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호는 오늘 따라 연철이 왜 자기를 보며 피식피식 웃는지 모르겠다. 이유야 뭐가 되었건 상관없고 기분 나빴다.
어라, 또 저렇게 헤실헤실 웃는다. 결국 한 마디 쏘아붙였다.
“어째서 자꾸 실실 웃고 지랄이냐?”
“우리 김명호 학형도 슬슬 운동권이 되어 가는구나 싶어서.”
“얼라리요? 이게 또 무슨 소리냐?”
명호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왜? 내가 틀린 말 했냐?”
“운동권이라니? 시방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냐? 행여 부모님 들으면 경기 내실라. 난 그런 거 할 생각 하나도 없다.”
“그럼 요즘들어 네가 교투며 가투며 싸움 마다 안 빼먹고 참가하는 건 뭔데? 그러고도 운동권이 아니라고?”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쌌냐?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는 데 운동권 비운동권이 어디 있냐? 운동권만 싸우고 나머지는 구경만 해도 된다는 말이냐, 아니면 운동권은 공부는 하나도 안하고 데모만 한다는 말이냐? 난 시대가 요구하는 당연한 일을 하는 평범한 학생일 뿐이다.”
그 말을 들은 연철이 집게 손가락으로 명호를 가리키더니 이소룡 포즈로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녀석 말 발 좋아진 거 좀 봐. 대형 사건이야. 이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녀석이 그 단순 무식하던 김명호 맞아?”
“무식하다니? 선 넘지 마라. 사람 겉 보고 속까지 판단하지 말라 이 말이다. 명색이 윤리교육과 학생이 그래서야 쓰겠냐? 내가 생긴 것이 험하다고 머리 속까지 험한 것은 아니다.”
“알아. 알아. 네가 생각 많이하고 신중한 놈이라는 거. 미안. 농담이었는데 도덕적으로 적절한 말은 아니었네. 그나 저나 너 손미현이랑 기차 같이 타고 간다고 좋아 못살던거 어떻게 되었냐?”
“절반쯤 성공했다.”
“진도 좀 나갔냐?”
“나는 그런 저질스러운 기준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뭐 했는데?”
“그냥 같이 기차 타고 전주까지 내려갔고 올라오고. 밥 한 끼 같이 먹고, 차 한 잔 나눠 마시고 그랬다. 이야기는 겁나 많이 했고.”
“그래그래. 그럴 줄 알았다.”
연철의 얼굴에 실망의 그림자가 덮이는 것이 훤히 보였다. 명호가 발칵했다.
“도대체 뭔 소릴 듣고자밨냐? 난 그렇게 저질스러운 놈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자 연철이 얼른 말을 돌렸다.
“참, 이사갈 방 가서 봤다.”
“어떻더냐?”
“방이 좀 이상하게 생기긴 했지만 부엌도 제대로 되어 있고, 또 방세도 여기보다 훨씬 싸. 아, 우리 새 방 방들이 할 때, 겸사겸사 손미현 좀 소개시켜 줘.”
“그러마.”
“그리고 방들이 할 때 미현이 말고도 꼭 데려와야 할 사람 있어.”
“누군데?”
“거 있잖아? 너희 과에 머리 길고, 키 크고, 교투가 되었던 가투가 되었건 싸움만 났다 하면 거의 개근이라고 할 만큼 열심히 참가하는 여자 애?”
“아하! 정난영이? 너 그 아그 좋아하냐?”
“아니 뭐 좋아 한다기 보다는, 뭐, 그냥 매력 있더라. 그래서 안면 트고 싶다고. 멋있지 않냐? 여성 전사라!”
“말은 겁나 복잡해도 결국은 그 말이 그 말 아니냐?”
“알았다. 그래. 좋아한다. 어쩔래?”
“어쩌긴 뭘 어째? 다리 놓아주지.”
“그렇지. 그래야 친구지. 하하하!”
“그만 좀 웃어라. 속 보인다.”
“볼 테면 봐라. 하하하! 난 겉도 속도 완전히 빨간 진짜 빨갱이니까. 하하하!”
명호는 순간 깜짝 놀라 뒤로 넘어갈 지경이 되었다. 이게 웬 너털웃음? 평소 날카롭고 이지적인 척 무게 잡던 박연철이는 어디로 갔지?
하여간 연애 감정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 누구는 시인을 만든다고 하고 누구는 낙관주의자를 만든다고 하고 누구는 번뇌로 이끈다고 하는데, 하여간 이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다 마찬가지다.
이 때 자취방과 바깥 세상을 아슬아슬하게 가로막고 있는 나무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마치 연철이의 웃음 소리와 박자라도 맞추는 것 같다.
“어, 누구지?”
“누구세요?”
그러자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변성이 되다가 만 것 같은 마치 소년처럼 들리는 그런 목소리였다.
“박연철 안에 있냐?”
“연철아, 네 손님이다.”
“아. 진이구나.”
연철이 목소리만 듣고 누군지 알아챈 모양이다.
“진이라니?”
“아, 우리 과 87인데 대단한 녀석이야. 너도 보면 놀랄 거야. 내가 운동권 되자고 결심하게 만든 놈이야.”
“뭐라? 선배가 아니라 동기생이?”
“철학에 학번이 뭔 소용? 그 자식과 비교하면 선배들은 유치해. 직접 얘기해 봐. 그 녀석 머리속에는 우리나라가, 또 이 세계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또 이것을 해결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잔뜩 들어 있으니까.”
연철이 엄지를 아까 명호에게 치켜 올린 것 보다 훨씬 높이 올려 보였다.
명호의 호기심이 자극을 받아 활동을 개시했다. 도대체 어떤 녀석이길래 박연철 같이 냉담한 녀석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일까? 명호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연철이 누굴 칭찬하는 꼴을 본적 없기 때문이다. “바보는 아니군.” 이 정도가 연철에게는 최고의 칭찬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저런 반응이라니?
호기심으로 잔뜩 해상도를 높이고 있는 명호의 눈에 하얀 얼굴에 큰 코를 가진, 이렇게 말하긴 미안하지만 좀 웃기게 생긴 마르고 길쭉한 몸매의 남학생이 불쑥 나타났다.
막상 가까이 와서 보니 그렇게 마르지는 않았고 오히려 단단해 보이는 몸집이다. 몸매 자체가 말랐다기 보다는 키에 비해 말라보였던 것이다.
“아, 연철이 룸메이트?”
말라 보이는 녀석이 손바닥을 보이며 인사한다.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통성명 코스.
“역사과 김명호다.”
“반갑다. 윤리과 성진 이야. 성이 성, 이름이 진. 좀 특이하지?”
다음 코스는 악수.
“만나서 반갑다. 연철이 친구면 나한테도 친구니까 잘 지내자.”
“물론. 연철이 한테 얘기 많이 들었다.”
명호는 그 다음 코스로 남자들이 처음 만났을 때 으레 하기 마련인 두 사람의 공통 친구에 대한 비하성 발언을 던졌다.
“연철이 이 자식이 나에 대해 뭐라고 얘기 하더냐? 분명 뒷담이나 깠을 것인데?”
하지만 진이라는 녀석은 이름에 진이 들어가서 그런지 농담을 농담으로 받지 않았다.
“아니, 그 반대로 말하던데? 세상의 고통과 모순을 같이 고민하는 정의감 투철한 청년이라던데?”
“정의감이 투철? 하하하.”
명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연철이 혀를 차며 끼어들더니 뒷담이 아니라 앞담을 쳤다.
“하여간 저 단순한 놈은 조금만 띄워주면 오버한다니까?”
물론 연철이 한 말 역시 진담이 아니지만 진은 그 마저도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좋잖아? 순수하고? 난 순수한 사람이 좋아.”
명호는 기왕 이렇게 된거, 순수한 단순 캐릭터를 그냥 연기하기로 했다. 기대하는 모습이 그거라면 뭐 보여주지 뭐. 이게 무슨 사회적 낙인이론이라던가 뭐라던가. 하워드 베커였던가? 아무튼.
그래서 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려 보였다.
“하하하! 순수 하면 또 이 김명호 아니냐? 난 20세기의 마지막 순수파다.”
“알았다 알았어. 이 포카리 스웨트야. 그런데 진이 네가 웬일이냐? 이 누추한 자취방까지?”
“아, 그냥 ‘열린 글방’에서 책 좀 보다가 보니 해는 떨어지고, 배는 고프고, 마침 너희 방은 근처에 있고, 지금 자취생들 밥 해먹을 시간 아니냐? 설마 숟가락 하나쯤은 더 있겠지? 빈대좀 붙자.”
명호는 감탄했다. 이런 계산을 다 하다니, 연철이 말마따나 대단한 녀석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녀석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남학생 둘이 자취하면서 매끼 알뜰하게 챙겨먹을 거라고 기대하다니. 아침, 점심은 학생식당에서 처리하고 저녁은 찜통에 카레나 한 가득 해서 여러날 두고 먹고, 그 마저 다 떨어지면 라면으로 떼우고 그러고 사는 중이다.
그런데 하필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은 라면 차례다.
“그런데 어쩔까? 라면 밖에 없는데? 그래도 명색이 손님이 왔는데 참 미안타.”
명호가 미안함을 가득 담아 말했다. 연철이 얼른 나서 수습했다.
“괜찮아. 식은 밥은 많이 있으니까. 말아먹으면 돼. 그런데 진아. 강남 애들도 이런 거 먹냐?”
“무신 소리. 강남 학생은 무슨 위벽에 금칠이라도 했냐? 먹는 거야 뭐가 되었건 소화되고 나면 똥 되는 건 똑 같다.”
명호가 깜짝 놀란다.
“오매! 너 강남 출신이냐?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딱 봐도 우리 같은 촌출인데?”
농담이 아니라 명호 눈에는 정말 그랬다. 진이는 어딜 봐도 세련, 화려, 깔끔, 하여간 그런 것 하고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하긴 뭐 강남에 산다고 다 부자는 아니니까. 명호는 명색이 강남구라는 동네에서도 서초동에서 개포동에서 판자촌들이 늘어선 풍경을 봤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런데 연철이 하는 말이 명호를 더 놀라게 만들었다.
“진이 아버님이 우리 학교 철학과 교수셔. 그래서 진이는 중학교까지 독일, 정확히는 서독에서 다니다 왔고.”
허 이럴수가, 또 교수다. 미현에 이어 또. 명호는 요즘 유난히 교수 자녀를 자주 만난다.
선진국에서 자란 교수 아들에 강남 학생이라. 명호 마음 속에서 쳇 하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저런 녀석이 왜 운동권이 못되어 난리 치는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상에 불만 가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너무 한가해서일까? 어머니 당신의 아들과 민주의 투사가 서로 부딪치지 않아서일까? 민주의 투사가 되어도 덜 미안하기 때문일까?
그런데 명호의 순수하지만 가벼운 입이 그만 속 마음을 뱉아버리고 말았다. 깜짝 놀라 입을 앙 다물었지만 이미 말은 다 튀어나간 다음이다.
“나는 강남 애들은 여자 애들이나 꼬시고, 쇼핑이나 하고, 데모 같은 건 안 하는 줄 알았다.”
나가도 너무 나갔다. 초면에 이렇게 질러 버리다니. 이러면 진과 같은 과 친구인 연철의 얼굴은 뭐가 되는가?
옆을 보니 안그래도 하얀 연철이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 있다. 명호는 그만 주먹으로 자기 머리에 계속 알밤을 먹였다. 아,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그런데 막상 진은 그 말을 듣고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저 씩 웃을 뿐이다.
“미안하다. 말이 헛나왔다.”
명호는 일단 깨끗하게 사과했다. 수습에 성공한 탓인지 진이 성품 탓인지 모르겠지만 진의 대답이 시원하다.
“뭐 강남 애들 중에 그런 치들이 좀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간혹 나 같은 놈도 나온다고. 자자.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고. 기왕 온 김에 광고 좀 하자.”
“광고라니?”
“음악회 광고.”
음악회라는 말에 연철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음악회? 아이고, 잘못 찾아오셨네요. 이 방 주인들은 다 촌놈들이네요.”
“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음악회 말고. 내가 작사하고 친구가 작곡한 노래들 발표하려고.”
“진이 네가 작사? 설마 독일어?”
“무슨. 당연히 한국어지. 기대해. 작곡한 친구가 유명한 녀석이니까.”
“유명하다고? 누군데?”
“권정우.”
“뭐? 권정우?”
연철이 깜짝 놀라며 석유 곤로에 불 붙이려 꺼내던 성냥통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명호는 연철이 왜 그러는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다.
“엉? 왜 그러냐? 권정우가 누군데 그러냐?”
“너 권정우 몰라?”
도리어 연철이 명호를 너 혹시 간첩 아니냐 이러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
“모르겠는데?”
“그럼 디누라고 하면 알겠냐?”
그제서야 명호가 누굴 말하는지 알아들었다는 모습으로 손가락을 튀겼다.
“아, 진즉 그렇게 말할 것이지. 피아노로 국위 선양했다며 신동이니 뭐니 하던 디누?”
하지만 유명한 것과 좋아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명호는 디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기생 오래비 같이 생긴 미끈한 얼굴이 보기 싫었고 한국 사람이 뭔 미국 애들처럼 디누니 뭐니 요상한 이름 붙여서 부르는 것도 보기 싫었다. 어차피 부자들 놀이판 아닌가? 어차피 막귀인데다 클래식 레코드 판 사서 들을 형편도 안 되고 음악회는 아예 꿈도 못 꿀 일이고, 피아노는 태어나서 한 번도 건반에 손가락 얹어 본 일조차 없으니 알바 없었다.
그래도 명호는 최선을 다해 나름대로 상황을 파악하고 정리해보았다.
“한 마디로 클래식 음악하는 유명한 친구가 교향곡이니 소나타니 이런 것이 아니라 민중 가요를 썼다 이 말 아니냐?”
진이 손뼉을 쳤다.
“좀,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본질을 잘 짚었어. 역시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직관이야말로 진실로 이끄는 나침반이라니까. 그러니 연철아. 이런 순수함을 무식함으로 자꾸 몰아붙이면 곤란하다.”
그 말에 명호가 으쓱했다.
“어떠냐? 야, 박연철. 너 이 소리 들었냐?”
“그래. 들었다. 순수한 김명호.”
“어쨌든 너희들 도와줄 거지?”
연철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연하지. 내가 이름이라도 알고 있는 놈은 죄다 붙잡아서 문화관으로 끌고 갈게. 이 음악회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진짜 싸움.”
“진짜 싸움?”
요즘 교투도 나가보고 가투도 나가보면서 나름 고생했던 명호는 진짜 싸움이라는 말에 살짝 기분이 언짢았다. 그럼 여태까지 가짜 싸움을 했단 말인가?
그러다 명호와 눈이 마주친 진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치 “알아, 네 마음.” 이러는 것 같다. 진이가 마치 위로라도 하는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싸움이라는 말 보다는 결정적인 싸움이라고 해야겠지. 난 그런 결정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져. 그걸 느낄 때 마다 모공이 떨려.”
연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그리고 그 은폐 조작 때문에?”
“물론, 그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야.”
“어째서?”
“고문으로 목숨을 잃은 선배들은 그 이전에도 많았어. 인천에서 전화 받고 나간 멀쩡한 학생이 별안간 마산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그런 사건이 어디 한 둘이냐? 하지만 그 때 분위기는 지금 같지 않았어.”
명호가 다시 나선다.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국민들 불만이 쌓이고 쌓여서 막 터져 버리려는 시기다 그 말 아니냐?”
“정답! 역시 명호 넌 마음이 깨끗해서 그런지 사물과 사태를 쉽게 들여다보는 힘이 있어. 하지만.”
“하지만?”
“죽 쒀서 개 줄까 봐 그게 걱정이야. 그러니 바로 그때 부터가 진짜 싸움이야. 죽을 쒔으면 꿀꺽 삼켜야 해. 개 주지 말고.”
“죽 쒀서 개 주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
“맞다. 학생들이 피 터지게 싸워서 얻은 민주주의가 기껏 김대중이나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우린 그 이상, 그 너머까지 생각하고 있어야 해.”
“뭐라고?”
명호가 발끈했다.
“죽 쒀서 개? 아니 김대중 선생님이 개란 말이여, 아니면 김영삼씨가 개란 말이여? 그 분들은 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훌륭한 분들 아니냐? 두 분들 중 한 분, 기왕이면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 되는 것이 결국 민주주의 마무리 아니겠냐?”
그러자 진이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순수한 명호야. 우리는 지금 그 노친네들의 권력욕심 채워주자고 싸우는 게 아니야.”
명호는 진이 김대중, 김영삼 이런 분들을 권력욕심 부리는 노친네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것을 듣고 머리를 망치로 내리 찍힌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마치 그 동안 살아오던 땅이 지진이 나 갈라지고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럼?”
“우리가 닦은 길로 행진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어. 그들이 나서지 않으면 그 어떤 민주화 운동도 결국은 다 가짜야. 연철이는 알지? 그게 누구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일어서야 하는 진정한 민주 세력이 누군지.”
그러자 연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싸우는 건, 노동자들이 행진할 길을 열기 위해서야.”
연철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이 말했다.
“음. 그것도 있지만 그렇게 너무 딱 잘라 말하기는 그렇고. 어쨌든 학생들 혹은 학생들 및 화이트칼라 중산층과 군사정권의 한판 대결에서 학생쪽이 승리하면, 노동자들의 거센 투쟁이 밀려올 거야. 그리고 이 나라는 한바탕 성장통을 겪게 되겠지. 이 때 엉뚱한 짓거리 하면 완전히 망하는 거야.”
“엉뚱한 짓이라면?”
“민주화는 쟁취했으니 다음 목표는 통일이다 하는 식의 감상주의 말이야. 4. 19 투쟁도 이승만 하야 후 이딴 뻘 짓거리 하다 망했어. 예언하는데, 앞으로 학생운동의 흐름은 노동자들과의 연대 투쟁이냐 아니면 통일운동이냐 하는 두 가지로 갈라질 거야.”
연철이 다시 조용히 묻는다.
“그럼, 넌 어느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진의 대답이 단호하다.
“둘 다 틀려.”
“그게 무슨 소리야?”
연철이 깜짝 놀라며 진을 보았다. 명호는 뭐가 뭔지 알아들을 수 없어 놀라지도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진이 연철이 눈동자에 새겨진 물음표들을 세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면 학생운동은 그걸 뒷받침할 수 있는 지식기반을 만들어야 해. 인문계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대항하여 사상과 담론을 제공해야 하고, 자연계는 물리적 기반을 만들어 주고. 나는 학생운동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바는 바로 이런 것들이라고 생각해.”
연철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만 명호는 도무지 납득이 안 간다. 아니 이런 것들을 투쟁이라고 할 수 있나?
결국 한 마디 던졌다.
“아니, 그 말은 한 마디로 열심히 공부하자는 말 아니냐? 그럼 넌 왜 도서관에 있지 않고 가두에서 화염병 던지는거냐?”
진이 마치 모든 물음에 답이 준비되어 있는 교수처럼 바로 대답했다.
“특별한 상황이니까. 노동자들의 조직이 약하니 학생들이 일종의 대리전을 하는 셈이지. 하지만 내년에는 노동자들이 지금 같지 않을 거야. 그때 부터 학생운동은 아까 말한 것 같은 방법, 지식으로, 명호 네 말마따나 열심히 공부해서 그들을 도와주는 거야. 통일 어쩌고 하며 훼방이나 놓지 말고.”
명호는 갑자기 가슴이 시원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직은 알쏭달쏭하지만 진의 이 말이 오 어머니 당신의 아들과 민주의 투사 사이에서 힘들어하던 명호 마음의 빈 틈에 작은 다리를 놓아준 것이다. 시원하다. 명호는 그 청량감을 유지하면서 나름대로 정리한 생각을 털어놓았다.
“역시, 뭐니뭐니 해도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말 아니냐? 지금은 말하자면 일종의 아르바이트를 하는 셈이고, 그게 끝나면 다시 공부하는 학생이 되자?”
진이 손뼉을 쳤다.
“멋진 비유!”
그런데 연철이 심각한 얼굴과 무거운 목소리로 분위기를 가라앉힌다.
“네 생각에는 어떻게 될 것 같아? 정말 큰 길이 열릴까? 아니면 죽 쒀서 개 줄까?”
진의 대답은 0.5초도 걸리지 않았다.
“개 줘.”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슬로건이 틀렸어.”
“어떻게?”
“민주헌법 쟁취투쟁이라고 하는 슬로건이 어찌어찌 하다 보니 대통령 직선제로 변질되어 버렸잖아?”
“그런데?”
“생각해 봐. 국가보안법,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온갖 이상한 노동법 등등의 악법들을 그대로 놔두고 대통령 선거만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꾸는 것과, 이런 법들을 민주적으로 고치고 대통령 선거만 간선제로 하는 것과 어느 것이 민주주의에 가까울까?”
“그거야….”
연철이 꿀먹은 모습이다. 순간 명호는 머리에서 번개가 내리친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 아니 환해진다. 전율이 느껴진다.
“오메! 대통령 직선제라는 것이 완전히 빛 좋은 개살구 아니냐?”
이렇게 소리 지르고 말았다. 진이 웃었다.
“그래. 대통령 직선제는 빛 좋은 개살구야.”
“그럼 어쩌냐? 싸움 집어 치워?”
“그건 아니지. 그래도 이겨 봤다는 경험 자체는 아주 중요하니까. 우리 민중에게 필요한 것은 궁극적인 승리가 아니라 작은 승리의 기쁨, 벅참, 이런 것들의 경험이 아닐까? 내가 장담하는데 대통령 직선제 정도는 올해 안에 반드시 쟁취할 수 있어. 소가 아니라 닭을 잡고 만 격이지만 어쩌겠어? 그거라도 어디겠어? 그러니까.”
“그 다음이 중요하겠네?”
“그래서 난 지금 누구와 동지가 될 지 고르라면 그래도 제헌의회 소집투쟁을 외치는 쪽을 고를 거야. 그쪽은 너무 급하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이 있거든. 물론 좀 고루한 생각에 사로잡히긴 했지만.”
그러자 연철이 꿀을 다 먹었는지 다시 치고 들어왔다.
“그러니까 넌 CA에 가담하겠다는 뜻? 하긴 너 정도 되면 여러 정파들이 서로 끌어들이려고 안달할테니.”
“맞아. 앞으로 NL은 좀 심하게 말하면 역사의 진보를 돕기는커녕 훼방만 놓는 그런 존재가 되고 말 거야. 군사 파쇼보다 더 나쁘지. 그런 말도 있잖아? 부지런한 기회주의자는 적 보다 더 위험한 존재다.”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것이 부지런한 바보라는 말도 있지.”
그리고 둘은 명호가 알아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계속 주고받았다. 라면 먹으면서도 계속 주고 받고, 라면 먹고 나서도 계속 주고받았다.
명호는 둘이 주고 받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절반도 알아듣지못하겠지만 최선을 다해 이해하고자 애를 써 보았다.
언뜻 언뜻 마르크스가 어쩌구 레닌이 어쩌구 하는 말들이 들린다. 뭐라고? 마르크스라고? 레닌이라고?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악마의 우두머리처럼 들어왔던 이름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이름들이 두 친구의 대화에서 난무하고 있다.
깜짝 놀라 무슨 말인지 들어보려 해도 너무 어려워서 뭔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등판이 축축하다. 덥다. 땀이 난다.
명호는 이 땀이 라면 때문인지 무서운 이름을 들어서인지 아니면 봄이 끝나고 여름이 다가오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