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장편소설 디누2부 1권 4화 만남1

by 권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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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네트가 몸을 움츠렸다. 비행기 밖으로 나서자 마자 연결 통로에서부터 온 몸에 찬바람이 부딪쳐 오는 것 같다. 파리 날씨에 익숙해진 탓인지도 모르겠다. 여섯 살에 처음 서울에 처음 왔을 때의 첫 느낌도 추위였다. 서울에서 6년을 지내고 파리로 돌아가 5년만에 다시 왔는데도 여전히 그 첫 느낌은 추위. 이래저래 서울은 추운 도시로 각인된 모양이었다.

입국절차는5년 전 출국할 때 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출국할 때 한국 여권으로 출국했는데 이번에 가지고 나온 여권이 프랑스 여권이라 뭔가 엉킨 모양이었다. 투어 기간 내내 프랑스 여권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실랑이를 하고 난 다음에야 간신히 입국했고, 설상가상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 수화물을 한참 기다려야 했다. 몸의 진이 다 빠진 것 같았다.

하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입국장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지네트는 실눈을 뜨고 손을 들어 쏟아지는 불빛을 가렸다.

대체 이 사람들은 자신의 무엇에 대해 이렇게 관심이 많은 것인지 궁금했다. 이들 중 자신의 연주를 제대로 끝까지 들어본 사람은 얼마나 될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지네트가 이렇게 인기가 많은 줄 몰랐습니다.”

주렁주렁 짐들을 들고 나오는 스탭들에게 이거 저거 지시하던 에이전트 아고스티니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지네트가 간단히 대답했다.

“인기가 아니라 흥미겠죠.”

“한국 사람들이 음악에 흥미가 많은가요?”

“음악이 아니라 제 출생에 흥미가 많은 거죠.”

“출생이요?”

“D그룹 오너의 장녀. 그런데 혼외자. 오너의 재혼. 그리고 곧 태어날 정실 자식.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아, 그나저나 이 플래시 빛 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불빛 한 번 반짝일 때 마다 영혼에 얼룩이 생기는 것 같네요.”

“자, 지네트. 이리로.”

아고스티니가 마치 보디가드처럼 불빛을 몸으로 막으며 지네트를 준비된 책상 앞으로 안내했다.

“기자회견이라니. 이게 무슨 호들갑인지 모르겠어요.”

지네트의 얼굴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즐거움과 전혀 상관 없는 웃음이었다.

자리에 앉자 마자 질문이 쏟아졌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떠들어 대는 통에 안 그래도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은 지네트는 한 마디도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기자들도 어느 정도 사태를 파악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음을 가라 앉히고 그들 나름의 순서에 따라 질문을 시작했다.

“지네트. 순회공연 성공을 축하드립니다.”

먼저 중년 정도로 보이는 기자가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지네트도 방긋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고마워요.”

외교적인 발언과 포즈에 익숙한 지네트는 방금 전의 짜증스러운 마음을 얼굴에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태어난 지 열 여섯 해 밖에 안되었지만 온 세계를 돌며 연주한 경력이 이미3년차. 관록이 붙을 만큼 붙은 상태였다.

그 중년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이번 투어에서 유독 파가니니를 고집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아, 제가 고집했었나요?”

“프로그램이 거의 파가니니로 채워졌더라고요. 협주도 독주도.”

“고집한 건 아니고, 그냥 파가니니가 좋아서요. 올해는 파가니니다 이렇게 정했죠.”

우문현답. 지네트는 도대체 왜 이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 아니 왜 이런 걸 묻는지 짐작은 갔지만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요즘 다른 곡을 거의 연주 안하시는 경향이 있어서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는 어른이 아니니까요. 저, 아직 성장중인 연주자 아닌가요? 학년 올라가면 공부하는 내용도 달라지는 거죠. 올해는 파가니니 학년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네요.”

이번에는 비교적 젊은 기자가 쓱 끼어들었다.

“성장이라는 말씀이 나온 김에, 기교적인 파가니니 곡만 집착하지 말고 깊이 있는 곡을 연주해야 성장할 수 있다는 말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네트의 눈썹이 살짝 가운데로 모였다.

“아니, 누가 그 따위 말을 하나요? 그 분들은 제 연주를 제대로 안 들으셨나봐요. 제가 연주한 게 이번 투어 뿐이 아닐텐데요? 작년에도 했고, 제 작년에도 했고. 그땐 파가니니가 아니었죠. 이번이 파가니니일 뿐. 내년엔 또 다른 레파토리가 나오겠죠. 제 레파토리는 다른 분들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히 넓답니다. 설령 파가니니에 집착한다 쳐도, 그게 왜 나쁘죠? 파가니니를 기교 위주의 무슨 쇼 바이올린 음악처럼 생각하신다면 그건 정말 슬픈 오해랍니다. 파가니니 음악만큼 정서가 깊고 풍부하고, 아름다운 음악은 다시 찾기 힘들어요. 기교를 재연하는데 급급해 음악이 아니라 곡예처럼 풀어내는 연주자가 있긴 하지만, 그건 그 사람 실력 탓이고. 저도 그랬을 것이라고 단정 짓지는 말아주세요.”

순간 지네트는 ‘곡예처럼’이라는 말이 실수였음을 깨닫고 표정이 잠깐 일그러졌다. 아니나 다를까 거만하게 생긴 다른 기자가 끼어들어 거드름을 부리며 말했다.

“그 말씀은 자칫 잘못하면 지네트가 다른 연주자를 무시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겠는데요? ‘곡예처럼’ 파가니니를 연주하는 누군가를.”

“글쎄요? 전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닌데? 이 말 듣고 그렇게 오해하는 연주자라면 오히려 자신이 그 정도 수준이라고 인정하는 것 아닐까요? 지금 누굴 거론하고 싶은지는 알겠지만, 전 그 사람을 두고 말하지 않았어요. 이미 음악계를 떠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저하고는 가까운 친구이기도 하고. 멋대로 싸움 붙이지 마세요.”

당돌한 발언에 회견장이 잠시 썰렁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기자들은 다시 직업 정신을 발휘하여 질문공세를 재개했다.

“강소정 양은 그 동안 프랑스에서 활동하셨고, 이미 세계를 무대로 연주하시는 데 이번에는 꽤 오래 머물 예정으로 귀국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동기가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강소정이라.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네요.”

지네트가 가볍게 웃었다.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이 이름을 거론하는 까닭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지네트라는 이름으로는 D그룹과 연결이 잘 되지 않을테니. 강씨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겠지.

얼마 전 아버지가 결혼한 것 때문에 기자들은 신이 났다. 아버지가 지네트보다10살 밖에 많지 않은 젊은 부인 사이에 자녀라도 출산하게 되면 혼외자에 불과한 지네트의 입지는 줄어들 것이고, 기자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생기는 것이다.

저 기자는 그 때문에 지네트가 한국에 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다. 미리 후계 구도에서 유리한 자리를 잡기 위해. 하지만 지네트에게는 아무 관심 없는 이야기였다.

지네트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특별한 동기라. 네, 물론 있어요.”

“뭘까요? 그게?”

“디누를 만나러 왔어요.”

“혹시 D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기 위한 귀국은 아닙니까?”

지네트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D그룹이랑 제가 무슨 상관이 있죠? 설사 상관 있다고 해도 관심 없어요. 전 바이올린으로 세계 최고예요. 세계 78위 기업 따위에는 아무 관심 없어요. 한국에 온 목적은 오직 디누 뿐이에요. 디누를 만나는 것 외에는 아무 관심 없어요.”

“만나고 싶은 이유라도?”

“당연한 것 아닌가요? 같이 연주 하려고요.”

“디누와 약속이 되어 있습니까?”

“아뇨. 디누와는 일면식도 없어요. 연락한 적도 없고. 미우와는 친분이 있지만 슬프게도 미우가 전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 그렇다고 아녜스한테 소개시켜 달라 하기도 어색하고. 네, 그럴 상황이 아니네요.”

이번에는 좀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디누에 대해서는 거품이라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지네트 눈에 영리해 보이는 20대 후반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거품이라뇨?”

영리해 보이는 여성이 말을 이었다.

“디누가 미우와 아녜스의 후광을 입었을 뿐이라는 거죠.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굳이 만나시겠습니까?”

“글쎄요. 그건 여기서 이러니 저러니 할 이야긴 아닌 것 같네요. 만나 보고, 연주를 들어보는 수 밖에. 디누가 주저 앉아 있다면 일으켜 세우고, 멀쩡하다면 날개를 달아주죠. 그리고, 음, 아까 뭐라고 하셨죠?”

“거품.”

“아, 네, 거품.”

갑자기 지네트의 눈동자가 시리우스처럼 반짝였다. 그 반짝이는 눈빛으로 지네트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직접 들어 보고 만약 거품이라면 그냥 터뜨려줄 생각입니다. 아주 철저하게. 다시는 감히 부풀어 오를 생각도 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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