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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1987년 1부 봄 18화 권오석3

by 권재원

침묵. 혼란스러운 침묵.

오석은 이 침묵이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누구라도 좋으니 말을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누가? 오석은 앞으로 펼쳐질 광경을 고개들고 보기 어렵다. 죽마고우와 여자친구의 다툼이라니. 고개를 푹 숙이고 이 시간이 그냥 지나가버리기만 기다릴 뿐이다.

한참만에 수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넌 말로는 세상의 비뚤어짐을 비판하면서 정작 세상의 그 잘못된 부분을 펑펑 누리며 살고 있어. 넌 부잣집 아들이고 노동자 1년치 소득을 출연료로 받으며 연주 여행을 다녀. 그 돈이 어디서 나왔는데? 부르주아가 노동자를 착취해서 번 돈이야. 옛날에는 아녜스와 염문을 뿌리더니 지금은 지네트와 가십을 뿌리고 있어. 그래서 네가 그토록 경멸하는 부르주아 언론 포츈인지 보그인지에 세계에서 가장 멋진 커플 100쌍인가 뭔가에 실렸어.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와 떠오르는 피아노의 신성의 환상적인 만남 어쩌고 하면서. 아녜스도 지네트도 다 부르주아 아니야?”

‘와! 이거 너무 세다.’

오석은 수현이 이것까지 건드릴 줄은 몰랐다.

아녜스. 정우가 중학교 때 사귀었던 미국의 소녀 바이올리니스트. 동서양이 적절히 융합된 미모와 어릴 때 부터 신동으로 알려진 바이올린 솜씨 덕분에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화장품 모델도 했던 원조 클래식 아이돌 스타다. 아니 원래 아이돌 스타인데 클래식 연주를 했다고 할까?

1983년 두 사람은 수십회의 연주회에서 함께 연주하며 무수히 많은 사진을 찍혔다. 그러다 연주자로서의 성장한계에 부딪친 아녜스가 바이올린을 집어 치우면서 관계가 끝났다.

지네트는 그 다음에 정우가 파트너로 선택한 동갑내기 바이올리니스트다. 부모는 한국인이지만 나고 자란 곳은 프랑스라 사실상 프랑스 사람이다. 바이올린의 여신이라 불릴 정도로 이미 입지를 탄탄히 굳히고 있어, 역시 어릴 때 부터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활동한 정우와 굉장히 티켓 가치가 높은 2중주 팀을 이루고 있다. 공식적으로 커플이라고 밝힌 적은 없지만 여러 정황상 거의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아녜스, 지네트 이 둘의 공통점은? 부잣집 딸들이라는 것이다. 오석은 수현이 이 관계들을 끄집어 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더구나 수현의 말에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정우는 자기 욕하는 건 참아도 아녜스나 지네트를 들먹이는 건 병적으로 싫어했다. 최나경의 죽음 때문이다. 최나경은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날 무렵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우는 그게 자기 탓이라 생각했다. 사실 비난 받을만한 짓을 했다. 최나경과 사귀고 있으면서도 아녜스와 관계를 정리하지 않았고, 그러면서 지네트와의 애매한 관계도 시작했으니까.

그런 점에서 지네트를 언급한 수현은 선을 넘었다. 하지만 오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현의 말이 타당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정우가 지금 확신을 가지고 하는 저 말들이 진실성을 얻으려면 자신의 삶을 어떻게든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를 혁명의 주체가 될 것이라 스스로 믿고 있는 노동자, 민중과 일체화 시켜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정우에게서는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을 혁명의 나팔수로 만들겠다고 하는 정우는 사실상 자폭하겠다는 모습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석이 아는 정우는 절대 지려 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더라도 지지 않으려는 열망만으로도 얼마든지 싸움을 이어갈 녀석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우가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다 싶더니 바로 수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결국 정우와 수현이 오석을 빼놓고 이야기 나누는 상황이 재현되고 말았다. 분위기만 급변했을 뿐이다.

“아, 지금 지네트 얘기하는 거야? 나 이거, 이 얘기를 만나는 사람마다 해야 해서 피곤한데, 잘 들어둬. 첫째, 난 지네트와 커플이 아니야. 연주 합이 잘 맞아 무대에 같이 올라갈 뿐. 둘째, 미안하지만 지네트는 부르주아가 아니야.”

“파리에 있는 호화주택에 살잖아? 여성잡지에 걸핏하면 지네트의 집, 지네트의 패션, 럭셔리 어쩌구 하고 사진 나오고.”

“지네트 아버지는 틀림없이 부르주아야. 하지만 부녀 관계가 나빠져서 사실상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어.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집 외에는 다 지네트가 스스로 번 돈이야. 스트라디 바리는 재단에서 빌려준 거고. 지네트가 자기 실력으로 돈을 많이 버는 건 아무 상관없어. 누굴 착취하거나 억압한 게 아니니까. 그런 식이면 나도 부르주아네? 나도 돈을 꽤 많이 벌거든?”

“맞아. 넌 부르주아야. 중산층 소시민의 눈으로는 지네트나 너나 심지어 여기 오석이까지 죄다 부르주아야. 그런데 누가 누굴 타도하고 누굴 위해 혁명을 해? 서민이 부르주아께 아뢰는데, 사양하겠어. 안 도와줘도 돼.”

수현의 목소리는 마치 교육방송 나레이터가 뭔가 조목조목 설명하는 것처럼 차분했다. 냉소와 분노가 감춰진 내용이지만 조금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우가 더 할 말이 없는지 멍하니 물잔만 보았다. 오석은 정우가 저렇게 다른 사람과 말에서 밀리는 모습은 처음 봤다. 정우가 서 있는 위치가 그만큼 허약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석은 이 상황을 빨리 정리하고 싶었다. 더 이상 정우와 수현이싸우게 둘 수 없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빨리 결정하고 싶다. 그래서 빙글빙글 돌리지 않고 바로 핵심만 뽑아 물어보았다.

“정우야, 너, 그럼 데모하겠다는 거야? 운동권 되어서?”

“그럼.”

“아름다움을 만드는 손에 화염병과 각목을 쥐겠다고?”

“너, 내가 피아노 다음으로 잘하는 게 싸움이라는 거 몰라?”

“미안해 정우야.”

오석이 조심스럽게 티켓과 팜플렛을 정우 쪽으로 되밀었다.

“나, 여기 갈 수 없어.”

“시간이 안 맞아?”

“아니.”

“그럼, 왜?”

“두려워.”

“두렵다니? 뭐가?”

“난 진이가 쓰는 시가 진이가 만들어내는 문장이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뒤흔드는지 알아. 네 음악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 이 둘이 만나면 어떤 것이 나올지 정말 안 봐도 훤해. 진이와 네가 만든 곡을 들으면 내 마음이 확 변해버려 결국 나도 따라 나서게 될거야. 난 그게 두려워. 난 네가 이 음악회 자체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확 변해버려 휩쓸려가는 그런 학생들이 생기지 않았으면 해.”

“너 그 말 진심이야?”

“미안해. 진심이야.”

“진실과 정의와 양심의 외침에 대답하는 것이 두렵다고?”

정우가 눈을 부릅뜨고 오석을 노려보았다.

오석은 결정적인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햇수로 10년, 짧은 인생을 감안하면 반평생을 이어온 우정이 이 한 순간에 끝장 날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 자신의 문제도 아닌 막연한 이념과 이상 때문에.

민주주의? 정의? 오석에게는 이 중 그 무엇도 평생 이어 온 우정에 비하면 하찮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표정으로 보아하니 정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우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이 시대, 이 세상이 문제인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동떨어진 추상적인 이념과 원리를 두고 흑과 백으로 사람들을 갈라 놓고 친구를 적으로 만들고, 가족을 원수로 만드는 이 세상이 문제인 것이다.

오석은 정우와 말다툼해서 이길 생각 따위는 없었다. 정우에게 한 말은 호소였지 논박도 설득도 아니었다. 호소까지 했으면 되었지 우정의 존망을 걸고 자신의 생각을 더 밀어붙일 수는 없다. 데모하는 정우도 친구고 안 하는 정우도 친구다. 다만 안타까울 뿐.

오석은 정우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정우의 손가락이 보였다. 그냥 초조한 마음 따위를 드러내는 손가락질이 아니었다. 그것은 테이블 보를 건반 삼아 연주하는 빠른 스케일과 아르페지오였다.

맙소사! 오석의 짐작이 맞다면 저건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의 3악장 피날레 부분이었다. 오석이 대답을 안하고 침묵이 이어지니 그 잠깐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오석이 알고 있는 정우의 원래 모습이다. 정우의 두뇌는 공백을 싫어한다. 천재란 원래 그런 존재다. 머리가 더 좋은 것이 아니라 머리가 더 많이 가동되는 것이다. 정우의 머리는 단 한순간의 휴식도 버거워한다. 음악의 천재란 틈만 나면 머리가 음악적으로 돌아가는 존재다.

정우의 두뇌가 말다툼하다 짬이 생기자 즉시 그 공백을 피아노 연주로 채워버린 것이다.

오석은 슬슬 마음이 놓였다. 이제 대충 상황이 정리되었다. 오석이 아무 말 안하고 있으면 정우는 혼자 음악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말 것이고, 그러다 왜 싸웠는지, 아니 싸웠는지도 잊어버리고, 심지어는 여기 왜 나왔는지도 잊어버릴 것이다. 그리고는 갑자기 “연주 아이디어(혹은 악상)가 생각났어. 미안. 가서 연습해야해.” 하며 휑하니 가버릴 것이다.

오석은 더 이상 정우에게 말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시간을 채우기로 했다. 정우에게 필요한 것은 그 뛰어난 두뇌를 심심하게 만들 시간, 그래서 음악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 시간이니까.

하지만 오석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수현의 목소리가 음악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던 정우를 다시 현실 세계로 끄집어 올린 것이다.

“데모하는 것만이 정의라는 건 궤변이야.”

이 목소리에 음악의 백일몽으로 들어가던 정우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이야?”

“정의라는 것을 그렇게 데모라는 틀 속에만 한정시켜 버릴 수 없다고. 그건 너무 오만해. 물론 데모하는 건 자유야. 데모하는 친구들 말릴 생각 추호도 없어. 하지만 자신이 싸우는 상대를 나쁜 놈으로 만드는 것에 만족 못하고, 함께 싸우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말없는 사람들까지 나쁜 놈으로 몰아 붙이는 건 독재야. 정신적인 독재. 도덕적인 독재.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독재.”

결국 정우와 수현이 오석을 빼놓고 이야기하는 상황이 세번째로 재현되고 말았다.

정우가 재미있다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석은 저 표정을 안다. 상대를 조롱하거나 경멸할때 짓는 표정이다.

“그럼 넌 광주의 학살자가 정권을 장악하고, 국민의 마땅한 참정권을 박탈하고, 언론의 자유를 말살하고. 천만 노동자가 피땀 흘려 일한 대가를 몇몇 모리배들이 마치 자기 것인 양 가로채고 있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위선과 거짓된 근엄함이 온 반도를 답답하게 억누르고 있는 상황에서 무슨 또 다른 정의가 필요한데?”

“만약 지금 이대로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애초에 그런 권리가 있는지도 몰랐었고 또 알고 싶지도 않고, 또 내가 피와 땀을 빼앗기는 지도 몰랐었고 또 알고 싶지도 않다면? 그래서 지금 이대로 오손도손 사는 것이 진실을 아는 것 보다 차라리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렇게 느끼는 것도 불의가 되는 거야?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그렇다면.”

정우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탁 두드리며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그의 앞에 놓여 있던 물 잔이 빙글빙글 돌며 넘어질 뻔하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작은 세차 운동을 몇 차례 했다.

“너희들은 그렇게 오손 도손 바보같이 당하는 줄도 모르고 살아라. 하긴 그런 말이 있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바보들이라고. 물론 자신들이 바보라는 것을 모르는 바보에 한하는 얘기겠지만.”

“이 봐요. 디누. 아니 권정우씨.”

수현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갑자기 경어를 쓰며 이야기했다.

“당신은 마치 자신이 영웅이라도 된 듯 착각하고 있어요. 물론 당신이 스타라는 거 잘 알고, 충분히 인정해요. 그런데 지금 운동권에서 당신의 그런 점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 안 해 보셨나요? 당신이 지금 이용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보셨나요?”

“하! 무슨 말씀이시죠? 오수현씨?”

“고등학교 때 날라리 패거리들이 모범생 하나 꼬셔서 자기네 써클에 가입시키는 것 본적 있나요? 학생부 선생들 눈에 그럴듯한 패거리로 보이려고? 내가 보기에는 당신이 꼭 그 짝이네요. 당신 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운동권이 얼마나 그럴듯해 보이겠어요? 72년 유신 반대 시위에 정경화씨가 앞장선 격이잖아요? 그런 효용가치 때문에 당신은 포섭된 거라고요. 좌경 학생들이 예술가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한 거라고요. 현실을 바로 봐요.”

“하아, 내가 이래서 먹물들을 싫어해요. 무서우면 무섭다. 반동이면 그래 나는 반동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만이지 뭔 말들은 그렇게 그럴듯하게 같다 붙이려고 하는지. 난 갑니다. 오수현씨. 오늘 정말 떡 같은 시간을 보내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석아. 너도 마찬가지. 넌 여전히 겁쟁이 범생이 그대로구나.”

정우가 자리를 박차고 레스토랑 밖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판이 점점 작아질 때마다 오석은 지난 10년간의 인생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점점 멀어지던 정우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오석은 잠깐 희망을 가졌지만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정우는 오석이 아니라 수현에게 쏘아붙였다.

“그리고 오수현씨. 이건 분명히 알아둬요. 난 대학 들어와서 단 한 번도 선배들하고 무슨 얘기 한적 없어요. 난 내 발로 그 길에 직접 들어섰다고요.”

그리고 다시 돌아서서 레스토랑 문을 사납게 밀어붙이며 나가 버렸다.

아까부터 “어머, 저기 봐. 디누야!” 하며 수군거리고 있던 여학생 둘이 허둥지둥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수현이 동심파괴된 아이의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나쁜 사람들 같으니. 당장 짱돌 몇 개 던지고 데모가 몇 곡 만드는 데 저런 사람을 소모해?”

수현은 정우가 운동권의 감언이설에 포섭되었다고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오석은 그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

“아니야.”

오석이 팔꿈치에 얼굴을 파묻고서 임종하는 노인 같은 작은 소리를 냈다.

“아니라고?”

“정우는 순진하지도 어리하지도 않아. 그건 예술가에 대한 세상의 편견이야. 녀석은 남의 말 안들어. 스스로 판단해서 데모 판에 나갔을 거야. 녀석은…”

오석은 마지막 문장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말 대신 눈물이 밀려나온 것이다.

수현이 당황하며 오석 옆에 와 앉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괜히 디누 소개시켜 달라고 졸라서. 이걸 어째?”

수현이 조용히 등을 쓰다듬었다.

그럴수록 오석의 마음은 더 복잡해진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우정은 잃어버렸지만 사랑은 남았다? 등을 쓰다듬던 수현의 손이 멈추더니 대신 떨리기 시작했다.

오석은 눈물을 대충 닦고 떨고 있는 수현의 손을 잡았다. 떨림이 멈추었다.

오석은 눈물을 멈춘 대신 말에 눈물을 녹여 공기중에 분사하는기분으로 뿌렸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단 하나만 남았어. 데모하면 다른 인간적인 약점은 다 무시되고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 데모 안 하면 다른 인간적인 장점이나 매력은 다 무시되고 악인에 비겁자. 중학교 동창을 만나도,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도, 옛이야기 나눌 정취마저 사라졌어. 누굴 만나도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게 정치 성향이야.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어? 너무 하잖아?”

수현이 자기 손을 잡고 있는 오석의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쥐며 토닥였다.

“데모 하는 것만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니야. 데모 안 하는 데는 그 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해. 데모도 못하고, 안면 몰수도 못하면 도대체 넌 뭘 할 건데?”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렇다면 우선. 얼굴이나 좀 닦어. 누가 보면 내가 너한테 헤어지자는 말이나 하는 줄 알겠다. 자, 여기 티슈.”

오석은 수현이 건네준 티슈로 눈물투성이 얼굴을 닦았다.

“고마워. 수현아. 그러고 보면 넌 참 대단한 것 같아.”

“뭐가?”

"예쁘고, 똘똘하고, 나 보다 몇 십 년은 더 세상을 더 산 것 같아.”

“그거 내가 나이보다 몇 십 년은 늙어 보인다는 뜻이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뭐라고 할까? 그러니까 그게 세상일에 참 노련하게 대처한다고 할까? 하여간 그런 뜻이야.”

“당연하지.”

“왜?”

“난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했으니까.”

“철저한 현실주의자?”

“응.”

오석은 그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현실주의자라니? 오석은 언제나 이상주의자였던 것이다. 아니 차라리 감상주의자였던 것이다.

관계가 오래가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쩌지? 수현마저 잃어버리면 오석은 완전히 혼자가 된다. 이 사막 같은 캠퍼스에서 그늘 하나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럼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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