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았어…. 아니, 괜찮아….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뭐. 안녕. 나중에 봐.”
오석이 맥없이 수화기를 내렸다. 수화기가 마치 커다란 아령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수화기를 내려 놓으니 왼손에 들려 있는 종이 두 장이 자신의 비참함을 호소하듯 덜렁거렸다. 이제 아무 소용 없게 된 음악회 티켓들.
벌써 세 번째 수현이 데이트를 거절했다. 데이트 정도가 아니다. 그 목포-부산-경주 여행 이후 오석은 수현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처음에는 여행 갔다 오느라 밀린 아르바이트가 많다고 했다. 두번째는 밝히고 싶지 않은 신체 컨디션 때문이라고 했다. 오석은 이를 생리통으로 해석했다. 이번에는 고3 올라가는 동생 공부 봐줘야 한다고 했다.
거절당하면 거절 당할수록 그리움이 제곱으로 세제곱으로 커졌다. 남은 방학 내내 수현이를 못 볼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개학이 왔으면 싶을 정도였다. 학생이 개학을 다 기다릴 정도의 그리움이라니.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웠던 대학교 첫 학기를 수현이 아니었으면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정식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사이를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수현은 이렇게 말했다.
“꼭 말로 해야 알아듣는 관계야?”
학교에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함께 하고, 늘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다녔고, 앉을 때는 어깨를 기대고, 머리카락과 뺨을 쓰다듬고 때때로 마주보고 끌어안기도 하는 남녀 사이를 단지 친구라고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수현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만남을 거부하고 있다. 대체 왜? 처음에는 무심결에 수현에게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싶어 스스로 자신의 과거 행적을 검열했던 오석은 이제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화가 나니 탁자에 놓인 음악회 티켓이 살랑살랑 흔들리며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자기들을 그냥 버려두지 말라고, 누구라도 데리고 가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문득 멀어지는 여자의 마음을 다시 잡기 위해 질투를 유발하는 방법이 있다는 어디서 주워들은 말이 떠올랐다. 오석은 이런 생각까지 떠오른다는 게 정말 못마땅하지만 이런 유치한 짓이라도 해야 답답하다 못해 끓어 터질 것 같은 가슴이 달래질 것 같았다.
마침내 오석은 못마땅함의 장벽을 넘어 “그렇다면 누구를 이용해서 질투를 유발할까?”까지 생각을 진전시켜버렸다.
수현이 사사건건 도끼눈을 뜨고 보는 장하영?
바로 기각했다. 하영은 이런 식으로 부르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웠다. 너무 예쁘고, 너무 똑똑해서 살짝 두렵기까지 하고, 자존심이 엄청 강하기 때문에 자신이 수현이 땜빵으로 불려왔다는 것을 만에 하나 알아챈다면(영리한 아이라 금방 알아챌 것이다) 절교를 불사할 것이다. 오석은 하영이라는 좋은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
그럼 주민경? 그래. 민경이를 부르자. 민경은 마침 이런 상황에 부르기 딱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으니 만나기도 쉽고, 당장 연락해서 오늘 저녁에 보자고 해도 부담이 없었다.
무엇보다 민경은 성격이 캐주얼 했다. 있는 집 딸이라 그런지 성격이 꼬이거나 감추는 게 없고 뭐든지 가볍게 즐길 줄 알았다. 가볍게 하루저녁 만나 놀아도 재미있기만 하다면 그게 누구 땜빵이든 아니든 거리끼기 않을 것이다.
“수현이가 시간이 없다고 해서 티켓이 남았어 대타 뛰어 줘.” 이렇게 말해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오히려 “오호, 땡 잡았다. 운이 좋은 걸?” 이렇게 반응할 것이다.
무엇보다 민경은 수현과 친했다. 하영은 수현이 노골적으로싫어하고 거리를 두기 때문에 거의 교류가 없었지만 민경과 수현은 거의 날마다 통화하고 종종 만나는 사이였다. 그러니 오석이 민경과 자주 만나면 틀림없이 수현에게도 자극이 될 것이다.
오석은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자신을 경멸하면서도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통화음이 세번 울리기도 전에 민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나 오석이야.”
“어머, 오석아. 반가워. 방학 잘 지내지?”
민경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반가워했다.
“응. 너도 잘 지내지?”
“음. 글쎄? 좀 심심하긴 한데.”
“아, 마침 잘됐다. 음악회 표 두 장 있는데,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하하하. 수현이한테 뭔 일 생겼어? 좋아. 내가 수현이 대타 뛰어 줄게. 대신 저녁까지 사는 거다?”
“좋아.”
“그럼 다섯시에 선릉역에서 봐. 히히. 땡잡았다.”
딱 오석이 예상한 그대로의 캐주얼한 반응이었다. 평소 수현과 자주 이야기하는 사이이다 보니 대번에 상황을 파악했고, 그렇다고 딱히 기분 나빠 하지도 않았다.
기분이 상큼해진 오석은 거울을 몇 번씩 보며 최대한 멋지게 차려 입었다. 연분홍색 와이셔츠에 하얀 바탕에 연한 연두 줄무늬가 들어간 마직 블레이져를 걸치고 갈색 옥스포드 로퍼를 신고 집을 나섰다.
오석의 집에서 선릉역 까지는 북쪽 방향으로 걸어서 10분 거리 민경네 집에서는 남쪽 방향으로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그래도 굳이 따지면 민경네가 조금 더 가깝다.
아니나 다를까 선릉역 만남의 장소라는 팻말 아래 설치된 원형 벤치에 민경이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민경은 오석이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아니 지나치게 캐주얼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Freiheit und Liebe>라고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적혀 있는 티셔츠를 입고 베이지 색 짧은 바지를 입고 하얀색 샌들을 신고 있었는데 다리며 발등이 워낙 하얀 편이라 마치 조리를 신은 것처럼 보였다.
누가 보면 해수욕장에서 막 돌아온 것 같은 모양이었다. 블레이져를 차려 입은 오석이 다 민망해질 정도였다.
평소에는 비싸고 화려한 옷들 잘 입고 다니더니 하필 그런 차림이 필요할 때는 왜 이러고 나타나는지 오석은 살짝 실망했다. 그래도 명색이 이성 친구인데 조금은 긴장감 있게 차려서 나오길 기대했던 것이다.
“웬일이야? 네가 나한테 데이트 신청을 다 하고?”
오석이 실망하거나 말거나 민경이 태연하게 말했다.
“아, 그게.”
“괜찮아. 너 요즘 수현이랑 조금 삐걱대는 거 다 아니까. 걱정 마. 내가 중간에서 잘 말해서 다시 붙여 줄게. 그런데 솔직히 말해 봐. 수현이가 못 간다 그러고 나서 나한테 몇 번째로 전화 했어? 장하영 다음이지?”
“아니, 바로 너한테 연락했어.”
“왜 나야?”
“네가 제일 가까운데 살잖아?”
“에이, 빈말이라도 좀 다르게 대답해 주면 어디 덧나니?”
“미안해.”
“거기서 미안은 또 왜 나오니? 하여간.”
“어쨌든. 가자.”
“그래. 난 대타든 뭐든 공짜는 절대 사양 안하니까.”
민경이 벤치에서 일어나면서 지갑에서 지하철 정기권을 꺼내 들었다.
2호선 선릉역에서 교대역 까지는 빈자리가 없었는데, 3호선 고속터미널 역에서부터 빈자리가 하나 생겼다. 오석은 얼른 민경을 그 자리에 앉혔다. 그러자 민경의 손톱과 발톱이 연분홍색으로 발갛게 물들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봉숭아 물 들여봤어. 그리고 투명 매니큐어로 마무리. 예쁘지?”
민경이 하얀 왼손과 오른발을 차례 차례 들어 보였다. 하얀 손, 하얀 발, 그리고 봉숭아 꽃물 색. 오석은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몸이 붕붕 뜨고 지금 타고 가는 것이 지하철이 아니라 은하철도 999라도 되는 것 같았다. 편하게 생각하던 민경이라 가볍게 불렀는데 전혀 편하지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 버렸다.
그들은 경복궁 역에 내렸다.
“적당히 빨리 왔어. 여섯 시 밖에 안되었네?”
민경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음악회 시간은 일곱 시 반. 시간이 듬뿍 남았다. 애초에 시간을 듬뿍 남겨두고 만난 것이긴 했다.
오석은 오른쪽에 민경을 두고 경복궁역에서 현대상선 빌딩을 지나 세종문화회관으로 가는 길을 나란히 걸었다. 수현이라면 팔짱을 꼈을 것이고, 하영이라면 손등이 부딪치는 가까운 거리에서 걸었을테지만 민경은 30센티 정도 거리를 두고 걸었다. 헐렁한 티셔츠, 반바지, 샌들 차림의 민경과 타이만 매지 않았을 뿐 거의 정장이나 다름없는 차림의 오석이 나란히 걷는 모습이 유리창에 반사되어 보였다.
“저녁 사주기로 했지?”
민경이 깡총거리며 말했다.
오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경이가 까르르 웃었다. 민경은 좀체 웃지 않고 어쩌다 웃더라도 소리 내어 웃지 않는 수현과 달리 너무 쉽게 웃고 늘 소리 내어 웃었다.
“흐흐. 그럼 뭘 먹을까? 오석이 털어먹을 기회 자주 안 오니까 탈탈 털어야지? 우리 칼부림하러 가자.”
“칼부림? 아, 스테이크 같은 거?”
“난 돈까스 말한 건데, 스테이크로 올라갔네? 이건 내 책임 아니다. 네가 자초한 거야.”
“응. 내가 아는 데 있어.”
오석은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자리 잡은 ‘볼레로’란 이름의 레스토랑으로 민경을 안내했다.
사실 오석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곳은 웬디스였는데 칼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이상 패스트 푸드는 틀렸고, 스테이크라는 말을 먼저 꺼낸 이상 엄청난 지출이 불가피했다.
2층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테이블들 사이에 어깨 높이의 칸막이가 쳐진 조금 어두운 홀이 열렸다. 그 중 입구와 가장 가까운 테이블 앞에 웨이터가 앉아있었다. 검정 바지, 하얀 셔츠에 검정 조끼와 나비 넥타이 차림인데 몹시 무료한 표정이었다.
그들이 들어서자 웨이터가 벌떡 일어나서 민망할 정도로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맞이했다. 그리고 민경이 앉기 편하게 의자까지 뒤로 빼 주었다. 민경은 티셔츠 반바지 차림으로도 그런 접대를 자연스럽게 받았다. 민경에게 이 정도 레스토랑은 캐주얼인 것이다.
의자에 앉자 반바지 아래로 쭉 뻗어 내린 민경의 하얀 다리가 오석의 눈에 확 들어왔다. 순간 오석의 등골에서 섬찟한 전율이 흘렀다. 오석은 그런 자신이 너무 한심해 테이블에 얼굴을 파묻고 싶었다.
온갖 이유를 다 대면서 문학을 하겠네, 예술을 하겠네 이러면서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에서 빠졌다. 그래놓고 그 역사의 물결 같던 1987년의 여름, 오석이 한 일이 수현과 데이트, 남들 안 치는 시험 쳐서 높은 학점 예약한 것, 하영과 15센티 거리의 묘한 관계, 그리고 만나주지 않는 수현에게 치졸한 앙갚음을 하기 위해 민경을 불러낸 뒤 다리나 훔쳐보는 것이라니.
비겁하다. 더럽다. 오석은 감은 눈을 차마 뜰 수가 없었다. 미래의 자녀가 실망하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오석아! 뭐해?”
민경의 목소리에 할 수 없이 눈을 떴다.
차분하고 편안한 수현의 목소리, 화려한 외모와 달리 걸걸하고 씩씩한 하영의 목소리와 전혀 다른 박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높고 발랄한 민경의 목소리.
“응?”
“무슨 생각해?”
“아니, 그냥.”
“뭐야? 기껏 불러 놓고 눈이나 감고?”
“아니, 그냥. 우리 대학 들어와서 처음 만난 친군데, 의외로 자주 못 봤다 싶어서.”
생각지도 않은 말이 슬슬 나왔다. 그런데 그 말이 먹힌 모양이다. 민경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뭐, 이해해. 너 수현이랑 노느라 시간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너 나랑 첨 만났을 때 시인이나 소설가 될 거라 그랬던가?”
“작정한 건 아니지만, 그러고 싶다고는 했어.”
“문학이랑 음악 좋아한다 그랬고?”
“응.”
“지금도 그래?”
“응.”
“딱 잘 됐다. 그럼 오석아. 나 코치 좀 해 줘.”
“코치? 무슨 코치?”
“난 고등학교 때 공부만 하느라고 책도 별로 못 읽고, 음악이나 미술 같은 것도 별로 감상 못 했어. 그래서 이제 좀 시작해 보려는 데 뭐 아는 게 있어야지?”
민경이 수첩을 꺼내 들이 민다.
“여기 좀 적어줘.”
“뭘?”
“읽으면 좋을 책. 또 들었으면 하는 음악.”
“그건 좀 그래.”
“뭐가?”
“내가 다른 사람한테 뭘 추천하고 그럴 수준이 아니야.”
“좋아. 그럼, 추천하는 대신 지난 반년간 가장 흥미있게 읽은 책이랑 자주 들었던 클래식 음악이랑 적어봐. 그건 괜찮지?”
“그 정도라면 좋아. 받고 안 받고는 네 맘이고.”
오석은 펜을 들고 민경이 내민 수첩을 받았다. 이 수첩이 자기 혐오에서 벗어날 동아줄로 보였다. 이 자리가 자신을 외면하는 수현의 질투를 자극하기 위해 민경을 끌어들인 3류 멜로드라마가 대신 건전한 문화교류와 학습의 장으로 바뀐 것이다.
오석은 결사적으로 펜을 놀리며 민경의 수첩에 깨알같이 글씨를 적어 나갔다.
‘대폭군과 재판(베르너 베르겐그륀), 유럽의 교육(로맹 가리) 이거 정말 강력 추천, 부덴부르크 일가(토마스 만),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오스카 와일드)...........마술피리(모차르트), 현악사중주 로자문데(슈베르트), 발라드(쇼팽), 교향곡 13번 바비야르(쇼스타코비치)........’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오석이 마지막 줄에 공들여 정자체로 꼼꼼하게 적으며 말한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이야. 그리고 그 외에도 소개해 주고 싶은 작품들이 많지만 그건 나중에 천천히 소개해 줄게.”
“고마워.”
민경이 수첩을 접으며 활짝 웃었다.
“참, 민경아. 이건 너한테 주는 선물이야.”
오석은 가방에서 8절지 한 장을 꺼냈다.
“뭐야?”
“내가 쓴 시야.”
“와와! 지금 봐도 돼?”
“물론.”
민경이 경주 황남빵 봉투에 그려진 얼굴무늬 수막새 같은 표정을 지으며 종이를 펼쳤다.
그 종이에 적힌 것은 ‘悲歌’ 라는 상당히 긴 시라면 시였다. 제일 마지막 줄에는 나름 멋을 낸 내 서명과 지장이 빨갛게 액센트를 주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장은 왜 찍었어?”
“누가 알아? 나중에 내가 유명한 작가가 되면 소장가치 생길지? 그때 대비한 진품 증거야. 후후. 나 웃기지?”
“아니, 뭐 어때? 우린 아직 젊은데? 꿈은 클수록 좋은 거잖아? 그런데 미안해. 이건 받을 수 없어. 왜 그런지 알지?”
물론 오석은 민경이 왜 이렇게 말 하는지 알았다. 이 시는 수현이에게 선물하려고 쓴 거니까. 그런데 수현이 좀처럼 만날 기회를 주지 않아 계속 가지고 있던 것이니까.
“그래도 열심히 읽어는 볼게. 아니, 아니다. 돌려줘야 하니까 지금 읽어야겠다.”
민경이 오석이 시라고 주장하고 있는 글자 무더기를 읽느라 눈을 부릅떴다.
레스토랑 조명이 어두침침해서 그럴까? 시를 읽던 민경의 동그란 눈이 일자 모양으로 찌그러졌다. 괜히 불안해진 오석이 선수를 쳤다.
“굳이 안 읽어도 돼. 그냥 헛소린걸.”
“아니, 그렇지 않아. 그런데 너무 어려워. 뭔가 멋진 문장 같긴 한데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
“원관념을 최대한 감추고 비유하고 상징했거든. 시간 내서 차근차근 새겨 보면 떠오르게. 그런데 그건 내 희망 사항이고 아무래도 독자와의 소통에 실패한 것 같다.”
“깊은 뜻이 숨어 있다는 거지?”
“아니,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
“이거 어쩌니? 차근히 여러 번 두고 읽어야 하는데, 이렇게 읽어서 될 일은 아닌 것 같아.”
민경이 읽던 시를 돌려주었다. 오석이 시를 받으며 말했다.
“미안해. 괜히 귀찮게 해서.”
“그럼, 뭘로 갚을래?”
“갚다니?”
“나 귀찮게 했으니까, 나중에 정식으로 줘. 두고두고 읽을 수 있게. 음. 기왕이면 여러 편 모아서 시집 만들어서 주면 어때?”
이렇게 말해 놓고 민경이 어색하게 웃었다. 듣는 오석도 어색했다. 뭔가 엉뚱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주문 결정하셨습니까?”
아, 웨이터다. 웨이터가 이 어색한 상황에서 구세주가 되어주었다.
오석은 비후 까스를, 민경이는 폭찹을 주문했다.
민경이 다시 시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잠깐 읽었지만, 뭐랄까 릴케 아니면 노발리스 느낌이었어. 맞지?”
앗, 예리하다. 오석이 놀랐다. 이러면서 무슨 책 소개를 해달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도 일단 대답했다.
“맞아. 릴케를 너무 좋아해. 노발리스는 음, 미안해. 솔직히 한 번도 안 읽어봤어. 파란 꽃이라는 제목만 들어봤고.”
“그럼 릴케 말고 또 좋아하는 시인 있어?”
“하이네. 푸쉬킨.”
“낭만적이네? 그럼 우리나라 시인은?”
“그게 좀 그래. 그래도 서정주가 가장 시다운 시를 썼다고 봐.”
“김수영은?”
“표현력이 뛰어나지만 아름답지는 않아. 난 시는 일단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해. 아니 예뻐야 한다고.”
“꼭 그럴까? 미술로 치면 르노와르 뿐 아니라 쿠르베 역시 중요한 거 아닐까?”
“그건 그렇지만.”
오석은 살짝 말이 궁해졌다. 교양 없어서 추천해달라던 민경이 오히려 아는 것이 풍부해서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신나기도 했다.
이런 대화는 수현이와 나눌 수 없는 대화였다. 수현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싫어했고, 행여나 예술 쪽으로 관심을 기울이면 언짢은 표정을 짓곤 했으니까.
그렇게 그들은 두런두런 시와 그림, 그리고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국적 불명의 서양요리를 먹고, 레스토랑을 나와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했다.
티셔츠, 반바지, 샌들 차림으로 클래식 음악회도 어색해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들어가는 민경의 웃는 얼굴과 함께.
그런데 음악회가 실망스러웠다. 약속도 없이 갑자기 연락해 같이 오자고 한 민경에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나름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중견 피아니스트의 공연이었지만 오석의 귀에는 너무도 함량 미달이었다. 디누를 친구로 둔 귀 높이 탓인지 아니면 반향이 거의 없는 음향의 사막, 세종문화회관의 구조적 문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석의 귀에는 영 와 닿지 않는 연주였다.
하지만 연주가 마음에 안 들었다는 말을 하긴 어려웠다. 민경이 즐거워했기 때문이다. 특히 슈베르트 즉흥곡이 연주될 때는 거의 황홀한 표정마저 짓고 있었다.
여기다 대고 “연주 별로였어.” 이런다면 민경의 음악 소양을 깎아 내리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그러니 그저 같이 웃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세종문화회관 밖으로 나오니 길고 긴 여름 해도 완전히 사라지고 비교적 서늘한 밤공기가 그들을 기다렸다. 입추가 지나긴 지난 모양이다.
83번 버스 정류장에서 민경이가 억양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빠르고 얇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식사도 음악회도 다 즐거웠어.”
순간 오석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휴우. 다행이야.”
“다행? 그럼 걱정했어?”
“혹시 네가 음식은 형편없고, 연주는 엉망이었어 이런 말 할까봐.”
“무슨 걱정을 그렇게 사서 해? 하여간 걱정쟁이라니까. 나야 뭐 얻어먹고, 얻어듣는 건데 무조건 수지 맞는거 아냐? 나 괜한 비평질로 산통 깰 만큼 눈치 없는 여자 아니네요. 아 참.”
“뭐?”
“아직 안 늦었지?”
“응. 시간 좀 남아.”
그러자 민경이 오석의 블레이저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럼 버스 그만 기다리고 뭐 좀 마시고 가자. 맥주 어때?”
“나, 술 안 마시는데.”
“그럼 날도 더운데 셰이크나 마시고 갈래? 내가 낼게.”
“그건 좋아.”
결국 오석은 민경에게 끌려 어차피 처음부터 갈 생각이었던 웬디스로 갔다. 밀크 셰이크가 어찌나 농도가 짙은지 컵을 뒤집어도 쏟아지지 않을 것 같았다. 롯데리아 셰이크 보다 겨우 200원 비싸지만 내용물은 두배가 넘었다. 오석은 셰이크를 흘리지 않으려고 계속 빨대와 셰이크만 노려보았다.
여자와 같이 와서 컵만 노려보는 건 매너가 아니지 싶은 생각이 드는 찰나 아니나 다를까 민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웬지 기분이 별로인 것 같다?”
오석은 얼른 고개를 들고 웃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아니야. 왜? 그렇게 보여?”
“응. 뭔가 좀 억울한 표정. 내가 이렇게 입고 나와서 그래? 미안. 너가 갑자기 보자고 해서 챙겨 입을 시간이 없었어.”
“아니, 그건 아니고.”
“아까 보니까 커튼 콜 때 박수도 잘 안치던데. 혹시 연주가 마음에 안들었어?”
이런. 오석은 도대체 여자애들은 어떻게 속 마음을 금방 읽어버리는지 신기했다. 그냥 인정하는 수 밖에.
“사실 기대한만큼은 아니었어. 정우 생각만 나더라. 정우라면 훨씬 잘 쳤을텐데 이런 생각하고 있었어.”
“아, 디누 말하는 거지?”
오석은 민경이 너무 빨리 반응하자 바로 후회했다. 이렇게 되면 이 자리에 없는 정우가 또 주인공이 되고 만다. 아니나 다를까 단번에 화제가 바뀌었다.
”애들이 너 디누랑 친구라던데 진짜야?”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언제부터?”
“국민학교 때 부터.”
“와, 멋지다. 나 디누 팬인데…. 혹시 소개시켜 줄 수 있니?”
“힘들 거야.”
“왜? 너무 바빠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다. 친구라며?”
“싸웠어.”
“남자애들 원래 친구끼리 잘 싸우잖아? 그러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만나고.”
”이번엔 달라. 그 녀석이 아직도 날 친구라고 생각할지 잘 모르겠어.”
“어머, 그럼 안되는데. 다시 한번 잘 얘기해 봐. 친구라는게 그렇게 쉽게 깨지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근데 오석아.”
“응?”
“친구 얘기 나와서 말인데, 너 과 애들하고 좀 어울려 보는 게 어때?”
“무슨 말이야?”
“너랑 수현이랑 둘이서 너무 따로 노는 거 같아서. 나야 뭐, 같은 동네 살고, 이렇게 동네에서 종종 만나기도 하고 그래서 너 착한 거 아는데, 딴 애들은 안 그렇거든. 남은 3년 반 계속 그런 식으로 다닐거야?”
“그건….”
오석은 당연히 그런 식으로 3년 반을 버틸 마음은 아니었다. 지난 두 달은 수현 덕분에 외로운 줄 모르고 다녔지만, 요즘 수현의 태도로 봐서는 오래 못 갈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끝장 났는데 오석 혼자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석은 비록 연애 경험은 없어도 소설로 간접체험은 많이 해 봤다. 연애라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얼마나 사소하게 깨지기 쉬운지 잘 알고 있었다. 주변에 첫사랑끼리 결혼한 부부가 거의 없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민경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나도 좀 서운하더라. 엠티 한번 갔다 오더니 둘만 쏙 빠져서 얼굴 보기 힘들어지고. 다른 아이들은 계속 너희 둘 욕하고.”
정말 그랬다. 입학하고 한 동안 셋이 하교길을 같이했다. 그러다 오석이 수현과 8열람실에 따로 남아 공부하면서 둘만 쏙 빠지고 민경 혼자 보낸 꼴이 되었다.
오석은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귀까지 뜨거워졌다. 얼굴이 붉어지기 전에 얼른 사과했다.
“미안해. 따돌린 셈이 되었네.”
“엔트슐디궁 뷔어트 악체피어르트.”
“하지만 다른 애들한테는 미안하지 않아. 꼭 데모를 하거나 아니면 데모하는 데 가서 박수라도 쳐야 사람대접 받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니야. 그래도 학회는 같이 하는 게 어때?”
“그 학회라는 게 이념서적 같이 읽고 그러는 거잖아?”
“꼭 그런 거 아니라도. 나 수민이 언니가 하는 학회 할 생각인데, 이념서적 말고 문학작품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야. 그거라면 할래? 하영이도 한다고 했는데. 어머, 어머, 하영이 이름 나오니까 눈 동그래지는 거 봐.”
난처했다. 오석의 마음 속에서 야와 나인이 50대 50의 지분을 차지하고 힘겨루기를 했다. 오석은 아무 대답 못하고 한동안 얼음처럼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러자 민경이 먼저 말했다.
“당장 대답할 건 없어. 그냥 알아만 둬. 그래도 개학하고 같이 보면 좋겠어.”
오석이 들고 있는 밀크 셰이크가 조금씩 녹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