시시한 삶의 디테일에 관심이 많으며 뜻밖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물론 네이버 인물 검색 같은 것에 자기네 선생님 얼굴이 나오면 자랑스러워 하긴 하겠죠. 하지만 그 자랑스러움은 학교에서, 교실에서 일상에서 충분히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 기울임을 받아들인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부록 같은 것입니다.


이 사소하지만 중요한 진리를 잊어버리고, 학교 밖에서 큰 성취를 거둔 뒤, 그것을 학교 안에서 폭포수처럼 기울이고 싶은 욕망이 젊은 교사를 그릇된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사실 젊은이는 야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교사를 선택한 이상 그 야심은 좀 더 시시해져야 합니다. 교사된 목적은 성공이 아니니까요. 젊은이라면 무슨 강사로, 멘토로, 작가로 이 교육청 저 교육청 다니며 강의를 하고, 전국에 이름이 난 그런 교사를 선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극히 예외적인 길이며, 교사로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길도 아닙니다. 만약 그 강사가 제대로 된 교사라면 그렇게 이 교육청 저 교육청 다니느라 자기 학급, 자기 교과에 충실하지 못하는 상황을 무척 힘들어 할 것입니다.


하지만 꽤 많은 교사들이 어쩌다 얻은 명성에 취해 학교 밖을 나돌다 무너집니다. 일단 그 맛을 알아버리면 갑자기 20평 교실이 좁게 느껴지고, 그 앞에서 칭찬을 기대하는 아이들의 성취가 너무 하찮게 느껴지고, 그 속에서 일하고 있는 자신이 마치 유배라도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성공과 명성이라는 약에 취해 계속 학교 바깥을 기웃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화려한 언변과 유명세를 부러워하지 맙시다. 어쩌면 그들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교사일지도 모릅니다.


기울일 삶을 아이들로부터  먼곳에서 찾지 맙시다. 교실 안에서 찾읍시다. 아이들의 세계에서 찾읍시다. 그 속에서 아이들이 스스로 젖어들 수 있도록 그렇게 삽시다. 시시하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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