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북이 된 교사지만, 그래도 갈 길을 간다.
담임 교사 제도는 사실 낡은 제도다. 이른바 진보적 관점에서 학생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와 지배 수단이라고 욕해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임 교사가 학급 학생에 대해 가지는 도덕적 압박감과 정서적 애착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심지어 같은 교사라도 비담임 1년만 하면 생소하게 느껴질 정도다. 많은 교사들이 담임반 학생에 대해 혈육과 같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이게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현실이 그렇다.
담임의 업무가 너무 고달프기 때문에 비롯된 방어기제일수도 있다. 사실 담임업무는 혈육과 같은 애착이 없으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달프다. 내 새끼다 생각하니까 날마다 쏟아지는 잡무와 아이들로부터 학부모로부터 사회로부터 받는 마음의 상처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189일 사고만 치던 녀석이라도 종업식날 하루만 대견한 모습을 보이면 그걸로 모든 걸 다 퉁칠수 있는게 담임의 마음이다.
이건 학생도 마찬가지다. 싸이코패쓰가 아닌 다음에야 사고치는 녀석들은 담임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느낀다. 심지어 자기 부모에게는 짜증과 냉소로 대하면서 도리어 담임에게는 미안하고 민망해 하기도 한다. 이렇게 자기 부모보다 담임에게 더 애착을 느끼는 녀석들을 젖 떼고 졸업시키는 것도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억지로 젖 떼는 과정에서 교사도 정서적으로 많이 다친다
문제상황에선 그 압박이 더 커진다. 60개의 눈이 일제히 담임만 쳐다본다. 그 압박은 정말 무섭다. 60개의 눈이 뭔가 해결책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쳐다보는데 뾰족한 방법이 없다면 더 무섭다. 특히 요즘처럼 미래가 불확실하여 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 대한 믿음이 없을때는 더더욱 무섭다. 가르치면서도 확신이 없고, 나를 따르라고 말할 용기도 없다. 마치 나라 전체가 거대한 세월호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더구나 사회는 교사에게 냉혹하다. 교사를 냉혹하게 대하기는 보수와 진보의 구별이 없다. 보수쪽에서는 교사들을 잠재적 좌빨로 몰아 국정교과서로 통제하려 든다. 반면에 진보쪽에서는 교사들이 생각없는 로보트나 기르는 체제의 도구, 인권이나 유린하는 변태로 몰아붙인다. 보수쪽에서 흔드는 건 그냥 웃어버리면 그만이다. 너는 짖어라, 우린 우리식으로 가르친다 하면서. 하지만 진보쪽에서 흔드는 건 참으로 아프고, 모욕감을 느끼게 한다.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데 "교육 불가능성의 시대"를 선언하는가 하면, 매일 교실에서 삶의 힘을 얻어가지고 내려오는데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고 한다. 냉소적인 사람들은 "학교는 친구랑 놀러가는 곳이고, 공부는 학원에서 하는 거 아니냐?" 라며 이죽거린다.
솔직히 우리나라 교사들이 탐구열이 넘치고 자기계발에 열성적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학생들을 잘 이해하고 늘 그들 편에 서려고 애쓴다고도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교사집단이 밖에서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허술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은 소신이 있고 자존심이 있고 강한 도덕적 책무감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보수보다 진보가 집권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보수는 단지 그들을 귀찮게 하지만 진보는 그들의 소신을 틀렸다고 하고, 그들의 자존심을 버리라 하고, 그들은 도덕적으로 잘못이라고 낙인찍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 ㅎㅎㅎㅎ
20여년 전 끔찍했던 수학여행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나는 막 서른에 들어선 젊은 선생이었다. 그때 우리학교 3학년은 19반 까지 있었고, 한 반에 40명이 넘었다. 40*19= 760명! 이들이 열차 10량을 통째로 세내어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지금 가르치고 있는 학교의 1,2,3학년 전체의 두배다.). IMF 무렵이라 학교도 출장비를 아끼느라 그랬는지, 담임교사 외에는 아무도 따라가지 않았다.
760명의 학생이 두줄로 경주 시내를 걸어가는 모습은 일대 장관이었다. 19반이 이제 첨성대를 지나갈때 1반은 이미 안압지에 도착했고, 그 사이는 우리 학생들로 인간 사슬을 이루고 있었다. 1반 담임과 19반 담임도 서로 무전기로나 의사소통이 가능했다.(휴대전화가 아니라 삐삐 시절) 방심할 수 없는 긴장의 연속.
그런데 힘겨운 하루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들어가면 그때부터 진정한 헬게이트가 열렸다. .학급 40명을 네 조로 나누어 각 객실에 밀어 넣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다. 19개 반, 무려 72개 객실을 4개층에 걸쳐 채워 넣어야 했다. 당시 3학년 담임교사 19명 중 나를 포함하여 9명이 남자, 10명이 여자였다. 남교사 한 명이 남학생 객실 4개씩 나누어 케어해야 하는 상황이다. 가이드도 도우미도 없이 이 모든 일을 담임교사들이 다 해야 했다. 방을 왜 관리하고 통제하려 하느냐 따위의 인권빙자 발언 따위는 하지도 말라. 잠깐 한 눈 판 사이에 '방털이' 사건까지 나왔다.
일단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는 당연히 다른 교사들도 나와서 돌아 볼 것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나와보니 나 혼자였다. 다들 어디 갔느냐 하면 고스톱 판, 술 판을 벌리고 있었다. 나한테도 끼라고 했지만 거부하고 학생들의 숙소가 있는 복도에 의자 하나를 가져가서 당번을 섰다. 여교사 방에서는 이미 순번을 정해 놓고 두시간 간격으로 두 명씩 교대로 나왔지만, 화투소리, 술자리 소리가 요란한 남교사 방에서는 끝내, 그 밤이 다 새도록 아무도 나와서 교대해 주지 않았다. 그 무책임한 선생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그들의 공통점은 40대 이상, 남자였다.
당시 20대-30대 교사들의 정치적 성향은 진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선배 교사들에 대한 경멸과 그를 바탕으로 한 나름의 자부심이 고달픈 교직생활을 이어나가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과거에 부끄러운 선배들이 많았다고 해서 그 비난을 지금 대신 받을 이유도 없고, 그 부끄러움을 우리 몫으로 할 생각도 없다. 더구나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부딪쳐가며 젊은 시절을 보냈기에. 당시 언론들은 이걸 옳고 그름의 구별 없이 그저 "심각한 교단 갈등"이라고 무책임하게 명명했다.
이제는 내가 그들 나이가 되었다. 다행히 나는 그들처럼 늙지는 않았다. 도리어 젊은 선생님더러 들어가 쉬라 하고 내가 한 시간이라도 더 하는 그런 노땅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담임을 맡는 교사들 세대에서 그때 그 늙은 남교사들 같은 나태하고 무책임한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미 교직 사회는 그때 그 세상이 아니다. 지금 교사들이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그 시절 그 어이 없는 교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으며, 사회의 다른 분야와도 비교할 수 없다.
간혹 80년대 초반부 386 세대 교사들 중에 “요즘 선생들은 시험공부만 해서 사회 의식이 없다.”는 식의 어이없는 디스를 거는 사람들이 있지만, 적어도 사회 의식만 팽배하고 자기 전공에는 아마튜어 수준을 넘지 못하던 그들보다는 훨씬 나은 선생들이다. 마음에 들든 안들든 그들이 학교를 바꿀 것이며, 바꾸어야 한다. 힘이 되어 주지는 못할망정 상처는 주지 말자. 거꾸로 지금 20-30대 교사들이 그 시절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보수적이 된 까닭은 "의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선배들, 즉 우리가 그 시절 50대만큼 상식 이하로 어이없지는 않기 때문이라고 자위하고 끝내자.
문득 세월호 참사 당시 어느 진보 문필가가 "그냥 있어라"란 글을 써서 무비판적이고 권위에 순응하는 학생을 기른 학교를 질타했던 기억이 난다. 그 말을 들으면 마치 학교가 교사가 아이들을 잘못 가르쳐서 아이들이 희생된 것 처럼 느껴져서 상처입은 마음에 아득한 모욕감까지 더해졌었다. 그래서 그 이후 그 문필가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 공저자, 같은 공동체 회원 활동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sns에서 삭제했던 기억도 난다. 그 문필가의 글조차 외상의 하나로 남은 셈이다.
이제는 그 말을 진보 명망가들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제발 "그냥 있어라." 물론 교육에 비판이 필요하고 진보가 필요한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낼 교사들은 결코 모자라지 않으며, 적어도 당신들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