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1987년 2부 여름 18화 오수현3

by 권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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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1일 밤 기차를 타고 목포 역에서 부산 역까지 이동하며 하룻밤을 기차 안에서 해결한다는 계획은 수첩 위에서만 그럴듯했다. 현실은 전혀 달랐다. 목포에서 부산까지만 기차로 7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 전날, 아니 전전날 밤 서울역에서 밤새 비둘기호 불편한 좌석에서 선잠 자며 목포까지 가고, 하루 종일 목포 일대를 돌아다니고,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다시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7시간 넘게 이동하는 것은 아무리 청춘이라도 쉽게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수현은 새벽 네 시부터 잠에서 깼고, 두시간 동안 이 지긋지긋한 기차에서 빨리 내리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부산이라는 말만 듣고 용수철처럼 기차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런데 막상 내리고 보니 우리나라 제2의 도시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자그마한 시골 역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내린 곳은 부산역이 아니라 부산진 역이었다. 어쨌든 부산은 부산이지만 어디 시골 면소재지 같은 허름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지하철 역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 상태로 도저히 오전 반나절만에 부산을 훑어보고 경주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말이 좋아 밤기차로 숙박비 절약이지 이틀 밤을 지새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행이고 뭐고 당장 어디 가서 한숨 자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들었다.

더구나 지도를 보니 부산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다대포- 범어사, 이렇게 달랑 한 줄 밖에 없는 지하철 노선도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역이 찍혀 있는지 다 세어 보기도 어려웠고, 부산 하면 떠올리는 명소인 영도, 태종대, 해운대 이런 곳은 나와 있지도 않았다.

그러니 오전 중에 부산을 둘러보고 오후에 바로 경주로 가서 다시 경주의 유적을 돌아본다는 것은 어이없는 발상이었다.

“어떻게 할까? 일정 하루 늘려 부산에서 1박 할까, 아니면 경주 포기하고 부산만 돌아보고 밤 기차 타고 귀경할까?”

아니나 다를까 오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수현 더러 결정하라는 것이다.

이 역시 오석의 또 다른 나쁜 버릇이다. 수현은 이게 배려하는 것인지 혹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부산서 1박 하자.”

무심결에 대답이 흘러나왔다. 수현은 대답을 흘리고 나서야 깜짝 놀랐다. 아마 하룻밤만 기차에서 더 보냈다간 병 걸릴 것 같다는 생존본능에서 나온 대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말을 해버렸는지 깨닫는 데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아직 세상을 열 아홉 해 밖에 살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자와 남자에게 1박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숙맥은 아니니까.

오석이 눈이 활짝 열리면서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래도 괜찮아?”

수현은 오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얼른 그 상상력에 못을 박아버렸다.

“걱정 마. 여관 같이 가자는 말 아니니까.”

“그럼?”

“장보라 한테 부탁해 보려고.”

장보라는 부산에 살고 있는 같은 과 동기 여학생이다. 성격이 소박하고 쾌활한 아이라 수현이 부탁하면 반갑게 맞아줄 것이다. 그 아이 역시 학생 운동하고는 선을 많이 긋고 있는 편이라 수현이 기말고사 가서 쳤는지 안쳤는지 따지지도 않을 것이고, 나름 부산에서는 부잣집 딸로 알려져 있으니 집에 방도 많을 것이다. 적어도 수현은 어떻게 해결될 것이다. 그럼 오석만 근처 여관에 방 잡으면 되고.

일단 보라네 집에 전화부터 걸었다. 만에 하나 보라가 여행 가거나 해서 집에 없으면 그때는 여관 방을 잡을 생각이었다. 지금 상태 같아서는 오석과 한 방에 들어가더라도 그냥 잠만 잘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다행히 보라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수현이 아이라, 우얀 일이고?”

펄쩍펄쩍 뛰면서 전화 받는 모습이 그려지는 목소리였다.

“나, 부산 와 있는데, 오늘 밤에 너희 집에서 자고 가도 되냐고 부탁 좀 하고 싶어서.”

“그걸 말이라고 하나? 지금 어데고? 뭐라꼬? 부산진? 그라모 지하철 타고 서면역으로 와라. 내가 금방 갈거이케네, 오늘 같이 다니자. 내가 부산 구경 쫙 시켜주께.”

“알았어. 고마워.”

서면은 수현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부산 지명이었다. 부산의 신시가지, 젊음의 거리, 부산의 명동 등등 이렇게 알려진 곳이니 이 면소재지 같은 풍경은 아닐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서면역에서 내리자 개찰구 앞에 벌써 보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청바지에 사각 면티, 그리고 하얀 운동화를 신고 나타났다. 하긴 학기 중에도 저 차림보다 딱히 더 차려 입었던 것 같지 않았다.

“어머, 오석이도 왔나?”

보라가 깜짝 놀란 눈으로 나와 오석이를 번갈아 보았다.

“너희들 혹시?” 이렇게 물어보고 싶은 것을 참는 티가 나도 너무 났다.

“밤 기차 타고 왔어. 어제 목포까지 밤기차, 오늘 목포에서 밤기차. 이틀 그러고 나니까 꼴이 말이 아니야.”

수현은 즉시 보라의 상상력부터 봉인했다.

“우야꼬? 진짜 힘들겠다. 이틀이나 잠자리가 그게 뭐꼬?”

보라가 상상력을 동정심으로 바꾸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우리집에 가자. 가서 잘 먹고 푹 자다 내일 가라. 오석이도 가자.”

“나, 나도?”

“우리 집에 방 많다. 남동생 방에 가서 자면 된다. 걱정 마라. 엄마도 좋아할 거다. 엄마도 선배라는 거 모르나?”

“어머, 정말?”

“울 엄마 수학교육과 61 학번이다.”

수현은 보라네 어머니가 부산의 어느 여고 선생님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은 처음 알았다.

보라가 말 끝내기 무섭게 공중전화로 달려가더니 5분 정도 지나 돌아와서 박수를 쳤다.

“엄마가 오케이 했다. 자, 가자. 가서 한 숨 자고, 점심 먹고 좀 댕기자. 그리고 저녁도 우리집에서 먹고 내일 가는 거다. 괘않치?”

부산에서는 자동차부터 시작해서 사람들 성격까지 뭐든지 빠르다고 하더니 그 말이 완전히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결국 수현은 오석이와 같이 보라를 따라 당감동이라는 이름도 낯선 동네에 있는 보라네 집으로 갔다. 가자 마자 출근 준비하고 있는 보라네 부모님에게 인사하고 수현은 보라 방에서 오석이는 영진인가 영민인가 하는 보라 남동생 방에서 시체처럼 쓰러져 잤다. 동생은 이미 학교 가고 없었고, 보라 엄마도 곧 바로 출근했다.

수현은 꿈도 한 자락 안 꾸고 깊은 잠에 빠졌다. 눈을 떠 보니 10시 30분 정도. 거실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석이 먼저 일어나 보라랑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이었다. 보라가 이렇게 수다스러운 아이인지 처음 알았다.

거센 부산 억양으로 말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수현은 경상도 사람들 말 수 적다는 것은 남자 한정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남자가 말수 적은 만큼, 그 말이 다 여자한테 간 것이다. 말이 하도 빨라 바로 옆이면 모를까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간혹 오석이 뭐라고 한 마디씩 대답하는데 그 때마다 보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까르르 거리기도 하고 깔깔거리기도 하는 거칠 것 없이 시원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 소리를 듣는 수현의 마음은 시원하지 않았다. 오석이 다른 여자 아이와 저렇게 즐겁게 이야기 나누고 있다는 것이 기분 상했고, 그런 일에 기분 상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수현은 자기 마음에 이런 유치한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대충 얼굴을 비비고 밖으로 나섰다.

“아, 수현아. 잘 잤나?”

까르르 웃고 있던 보라가 손을 흔들었다. 수현도 어색하게 미소를 만들어 보이며 혹시 말투에 묻어나올 감정을 감추기 위해 독일어로 말했다.

“구텐 모르겐.”

“모르겐? 아직 오전이니까 구텐 모르겐 맞다. 하하.”

보라가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렸다. 이게 뭐가 웃기지? 하여간 보라는 아무 말이나 다 잘 웃는다.

보라는 인기가 많은 아이다. 학기 초에는 그리 눈에 띄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지금은 독어과 뿐 아니라 다른 과 남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딱히 예쁜 얼굴도 아니고 키에 컴플렉스 있는 수현 보다도 작은 자그마한 아이지만 적당히 귀여운 인상에 늘 긍정적이고 밝은 모습이라 그럴 것이다. 남자들은 자기 말 듣고 웃어주는 여자를 좋아하니까.

그러니 보라가 오석이와 둘이 나눈 이야기도 별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수현은 자는 동안 둘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신경 끄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보라의 이 말을 듣는 순간 꺼지던 신경의 스위치가 갑자기 스파크를 일으켰다.

“오늘 우리 부산 구경할 코스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저께 하영이도 왔다 갔는데, 그 때는 나도 누구 데리고 부산 구경 다닌 거 첨이라 좀 어리버리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간 칼같이 맞춰가며 잘 할 거다.”

아니 장하영, 이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냔 말이다. 수현이 듣고 싶지 않은 이름, 아니 제일 듣기 싫은 이름. 이 이름을 왜 천리 밖에서까지 들어야 한단 말인가?

“장하영? 걔가 왜?”

평소보다 높은 톤의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그 말 속에는 하영이가 여행이나 다닐 팔자가 되긴 해 이런 고약한 생각도 숨어 있었다. 하지만 보라는 전혀 낌새를 채지 못한 모양 재미있다는 듯이 말을 계속 이어갔다.

“어, 너 하영이가 원래 여기 아라는 거 몰랐나? 하영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마산 사신다. 태풍 걱정 되서 마산 갔다가, 다들 무사하신거 보고 온 김에 부산이나 둘러보고 간다 켔다.”

그랬구나. 역시 그 아이는 한가하게 여행이나 온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 이름이 거슬리기는 사정을 알고 난 다음이나 모를 때나 마찬가지였다.

장하영. 낡고 촌스러운 옷, 전혀 꾸미지 않은 머리 스타일, 그리고 두꺼운 안경으로 예쁜 티를 다 감추고 다녔던 아이. 본인은 절대 내색하지 않았지만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가난의 그림자를 떨쳐내지 못했던 아이다. 한때 수현은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던 하영이 5월 이후 갑자기 스타일이 바뀌었다. 신발과 가방이 바뀌더니 옷이 달라지고 머리 모양이 제법 대학생스러워지고 마침내 콘택트 렌즈를 맞췄는지 두꺼운 안경이 사라졌다. 두꺼운 안경이 사라지자 크고 서글서글한 쌍꺼풀 가진 눈이 확 드러났다.

이 모든 일이 체육시간에 오석이와 포크댄스 파트너가 된 다음에 일어났다.

“하영이 요새 과외 많이 한다더라. 오석이가 소개시켜줘서.”

민경이 대수롭지 않게 알려주었다.

그때는 그런가 보다 했다. 어려운 친구가 있을 때 과외 자리 소개 시켜 주는 정도야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자리가 오석의 외삼촌 댁, 이모 댁이었다. 무엇보다 수현은 그 이야기를 오석이 아니라 민경을 통해 들었다는 것이 언짢았다.

마음이 무척 상했다. 오석에게 대놓고 따지지는 않았지만 공연히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오석은 영문도 모르고 쩔쩔매며 눈치를 봤다.

사실 말하려 해도 딱히 말할 것이 없기도 했다. 수현도 왜 그렇게 마음이 상했는지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현은 부지런히 자기 마음을 분석했다. 아마 다음 두 가지가 기분 나빴을 것이다.

오석이 다른 집도 아니고 하필이면 외가 친척들에게 하영이를 소개했다는 것, 그리고 하필 그 이야기를 민경이가 알고 있다는 것.

물론 오석은 형편이 어려운 친구에게 괜찮은 일자리를 구해준다는 생각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현은 오석이 시골에 있는 본가보다 서울에 있는 외가와 더 친밀하게 교류하며 자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석이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것도 순전히 외가의 힘이었다. 그러니 오석에게는 외가가 사실상 집안이나 다름없었다.

순진한 오석은 집안 제일 어른인 외할머니와 외삼촌에게 예쁘장한 여자 아이를 소개시켜 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을 것이다. 오석의 외가 어르신들은 오석이 하영이를 데리고 갔을 때 절대 단지 과외 선생 소개시켜 준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여자 친구인 수현도 아직 만나지 못한 외할머니를 저 하영이가 먼저 만났다.

문제는 하영이 어른들이 첫눈에 좋아할 수밖에 없는 아이라는 것이었다. 수현이 어른 입장이라도 하영처럼 예쁘고 똘똘한 아이를 아들이나 손자가 소개 시켜 주면 당장이라도 날짜 잡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오석네 정도 부유한 집안이면 여자가 가난한 것 따위는 문제 삼지도 않을 것이다. 또 대체로 오석네 같은 부유한 집안의 남자들은 말로는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건다 만다 그래도 결국 어른들이 지지하는 여성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명색이 여자 친구인데 가족에게 다른 여자 아이가 먼저 소개되었다는 것은 그 이유나 과정을 막론하고 정말 모욕적이고 화나는 일이었다. 이런 생각 이 이상한 것일까? 게다가 오석은 외가에 하영이를 소개시켜 주었다는 사실을 수현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주민경. 민경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영에게 들었건, 오석이 직접 말했건 간에 말이다. 무심결에 오석이 말했을 가능성이 크다. 오석은 민경 앞에서 심리적으로 편안 해 지는 경향이 있다. 수현 앞에서는 많이 긴장하고, 말수가 적은 오석이 민경 앞에서는 수다쟁이가 되곤 했다. 어쨌든 그 사실을 민경을 통해서 들어야 하는 수현의 심정은 참담했다.

바로 그런 사정이 있는 장하영이다. 그런데 그 이름을 머나먼 부산까지 와서 들었다. 그 이름과 함께 그 불쾌하고 모욕적인 기분도 따라 나왔다.

이 불쾌한 기분은 셋이 부산 나들이를 하면서 점점 더 커졌다. 보라가 신이 나서 부산 여기 저기를 소개하며 수다를 떨었고, 오석은 그 수다를 다 눈을 맞춰가며 들어주었다. 덕분에 오석과 보라가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수현은 어색하게 그 둘 사이에 낀 그림이 그려지고 말았다.

물론 수현은 오석이 게스트 입장에서 호스팅 하는 보라를 배려했으리라는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심지어 보라가 남학생이었어도 아니 아버지 뻘 되는 중년 남성이었더라도 비슷하게 행동했을 것이다.

착한 마음, 매너와 배려.

이제야 수현은 자신이 딱히 미남이라고 할 수도 없고, 남자답고 멋지다고 하기도 어려운 오석에게 끌렸던 이유를 알았다. 착한 마음, 그 매너와 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수현뿐 아니라 다른 모든 여자들에게도 아니 세상 누구에게도 똑같이 주어질수 있는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오자 자존심에 깊은 상처나는 소리가 귀를 찢었다.

수현은 소중한 것을 다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다. 평생 나누고 베풀며 살아온 아빠의 저 째째하고 쪼들리는 모습을 볼 때 마다 그렇게 다짐하고 다짐했다. 그런데 오석은 절대 혼자 가질 수 없다. 누구에게나 친철하고 다정할 것이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아픔과 어려움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온갖 양심의 가책으로 스스로를 괴롭힐 그런 남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현은 둘의 관계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오석과 함께하는 삶은 늘 질투와 함께하는 삶이 될 것이다. 다른 여자도 아니라 다른 사람,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는 가망 없는 질투.

그런 점에서 이 무식한 2박, 아니 3박 4일의 여행은 소득이 컸다. 매몰비용이 더 커지기 전에 손절할 수 있게 해 주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를 구질구질 편지로 쓰자니 너무 비참하다. 왜 이런 이유들을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한단 말인가? 어느새 오석이의 그 착함병이 옮겨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수현은 주절주절 글자를 늘어놓고 있던 편지지를 구겨서 집어 던졌다. 구깃구깃 뭉쳐진 편지지가 방바닥 구석으로 날아가 쳐박혀 버렸다.

새 편지지를 펼쳤다. 여러 말 쓸 필요 없다. 수현은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몇 글자 적었다.

‘오석아 미안해. 우리, 그만 사귀는 게 좋겠어.

너를 싫어하게 되었으니까.’

딱 이 두줄이면 족했다.

수현은 이 두줄만 적힌 편지지를 곱게 접어 봉투에 담았다. 어이없게도 하트무늬가 잔뜩 들어간 팬시 봉투였다. 이 예쁜 봉투에 담긴 편지를 받아 든 오석의 실망하는 얼굴이 눈에 선했다.

수현은 차마 우표를 붙이지 못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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