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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교사 May 03. 2020

교사는 아빠가 될 수 있을까?

학교아빠라는 이상한 명칭으로 책도 내고 나름 강사로 꽤 영업도 했던 어느 교사가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있다. 일단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했는지는 내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조사 당국이 알아서 하게 두자. 정말 그 사람이 뭘 했는지 궁금해 하며 초등생 팬티로 검색어를 채우는 수많은 한남들의 행렬을 보니 더욱 기가 막히다. 호기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이미 2차가해다.


하지만 저 '학교아빠'라는 말 만큼은 좀 따져봐야겠다. 집에서도 아빠 때문에 짜증나는데 학교에서도 아빠가 있다면 짜증날 학생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 아빠라는 말이 담고 있는 가부장제 냄새, 어린이들을 자신의 전적인 통제아래 두겠다는 욕망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하고.


딱 잘라 말하겠다. 학교에는 아빠가 필요없다. 교사는 아빠 노릇을 하라고 월급 받는 사람이 아니라 성장과 발달을 도우라고 한 마디로 잘 가르치라고 월급 받는 사람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교사를 아빠처럼 느끼는 학생이 있을수는 있다. 그걸  "나는 너의 아빠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런 마음은 옳지 않아." 하고 억지로 딱 자를 것 까지는 없지만, 교사가 먼저 나서서 "학교 아빠"를 운운하면 그건 아무리 봐도 순수하지 못한 저의가 있는 표현이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그루밍 폭력'의 혐의를 받아도 할 말이 없다. 아빠라는 말은 이 사회에서 다만 친밀감만의 표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배의 표시이며 통제의 표시이며 소유의 표시다.  


물론 나 역시 남자고 또 적지 않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다 보니 "마치 아빠같은" 역할을 자의반 타의반 맡게 된 경우가 몇 차례 있다. 특히 학생과 나이 차이가 20년 -30년 정도 나던 시기에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아버지가 제 몫을 못하고 있거나, 애석하게도 얼마 전에 사별했거나 등 사정은 다양했다. 상당히 오랫동안 아버지, 나아가 남자 어른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담고 살아 온 학생도 있고, 남자 어른의 결핍을 채워줄  누군가를  찾는 경우도 있었고,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어버린 허허로운 마음을 달래줄 일시적인 대체재를 찾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도덕적 원칙이나 삶의 굳건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긍정적 의미의 가부장을 필요로 하는 아이도 있었고, 다만 다정하게 감싸주고 버팀막이 되어주는 그런 든든한 어른을 필요로 하는 아이도 있었으며, 자신의 지적인 욕구를 채워주고 격려해줄 수준높은 지성을 갖춘 어른이 가족 중에 없어서 실망한 아이도 있었다. 어느 날 철들고 보니 아빠는 나보다도 멍청했다 뭐 이런 충격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렇게 다양한 역할을 그때 그때 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 아이들만의 특별한 사람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해 준것이라고는 주로 각자 알아서 그렇게 생각하고 여기게끔 둔 것이었다. 내가 먼저  "아빠로서" 뭔가 해주마 하고 나선 적이 없었지만 어느 시점에 "아, 이 아이가 나한테 교사 이상의 애착을 가지고 있구나"하고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개는 자연스럽게 두었다. 의도적으로 냉정하게 구는 것은 잔인하고, 그걸 또 너무 받아주면 나중에 졸업할때 힘들어 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두면 그 아이들은 마치 원숭이가 부직포 인형을 자기 어미로 삼았다는 해리 할로우의 실험처럼 지들이 알아서 나를 자기가 원하는대로 생각하며 갈증들을 해소한다. 그게 바로 교사가 아빠가 되는 거의 유일한 경우다. "나는 아빠야"하고 먼저 나서는게 아니라 어느날 돌아보니 "어, 이 녀석이 날 부직포 아빠로 삼았구나."하고 느끼는. 교사는 아빠가 될 필요도 없고, 아빠가 되고자 해서도 안된다. 부지 불식간에 누군가에게 아빠같은 존재가 될 수는 있지만, 그걸 즐겨서도 안되고 기대해서도 안된다. 그건 어디까지나  옵션에도 없는 부수적인 효과인 것이다.


그 이상은 무리다. 아니 무리를 넘어 불순한 권력욕이다. 그래서 내가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성폭력을 행사한 유력인사가 "딸 같아서 귀여워서 그랬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도대체 귀여우면 어째서 손이 성감대 혹은 성적인 연상을 일으키는 부위로 가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정말로 딸같이 느껴진다면 아마 제일 자주 느끼는 감정은 "아유 귀여워 깜찍해 깨물어 주고싶어"가 아니라 "아이고, 저런, 이를 어쩌지"였을 것이다. 이 둘 사이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바보가 아니면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무릇 모든 사랑은 측은지심에서 비롯된다. 그게 아니라면 그것은 지배욕이며 소유욕이다. 그리고 아빠라는 단어는 그 역사성 때문이라도 지배욕, 소유욕과 분리되지 않는다. 친 아빠조차 그 점을 명심하고 경계해야 할텐데, 무슨 학교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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