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장편소설 디누 2부 1권 2화인문계고등학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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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종 시계가 비명을 쳤다. 정우는 고막 흔들리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잠에서 깼다. 안 떠지는 눈을 억지로 뜨기 위해 휘두르던 팔이 비명치는 시계를 후려 갈겼다. 시계는 3미터 정도 날아가다 벽에 부딪치더니 날카로운 타격음과 함께 비명소리를 멈추었다. 충격 때문에 꺼짐 버튼이 눌렸던가 어딘가 깨져 영원히 비명 치지 못하게 되었던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간신히 뜬 정우의 눈에 늘 보던 책상, 늘 보던 침대 머리판, 늘 보던 책꽂이 속의 참고서들, 늘 보던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 그리고 그 위에 수북하게 쌓인 악보뭉치들이 창 밖의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박테리아처럼 파고들었다.
다만 자신의 임무를 다했을 뿐인 자명종 시계가 구석에 처박혀 원망하는듯 초침 소리를 째깍거리며 냈다. 부서지지 않은 모양이다. 정우는 시계를 책상위에 곱게 올려 두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드러내고 밖으로 나섰다.
“인났나?”
어머니 목소리. 벌써 부엌에서 도시락을 싸고 있었다. 고등학생 자녀를 두면 새벽잠을 포기해야 하는 불쌍한 한국 중산층 여성의 표본 같은 모습이다. 한국 중산층 청소년의 표본으로 전락한 정우 역시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만 끄덕인 뒤 식탁 앞에 몸을 던졌다. 의자의 비명소리가 삐걱거리며 고요한 아파트의 정적을 흔들었다.
“오늘 성적표 나오나?”
“몰라요.”
“언제 나올지도 모르나?”
고등학생 자녀가 있는 가정의 표준적인 대화가 오갔다.
미우가 연주자를 포기하고 도피 혹은 휴양성 유학을 떠나고 정우가 더 이상 음악의 신동이라고 불리지 않게 되면서 어머니는 자식들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줄었다. 이는 성적표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났다.
“시험 1주일 지났으니 오늘 나오던가, 내일 나오던가, 아니면 안 나오던가 하겠죠.”
“오석이 보단 잘 했어야 할텐데…”
이런 이런, 오석이 이야기는 절대 안 빠진다.
이 역시 정우가 음악의 신동이라 불리지 않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 동안에는 오석이보다 성적이 좀 떨어져도 상관없었지만, 이제는 용납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석이는 공부가 전공 아닌가?
“오석이가 전교 5등 안에 들어가는데 오석이보다 잘하려면 전교 1등이라도 해야겠네. 거 참, 내가 공부만 하는 처지도 아니고.”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 음악 꼭 계속 해야 하나?”
“꼭이라뇨?”
“내사 피아노를 하던 뜀박질을 하건 서울대학만 간다면 아무 상관없지만. 공부 성적으로도 얼마든지 서울대학 가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수 있는데, 왜 꼭 피아노라야 하나?”
“내가 좋아하니까.”
“니 좋아한다고 세상이 알아주나?”
“엄마는 날 과소평가하는데, 올림픽으로 치면 메달리스트라고.”
“내도 그런 줄 알았다만, 이젠 니가 진짜 소질이 있는 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 하는 말이다. 올 1월만 해도…”
“아, 그 얘기는 그만 하죠. 공연 한 번 망쳤더니, 사람들 입 싹 닦고 사라지더니 이젠 엄마까지 머저리 취급이네.”
정우가 식탁에서 벌떡 일어나 책가방을 둘러메고 말없이 집을 나섰다. 11월의 아침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차갑다. 게으른 태양은 아직 잠에 빠져 있고, 여섯시 반이 넘었지만 거리는 여전히 컴컴했다.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워크맨을 틀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이 새벽 길을 질주하는 자동차의 거센 엔진소리를 덮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쇼핑센터의 지붕이 고대 신전으로, 자동차 배기가스 덩어리가 표현주의 미술작품으로, 심지어 밤새 취객이 흘리고 간 토사물조차 설치미술로 보였다.
100미터 전방에서 버스 라이트가 별자리처럼 반짝이더니, 288번 버스가 낡은 엔진소리를 뽐내며 달려왔다. 이어폰의 틈을 뚫고 들어오는 엔진소리, 브레이크 소리마저 모차르트 협주곡과 섞이면서 아름답게 바뀌었다. 정우는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 있는 힘껏 달렸다. 가능하면 달리는 모습도 아름다운 포즈면 했다.
숨을 헐떡이며 버스에 간신히 올라탔다. 이미 사람들이 너무 많이 타서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안으로 좀 들어가요!”
기사가 호통을 치고, 안내양이 정우를 안으로 마구 밀어 넣으며 억지로 문을 닫았다. 정우가 어거지로 공간을 만들며 밀고 들어가자, 버스 안쪽에서 압력을 받은 소녀들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정원 78명이라고 적혀 있는 빨간 글씨를 비웃으며 버스 안을 가득 메우고 선 100명 이상의 승객들은 거의 대부분 고등학생들이다. 한국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고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드는 가장 부지런한, 아니 부지런함을 강요당하는 계급.
이들의 경쟁에는 대학 입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앉을 자리 잡기, 아니 좀 편하게 서 있을 자리 잡기, 심지어 흔들리지 않게 잡고 설 손잡이 찾는 것마저 치열한 경쟁의 대상이다.
든든한 손잡이를 발견한 정우는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으려 손을 집어 던졌다. 그러나 어떤 여학생이 먼저 그 손잡이를 잡았고, 정우는 손잡이 대신 여학생의 손을 잡아버렸다. 정우도 여학생도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누구도 손잡이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에 적당히 손과 손이 잡힌 상태로 가야 했다.
그렇게 15분을 달려간 버스가 S여고 앞에 정차하자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나갔다. 그제야 버스가 사람 싣고 가는 수레 꼴을 갖추었다. 정우에게 손을 잡혔던 여학생도 손을 떼고 후다닥 튀어나갔다.
이때 구석에 빈 좌석 하나가 생겼다. 서너 명의 학생들이 동시에 돌격했지만 정우의 동작이 가장 빨랐다. 딱 반 걸음 차이로 자리를 놓친 학생들의 원통해 하는 모습을 통쾌하게 바라보던 정우는 편안하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피아노 협주곡에 귀를 기울였다.
J고등학교는 이 버스의 종점이라 버스가 더 가지 않을 때까지 가면 되었다. 그래 봐야 10분이면 도착하겠지만. 그래도 협주곡의 2악장을 들을 시간은 충분했다.
클라리넷과 피아노가 주고받는 애절한 대화에 젖어있다 보니 어느새 종점에 도착했다. 2악장 종결부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정우는 평소보다 조금 빨리 학교에 도착한 버스가 전혀 반갑지 않았다. 신호라도 한 번 걸릴 것이지.
버스 문이 열리자 학생들이 노르망디 해안의 해병대처럼 우르르 탕탕 버스 밖으로 뛰쳐나갔다. 정우 역시 거기 섞여 돌격했다.
버스를 내려 길을 건너자 교문 앞에2학년 선배들이 핏발 선 눈동자로 서 있었다. 팔뚝에는 빨간 글씨로 ‘규율’이라고 적혀 있는 완장을 차고 있었다. 마치 엑스선 투시기로 교문에 들어서는 학생들의 내장까지 샅샅이 스캔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그 순간 정우는 가슴팍에 당연히 달려 있어야만 하는 교표와 이름표가 만져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급히 나오느라 잊어버린 것이다. 집에 다시 갔다 오면 틀림없는 지각이고, 그냥 들어가면 규율부 한테 잡힐 것이다. 완벽한 진퇴양난이다.
계산해 보니, 교표 명찰 미착용에 해당되는 벌이 지각보다 더 가벼웠고, 무엇보다 잡힐 확률도 낮았다. 미착용이야 용캐 빠져나갈 기회나 있지 지각은 무조건 잡히기 때문이다.
“에라 모르겠다. 종아리 몇 대 맞고 끝내자.”
정우는 고개를 푹 숙이고 키가 큰 학생들 틈에 슬쩍 섞여 규율부 앞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마침 규율부는 누군가 붙잡아 놓고 기합 주느라 정신 없었다. 큰 건을 잡았는지 교표 명찰 미착용 같은 경범죄자 따위에는 관심 없어 보였다.
“휴우.”
한숨을 길게 내쉰 정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실을 향해 달렸다.교실에 뛰어들어보니 아이들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와”조용히 해!”라고 외치는 반장 오석이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뒤 섞여 온통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다.
“야, 이 새끼들아, 내가 왔다!”
정우 역시 난장판에 당당히 일익을 담당하며 한 소리 지르고 오석에게 아침 인사 삼아 한 마디 던졌다.
“야, 야, 너나 조용히 해! 네 소리가 제일 커.”
“정우야! 너 우리 교감이 이렇게 된 거 아냐?”
옆자리 상현이 손가락 두개를 위로 세워 얼굴 양 옆에 붙여 성난 황소 모양을 해 보였다.
“웬 뿔?”
“이번 모의고사, 우리학교가 강남구 꼴찌에서 두 번째래.”
“그래? 꼴찌는 아니네. 어디가 꼴찌래?”
“알게 뭐야.”
“모름 말고. 그런데 꼴찌를 하든 일등을 하든 어쩌라고?”
“이 멍청아. 자칭 천재라는 놈이.”
“어허, 말 조심해라. 자칭이라니?”
“그래. 천재라는 놈이 어쩌면 그렇게 짱구가 안 돌아가냐? 학교 비상이라니까. 교감이 펄펄 뛰면서 다음주부터 전교생 다 10시반까지 야간자율학습 시키세요 하고 소리지르는 거 들었어.”
“야자? 1학년도?”
“1학년은 전교생의 부분집합 아니냐?”
“그건 좀 지랄이네. 그런데 대체 누가 평균 깎아 먹었어? 난 당연히 아니고. 정상현! 네가 학교 평균 깎아 먹었지? 너 때문이지?”
“웃기지 마. 나도 평균은 한참 넘어.”
둘이 치고 박아가며 전형적인 사내아이 놀이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데 어느새 오석이 슬며시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정우야, 축하해.”
“무슨 소리냐 갑자기?”
정우가 얼떨결에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오석이 뭔가 말하려고 하는데 아이들이 후다닥 자기 자리를 향해 몸을 던졌고, 아수라장이던 교실이 삽시간에 고요의 바다가 되었다.
조용히 교실 앞문이 열리고 담임 교사가 들어왔다. 언제 그런 일대 난장판을 만들었었냐는 듯 마치 선종 사찰 같은 모습을 연출하며 조용히 앉아있는 아이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50이 한참 넘은 담임은 인사를 생략하고 입을 열었다.
“조회 시작한다. 음,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왔다.”
성적표라는 말이 나오자 아이들 얼굴이 잔뜩 긴장했으면서도 애써 의연한 척 하는 기묘한 형상으로 굳어버렸다.
“그 동안 우리 반에서는 항상 오석이가 1등을 했는데, 이번에는 정우가 1등을 했네?”
담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현을 비롯한 정우 주변 아이들이 머리통을 사정없이 두들기며 나름의 축하를 표현했다.
그러나 정우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아래로 내리깔았다. 오석에게 너무 미안했다.
오석이 불쌍했다. 정우야 학교 점수야 뭐가 되었건 큰 의미가 없지만, 오석에게는 그게 정체성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등수에 몹시 집착하는 오석의 부모, 특히 어머니를 생각해 보면 녀석이 집에 가서 어떤 꼴을 당할지 뻔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정우가 미안해 할 일은 아니었다. 말이 좋아 1등이지 정우가 평소보다 딱히 더 잘 한 건 없었다. 늘 하던 대로 했고, 받던 만큼의 점수를 받았다. 단지 오석이 시험을 망쳤을 뿐이다.
정우는 오석이 시험을 왜 망쳤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가슴이 더 아팠다.
누나. 미우 누나.
15년이라는 짧은 생애 중 9년을 친구로 지냈지만 오석이 저렇게 흩어져 있는 모습은 처음 봤다. 그 꼼꼼하던 녀석이 계속 실수를 했고,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고, 심지어 엎드려 자기까지 했다. 공책 필기도 하지 않았고, 숙제도 제때 안 해 매를 맞기까지 했다. 국민학교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 까지 계속 같이 다니지만 오석이 야단 맞거나 매 맞는 모습은 올해 들어 처음 봤다.
게다가 오석은 친구들하고 말도 거의 하지 않았고, 공부하는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무 의욕도 목적도 없어 보였다. 그러고도 저 정도 성적이라니 확실히 머리 하나는 타고났구나 싶기도 했다.
심지어 절친이라는 정우도 하루 종일 들을 수 있는 오석의 목소리라고는 아침 자습 시간에 “조용히 해.”라고 외치는 소리, 수업 시작과 끝에 “차려, 선생님께 경례!” 하는 의례적인 말 뿐이었다.
한 마디로 저것은 오석이 아니라 오석의 모양을 한 무엇이었다. 서양 전설에 자주 나오는 요정이 바꿔채기한 아이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정우는 오석에게 미우가 어떤 의미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미우보다 세 살 어리긴 하지만 정우 자신도 두살 위인 아녜스와 사귀고 있었으니까. 한때 미우-오석, 아녜스-정우 두 쌍이 가족사진을 찍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석이 미우에게 버림받았다. 정우는 아녜스와 자신 사이에 다시 태평양이 가로놓이게 되었을 때 고통으로 몸부림 쳤고, 그 고통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오석을 볼 때 마다 가슴이 아팠다.
‘오석아, 제발 돌아와라.’
정우가 마음 속으로 조용히 텔레파시를 던졌다. 부디 닿기를 바라며.
미우를 사랑했던 오석은 계속 슬퍼하게 두고, 정우의 친구 오석이 돌아왔으면 했다. 함께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자고 약속했던 그 오석이 빨리 돌아왔으면 했다. 역시 오석은 자형 보다는 친구가 훨씬 어울리니까.
그런 정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담임은 피아노 연습하느라 바쁜 속에서도 이렇게 우수한 학과 성적을 거둔 정우를 본받아 운운하며 정우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물론 그 칭찬은 자연스럽게 다른 학생들에 대한 꾸짖음과 훈계로 전환되었다. 지명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정우는 그 꾸짖음의 대상이 오석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말이 듣기 싫은 정우는 귀를 닫고 마음 속에 시공간을 넘나드는 자신만의 세계를 펼쳤다. 시간은 내년 가을, 공간은 바르샤바. 1985년 10월 17일. 5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쇼팽 콩쿠르. 1년도 채 안 남았다.
연령제한이 17세 이상이니 1968년10월5일 생인 정우는 딱 컷트 라인이었다. 만약 우승한다면 앞으로 영원히 깨질 수 없는 최연소 우승 기록이 될 터였다.
사실 정우는 뮌헨 실내악 콩쿠르에서 누나와 함께 우승컵을 거머 쥐었고, 취리히 콩쿠르에서1위 없는 2위에 입상하면서 콩쿠르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다. 올림픽으로 치면 복식 금메달, 단식 은메달을 딴 셈이었으니.
그랬던 정우가 다시 쇼팽 콩쿠르에 집착하게 된 까닭은 이 말을 깨고 싶어서였다.
‘스타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의 부록’
올 1월, 결국 아녜스와 헤어지게 만든 재앙이 되어버린 공연 이후 어느 평론가라는 작자가 붙인 잔혹한 딱지였다. ‘디누’의 명성이라는 것이 결국 누나 미우 혹은 아녜스 같은 유명한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와 함께 연주한 덕분이라며 조롱한 것이다.
그 평론가만 정우를 그렇게 봤던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녜스와 결별하자 줄줄이 공연이 취소되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공연이 아녜스와 함께 하는 것이었다. 취소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취리히 콩쿠르 2위 수상자 자격으로 획득한 10회의 독주 공연마저 취소되었다. 손가락 회복되기 기다리느라 1년을 유보했는데, 스스로 포기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냉정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나마 한 두개 들어왔던 공연 제안은 하필 누나의 수술과 은퇴라는 충격 때문에 도저히 연주가 가능하지 않은 시기에 들어와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공연 의뢰가 들어오지 않았다. 미우나 아녜스가 곁에 없는 디누를 원하는 공연 기획자는 없었다. 그렇게 끝났다. 세상을 놀라게 했던 신동 디누는, 음악 역사상 별처럼 많이 나왔다 사라진 그 숱한 신동들 중 하나로 사라지고 있었다. 미야자와 겐지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별은 하늘 위에서 빛날 때나 별이지, 일단 바다에 빠지고 나면 불가사리에 불과했다.
따라서 정우에게는 새로 나온 우승컵이 필요했다. 다시 하늘로 올라가려면, 다시 별이 되어 빛나려면 반짝이는 우승컵이 필요했다.
정우도 어느새 만16세를 넘었다. 어른들 대회에서 입상했다는 것만으로 더 이상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13세에 루체른 3위, 14세에 취리히 2위는 놀랄 만한 일이었지만 다만 기특하고 대견한 정도에 불과했다. 유일한 우승컵인 뮌헨 실내악 콩쿠르는 디누가 아니라 미우의 몫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니 우승컵이 필요했다. 쇼팽 콩쿠르라면 더 말할 나위 없었다. 20대 초반에 받아도 놀랍다는 소리를 듣는 대회니까. 쇼팽 콩쿠르 최연소 우승자가 될 기회는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다. 1985년 대회는 1968년생이 최연소자가 되지만 다음 대회는 5년을 건너 뛰어 1973년생에게 그 기회가 돌아간다. 1969년~1972년에 태어난 피아니스트는 억울하게 최연소 우승의 기회가 사라지는 것이다.
정우는 정해진 과제곡 연주에 점수를 매기고 등수를 나열하는 일 따위가 정말 싫었다. 하지만 디누가 살아 있음을, 디누가 결코 아름다운 여성 연주자들의 부록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려면 싫어도 해야했다. 이제 정우의 마음은 마치 당연한 권리인 양 바르샤바를 찍고 비인으로 잘츠부르크로 런던으로 그리고 뉴욕으로 내달렸다.
취리히. 고향 같은 취리히도 빼놓지 않았다. 취리히 톤 할레에서 지히발의 지휘로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연주할 것이다. 이번에는 튼튼하고 힘찬 손가락으로 객석을 가득 채운 청중들을 흥분이 도가니로 몰아넣을 것이다.
“차렷! 경례!”
오석의 구령 소리가 정우를 취리히에서 다시 서울로 끌고 왔다. 서울 하고도 강남구의 어느 콘크리트 건물 안의 20평 짜리 교실. 정우의 백일몽도 끝났다.
조회가 이제야 끝났나 싶어 둘러보니 이게 웬일인가 마지막 시간이 끝났다. 그렇다면 바르샤바, 비인, 잘츠부르크, 취리히를 꿈꾸며 거의 하루 종일 비몽사몽 상태로 보냈다는 뜻이다.
어쨌든 학교 끝났으니 짐 싸고 집 갈 일만 남았다. 정우는 휘파람을 불며 가방을 쌌다. 학교 끝나고 가방 싸는 시간이 흥겹기는 정우나 보통 학생들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정우에게는 즐거워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바로 레슨 시간이다.
정우는 루체른 콩쿠르에서 입상한 경력을 자랑하는 어느 교수의 레슨을 받는 중이었다. 역시 그 대회에서 입상한 정우를 마치 학교 후배처럼 각별히 여기는 50대 초반의 후덕하게 생긴 여성인데, 레슨이라기 보다는 수다 떠는 시간에 가까웠다.
어차피 그 교수는 정우에게 딱히 더 가르칠 것이 없었다. 누구보다 본인이 그걸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나도 아녜스도 없는 정우에게는 연주를 들어줄 감식가가 필요했고, 이웃집의 신경질적인 초인종 소리 듣지 않고 마음껏 피아노를 칠 수 있는 방음장치 잘 된 집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그 교수의 너무도 느슨한, 사실은 아예 정우 맘대로 하게 방치해 두는 레슨 아닌 레슨 때문에 몹시 불안해했다.
“그래서 정우가 서울 음대 갈 실력이 되겠습니까?”
걸핏하면 그 교수에게 따지듯이 물어보곤 했다. 그때마다 교수는 몸집에 어울리는 호탕한 웃음을 터드리며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어머니. 아무리 요즘 상황이 그래도 그렇지, 디누는 어디까지나 디눕니다. 아니, 디누가 서울 대학을 걱정해요? 서울 대학은 신경 쓰지 말고, 쇼팽 콩쿠르 걱정이나 합시다.”
하지만 이미 신뢰를 잃어버린, 그리고 그 신뢰의 기둥이던 큰 딸이 무너진 경험을 한 어머니는 여전히 불신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서울대는 핑계고 그냥 음악이 싫었으리라.
그래서 정우에게 레슨이 더욱 필요했다. 집에서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아니 집안에서 음악 소리가 들릴 때 마다 어머니가 너무 힘들어하는 게 뻔히 보였다. 집에서는 아무것도 연주할 수 없었다. 원 없이 피아노를 치려면 레슨이 필요했다.
그 교수가 살고 있는 곳이 개포동이라 학교에서 빠른 걸음으로 20분이면 충분했다. 그래서 정우는 학교가 끝나면 늘 걸어서 레슨을 갔다. 가방을 들쳐 매고 그 특유의 삐딱거리는 걸음으로.
교문을 나서는데 눈 앞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오랜 세월 너무도 익숙했지만 갑자기 낯설어지고 이제는 점점 멀어져 남남이 되어가는 실루엣. 정우는 이 상태를 견딜 수 없어 큰 소리로 실루엣을 불렀다.
“야, 오석아.”
실루엣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래도 못 들은 척 하며 가지 않아 고마웠다. 정우가 빠른 걸음으로 실루엣을 향해 다가서자 실루엣이 여전히 우울이 지배하고 있는 오석의 얼굴로 바뀌었다.
“정우구나. 지금 레슨 가니?”
오오 장족의 발전이다. 그래도 말을 했다. 그냥 억지로 짓는 미소 띤 얼굴로 말없이 있다가 “잘 가.” 이러고 버스에 올라타지 않고.
좋다. 그럼 여기서 조금 더 시도해 보자.
“너, 여기서 버스 타지 말고, 거기까지 같이 걸어가자. 거기서 버스 타면 되잖아?”
정우가 이렇게 제안하자 오석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
정우가 구부러지고 처진 오석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