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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청을 찔렀다.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아오는 회초리. 손등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
나경은 손에 쥐고 있던 활을 놓칠 뻔했다.
“최나경! 너 또 왜 그래?”
“또 뭘요?”
“연주가 왜 그 모양이야?”
“원래 이 모양이니까요.”
“뭐? 다시 말해 봐.”
차선생의 금속 안경테가 매섭게 반짝였다. 그 기세에 눌려 바짝 치켜 떴던 나경의 눈초리도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너무 재미없고 졸려요. 이 음악은."
“뭐? 재미? 어머, 뭐래? 내가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너, 다시 말해봐.”
“재미없다고요.”
“얘 좀 봐. 팔자 늘어진 소리하고 있어. 세상에 공부가 재미있어서 하는 애가 어디 있니? 넌 이게 공부야. 공부. 바흐 무반주 소나타. 이게 딴 애들 같으면 국영수라고 국영수. 국영수가 재미 있어서 공부한다는 애들 봤어? 전교 1등 하는 애들도 안 그러더라.”
“그래도 꼭 이 곡이라야 해요?”
“당연하지. 내가 백 프로 장담하는데 이거, 대입 실기곡에 무조건 나와. 그러니까 지금부터 미리 미리 2년 연습해야 해. 그래야 그때 가서 잘 한다고. 네 실력에 과제곡 발표된 다음 연습하면 어림도 없어. 미리 찍어서2년간 죽어라 연습해도 될까 말까야. 심사위원들이 잘 보는 포인트만 딱딱 강조해서. 바흐1번, 3번. 모차르트3번 이 세 개만 딱 찍어서.”
김 선생이 회초리로 보면대를 마구 두드려 가며 침을 튀겼다.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자 헛소리 집어치우고 다시 연습하자. 너 도대체 언제까지 아다지오에서 헤매고 있을 거야? 푸가하고 시칠리아나는 아예 손도 못 대고 있잖아?”
“제 취향과 바흐가 안 맞는 걸 어떡해요.”
“어머머머? 뭐? 취향? 얘가 뭘 잘못 먹었나?”
차선생의 입이 동물원 하마처럼 쩍 벌어졌다.
“왜요? 난 취향도 없어요?”
“갈수록 태산이네. 야. 네가 무슨 예술가야? 넌 입시생이야. 입시생! 제정신 있으면 성적표 한번 보고 생각이란 걸 좀 하고 말해라. 네가 그나마 이거라도 안 하면 그 성적 가지고 갈 수 있는 대학이 하나라도 있냐? 못 살아. 못 살아. 네 엄마만 아니었으면 너 레슨 하지도 않았어. 나도 내 명성이 있고 커리어가 있다고. 안될 애들 받으면 나도 손해야. 그나마 네 엄마 얼굴을 봐서 서울대, 연대, 이대는 힘들어도 어디 중위권 대학이라도 집어넣으려고 이렇게 고생하는데, 뭐가 무슨 취향이 어쩌고 저째? 이 보세요 최나경씨. 그렇게 취향 찾고 취향 따라 음악 할 거면 팝을 하던가 록을 하던가 해라. 그건 못하겠지?”
“그럼 실용음악과 가면 되죠.”
“야! 그랬다간 네 엄마 한테 너도 죽고 나도 죽어. 그러니까 잡소리 집어치우고 연습하란 말이야. 알았어?”
“........”
“알았냐니까?”
“예.”
“알았으면 다시 연습 시작해! 네 말마따나 나도 그 놈의 아다지오 지겨워 죽겠으니 이번엔 시칠리아나 좀 해 보자.”
“예.”
나경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바이올린을 턱에 끼웠다.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 1번의 시칠리아나가 흘러나왔다. 이미 소리에 졸립고 피곤하고 따분한 표정이 숨김 없이 드러나 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틀리지는 않고 끝까지 연주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마침내 1시간에 5만 원씩 하는 지겹고도 지겨운 레슨이 끝났다. 나경은 축 쳐진 어깨로 인사도 하느둥 마는둥 차선생 스튜디오에서 나왔다.
“네 성적표 좀 봐라.”
차선생의 앙칼진 목소리가 계속 꺼억꺼억 거리는 시칠리아나와 함께 머릿속을 맴돌고 다니더니 곧 성적표로 바뀌었다.
국어 60점, 수학 30점, 영어 50점.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어차피 따져봐야 의미 없다. 그나마 나름 전공이라고 음악은 90점, 그리고 체육이 95점. 그 밖에는 다 어차피 50점 안팎에서 맴돌고 있을 뿐. 석차는 더 처참해서 678명중 620등을 넘나들고 있다. 내신 등급도 아무 의미가 없다.
“어떻게 유선이 점수하고 네 내신 퍼센트가 비슷하냐?”
성적표를 볼 때 마다 어머니는 이런 말을 던졌다. 형식은 우스개지만 내용은 독을 잔뜩 바른 비수였다. 하지만 나경은 이런 말을 하도 자주 들어서 듣고도 무덤덤 했다.
그래도 그나마 제일 잘하는 게 음악이었다.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다. 노래 부르기도 좋아하고, 잘 하기도 했고, 기타도 제법 잘 쳤다. 엄마가 바이올린 교수인 덕에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이것 역시 꽤 좋아했고 썩 괜찮게 했다.
차선생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나경이 시험 쳐서 들어갈 수 있는 대학은 서울 반경 100킬로미터 이내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바이올린이라면 그래도 서울 안에 있는 그런대로 이름 들어 본 대학, 택시 기사한테 “OO 대학 갑시다.”라고 하면”그게 어디죠?”하고 되묻지 않아도 되는 대학에 들어갈 실력은 되니까.
하지만 어머니 체면과 욕심에 서울 안에 있는 이름 좀 들어 본 대학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어머니는 나경이 서울대, 연세대 못 가는 건 마지 못해 인정했지만 이화여대가 목표, 경희대가 심리적 저항선이었다.
“뭐? 그랬다간 내 딸 아니야.”
“혹시 세종대라도 가면 보내 줄 거야?”
나경이 넌지시 던져 보았을 때 단 칼에 자르고 돌아온 대답이었다. 아무리 음대라도 학력고사, 내신 다 들어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경은 경희대 이상 레벨에서 자신이 실기 점수만으로 다른 수험생을 뒤집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학력고사, 내신에서 그 정도로 바닥을 깔았으면 아마 실기 만점을 받기 전에는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나경은 여느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클래식 보다 팝을 훨씬 좋아했다. 노래도 예쁘게 잘 불렀고, 기타도 잘 쳤고, 기타 코드에 맞춰 즉석에서 노래 슬슬 만들어내는 재주도 있었다. 무엇보다 외모에 자신 있었다. 그래서 실용음악과 가서 싱어 송 라이터 되겠다고 했지만, 역시나 똑 같은 대답을 들었다.
“내 딸 아니야.”
그리고 날마다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 1번, 3번, 그리고 모차르트 협주곡 3번만 연습해야 했다. 원래 모차르트 협주곡은 좋아했던 곡이지만 날마다 야단 맞아가며 연습하다 보니, 이제는 인트로의 첫 코드만 들어도 소름 끼칠 지경이 되었다.
차선생 스튜디오가 있는 건물을 나서니 이미 가을의 문턱을 넘어선 쓸쓸한 바람이 서늘했다. 저녁 여섯 시였지만 11월의 짧은 태양은 이미 넘어간지 오래, 그냥 깜깜했다.
쓸쓸한 바람에 스커트가 위아래로 날렵한 춤을 추었고, 그때마다 걸음을 재촉하는 날씬한 다리 윤곽이 살짝 드러났다. 그렇게 각선미를 살짝 자랑하며 재촉하던 나경의 걸음이 멈추었다.
쇼윈도와 출입문을 녹색 비닐로 단단하게 붙여 안이 전혀 보이지 않게 만들어 놓은 가게 앞이었다. 간판에는 ‘티파니 오락실’이라는 굵은 고딕체 글씨가 박혀 있고, 출입문 앞에는 역시 같은 이름의 입간판이 서 있었는데, 엉뚱하게 오락실 다음 줄에 ‘두뇌 계발’이라는 빨간 페인트 글자가 덧붙여져 있었다.
나경은 녹색 비닐을 여러 겹 붙여 놓은 문을 밀었다. 잠깐 문이 열린 틈으로 뿅뿅 삑삑 거리는 요란한 전자 음향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나경은 온갖 전자 음향이 천둥처럼 고막을 울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케이드 게임기 스무 대가 늘어서 있는 큰 오락실이었다. 게임기 앞에는 거의 대부분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앉아 조이스틱과 버튼으로 대량 살상을 자행하고 있었다. 용돈이 모자라는듯 등 뒤에 서서 남이 하는 게임을 침 흘리며 부럽게 바라보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온통 혼이 빠져 있는 수십명의 청소년들 중 여학생은 나경 뿐이었다.
나경은 전자오락기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다가 ‘1943’이라는 게임에 동전을 집어넣었다. 미드웨이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 글자가 나온 다음 일본 전투기들이 나타났다. 나경은 버튼을 마구 두드리며 일본 전투기들을 격추시키기 시작했다.
여학생이, 그것도 한 눈에도 귀티나게 생긴 예쁜 여학생이 게임하는 것이 신기했는지 구경꾼들이 꼬였다. 나경은 이미 강남 일대에서 퀸카로 소문났기 때문에 누군지 알아본 남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그 중 불량기 있어 보이는 남학생 둘이 게임기에 손을 턱 얹으며 추근덕 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경은 게임에 집중했다. 마침내 전함 야마토를 격침시켜 게임을 클리어 하고 난 다음에야 벌떡 일어나 다짜고짜 그중 한 놈의 목을 끌어안았다. 정작 그 놈이 놀랐다. 심지어 나경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기까지 했다.
나경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놀라긴. 너 순진한 애 아닌 거 아는데? 따라와. 11시까지 같이 놀아줄 머스매가 필요해.”
나경이 그놈의 손을 잡고 오락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야. 어, 어디로 가려고?”
“아무데나. 마음 내키는 대로!”
나경이 오페라 부파의 레시타티브처럼 가락을 붙여가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