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시절, 그를 좋아하지 않던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두가지였다.
1. 나라의 큰 어른 답지 않게 무게가 없고 경망스럽다.
2. 실질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자꾸 이념 갈등을 부추긴다.
그러니까 대통령은 나라의 큰 어른 답게 무게좀 잡고 진중해야 하며, 이념 갈등을 부추기기 보다는 실질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둘이 서로 모순적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는 두 요구에는 각각 두 개의 대립쌍이 있으며, 이 둘은 각각 별도의 축의 양 극단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축1: 무게있음 : 경망스러움
축2: 실질적임 : 이념적임
따라서 나라의 큰 어른 다운 무게를 잡으라는 요구를 하면서 이념 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요구는 성립되지 않는다. 무게를 잡으라는 요구 자체가 이미 어떤 특정한 이념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윗자리로 갈수록 무게 있어야 하고, 권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
바로 이것이 보수주의다.
보수주의자 눈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다소 가벼워 보이는 모습이 성품이나 교양 부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였겠지만, 절대 아니다. 개인 노무현은 결코 가볍지도 교양이 없지도 않았다. 오히려 심모원려하는 편이었고, 주변의 운동권 출신 참모들보다 독서량도 훨씬 많았다. 당장 노무현의 휴가 독서목록과 문재인의 휴가 독서목록을 비교해 보면 그 수준차이가 아득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그의 경망스러워 보이는 가벼운 행동은 교양이 없어서가 아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 자체, 나아가 사회의 위계서열 구조가 좀 더 유연하고 가벼워저야 한다는. 그리하여 공기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아랫 사람, 어린 사람들의 말이 자유로이 표현되고 유통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정치적 신념의 표현이다.
바로 이것이 진보주의다.
그래서 노무현은 철저히 진보적인 인물이다.
그렇다면 노무현이 임기 내내 민주노총 등 소위 진보진영과 껄끄러운 관계를 이어간 까닭은 뭘까? 퇴임 후 이명박 정권의 탄압이 시작되었을때, 정작 노무현을 가장 혹독하게 비난한 진영 역시 보수가 아니라 진보였다.
여기서 용어의 혼란이 온다. 우리나라에서는 좌파와 진보가 혼동된다. 정리하면 이렇다. 기존의 질서와 위계를 가볍게 만들고자 하는 편이 진보이며, 경제, 사회문제에서 시장의 자연스런 균형을 믿는 쪽은 우파, 정부의 인위적인 개입을 믿는 쪽이 좌파다. 따라서 진보와 좌파는 생각처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개념이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좌파정권은 늘 극도로 경직되고 보수적인 정부를 운용하곤 했다.
따라서 좌파는 실질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다. 실물경제에 당연히 어둡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론에 따라 설계된 사회를 현실에 구현하려 한다. 실질적인 문제의 복잡함은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되는 근본 모순을 제거하고 완벽하게 설계된 사회제도를 구현하면 다 해결된다고 본다. 따라서 이들은 현재 발생하는 일, 문제보다 앞으로 세워야 할 세상, 이상이 더 중요하다. 그게 바로 실질보다 이상을 앞세우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노무현은 확실히 좌파가 아니었다. 일부 좌파적인 정책을 실시하긴 했지만, 한미 FTA에 대한 믿음을 보면 기본적으로 시장경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틀림없이 진보였다. 그리고 그의 정책들 중 상당수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진보성'을 그리워하는 것이지, 그의 정책 중의 몇몇 좌파적인 것들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가 엉망이다. 흔히 보수가 제대로 서지 않았다, 보수다운 보수가 없다라고들 한다. 아니다. 진보가 사라졌다. 진보진영을 자처하는 집단들도 대부분 그 내부는 꼰대스러움으로 가득하며, 위계질서와 경직된 사고방식과 구조를 자랑한다. 그들은 모두 보수, 아니 꼴보수다. 이른바 보수진영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우리나라는 어디에도 진보의 싹이 보이지 않는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자신감있게 불확실성을 감수하는 진취적인 유연함과 자유로운 영혼의 하모니, 진보 말이다.
허공에 외쳐본다.
사라진 진보를 찾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