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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고 Oct 03. 2023

무계획의 여행 계획

분명 무계획이었는데 어째서 여행 계획을?

무계획의 여행 계획은 단순하다.

큰 테마를 하나 정하는 것. 나는 올해가 시작하고 지금까지 꽤 오랫동안 클라이밍을 하고 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이렇게 오랫동안 운동을 한 것은 클라이밍이 처음이다.



일본의 클라이밍장을 가보자


우리나라에도 지금 암벽여제 김자인 선수도 있고, 천종원 선수, 서채현 선수 등 세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선수들이 많지만, 일본은 꽤 오랫동안 아시아의 클라이밍 강호 타이틀을 갖고 있다.


엄청 어려운 문제야 지금 한국에서도 못 푸니, 여행 겸 겸사겸사 일본의 암장을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렇다. 시작은 이것이 끝이었다. 실제로 부모님께도 일본 암장 투어를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렸고, 이를 위해 나고야에서 유명하거나 큰 암장들을 구글 맵에서 구경하기도 했다.


추후 알겠지만, 이러한 계획은 어차피 다 물거품이 된다. 암장을 방문하기는 했지만, 애석하게도 내 팔근육은 처음에 비해서 발달했을 뿐이지 연속으로 며칠 동안 클라이밍 할 정도로 좋지는 못하다. 


그러던 와중에 한 가지 일이 터졌다. 그리고 이 또한 무계획의 여행계획에 아주 큰 변화를 가져온다.



여행에 디지털과 필름 카메라,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여행에 항상 카메라를 가져가던 나는, 작년에 큰 마음먹고 거금을 들여 소니의 미러리스 카메라를 구입했다. 하지만 1년이 넘도록 1000컷도 못 넘길 정도로 쓰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내가 필름 카메라도 같이 쓰기 때문이었는데, 필름 특유의 질감과 찍고 난 뒤 바로 확인하지 못하는 매력에 고등학생 때부터 약 13년 동안 필름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자체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찍었지만.


아무튼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현상과 스캔이 완료된 이후에야 그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낭만적인 불편함은 항상 나를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딜레마에 빠지게 했고 이번에도 그러하였다.


디지털은 편리한 대신 그 질감을 완벽히 재현하기는 어렵다. 물론 보정을 잘한다면 어느 정도는 비슷하게 만들 수 있지만, 디지털의 특성상 한 컷 한 컷을 신중히 찍기보다는 비슷한 설정으로 여러 장 찍어 그중 베스트 샷을 고를 때가 많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손이 많이 가지 않는 것 같다. 나는 결국 필름 카메라를 가지고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디지털로 사람을 찍을 때에는 준비 시간이 짧다. 누군가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했을 때, 5분 내로 촬영이 가능하다. 준비 시간도 짧고, 노출을 따로 측정하지 않아도 카메라가 알아서 해주고, 결과물을 보여주기도 쉽다.


하지만 필름은 다르다. 준비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떻게 찍어야 할지, 노출은 수동으로 재야 하고...

이 과정에서 상대방과 대화를 하는 것이 좋다. 상대도 사진 찍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좀 더 이야기하기 편해지고, 긴장감을 줄일 수도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내 성격상 그날 찍은 사진은 그날 보정하고 싶어서 밤잠을 설칠게 분명했다.


이렇게 힘든 결정을 하고 난 뒤, 한 가지 의문이 따라왔다.



그럼 도대체 디지털카메라가 왜 필요한 거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디지털카메라를 팔아버렸다.

그리고 중형 필름 카메라를 구입했다. 여러 가지로 편리한 쪽을 버리고, 비싸고 불편한 쪽을 택했다.



고등학교 때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갖고 싶었던 중형 카메라였다. 당시도 지금도 핫셀블라드는 명실상부 최고의 카메라지만 나에게는 그 의미가 달랐다. 중형 카메라. 특히 6x6의 정방형 카메라는 솔직히 이야기하면 사진이 한정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35미리 카메라처럼 세로, 가로로 찍었을 때의 느낌이 다른 것이 아니라, 지정된 사각 틀 안에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 누구는 이 부분이 불편하긴 하지만 나는 나름 안정감을 주는 비율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핫셀블라드의 렌즈는 나중에 사진에서 볼 수 있겠지만 매우 깔끔하고 선명하다.


결국 이 카메라를 산 이후 여행의 큰 골조가 바뀌었다.



클라이밍은 그냥 하고, 예쁜 사진을 많이 찍어오자.


처음보다 조금 더 대책 없어진 것 같아 보인다면 정확하게 보았다. 내 계획은 더욱 성의 없어졌다.

예쁜 사진이라는 것이 불확실하고, 내가 가는 곳에서 예쁜 사진이 나올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사진의 특성상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면 내가 원하는 사진을 찍지 못할 때도 많고, 필름 카메라의 특성상 필름의 감도(ISO) 문제도 무시하지 못한다. 디지털처럼 휙휙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획을 세워 착실히 여행하기 좋아하시는 분들은 점점 더 머리가 아파올 것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여행하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런 방식이 좋다.


여행은 힘들었지만,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좋은 사진들도 많이 찍었으니 결과론적으로는 내가 원하는 여행을 한 것과 다름없다. 세세한 계획대로 실행해 얻은 결과는 잘 되는 것이 베이스이지만, 큰 골조만 가지고 실행해 얻는 결과물은 리스크가 큰 만큼 성공했을 때의 성취감도 더 커지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해외에서 20만 원어치 필름을 구매했다. 약 14 롤 정도의 필름이었다.

내 중형 카메라의 특성상 한 롤에 12장 밖에 찍지 못하는데, 그럴 경우 200장도 못 찍는다는 소리가 된다.

하지만 중형카메라가 스냅사진처럼 쉽게 찍을 수 있는 카메라도 아니고, 정말 원하는 장면에서 시간을 투자해서 한 장 한 장씩 찍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몇 장을 찍을 수 있는지는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중형 카메라와 더불어 35mm 카메라도 가져가기 때문에 이것으로는 한 롤에 36장 정도를 찍을 수 있기 때문에 괜찮다.


아무튼 이렇게 3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그 사이 나는 일본인 친구와 일주일에 2번 정도 통화를 하며 회화공부를 했고, 출국 이전에 카메라 사용법 등을 다시 공부하며 테스트 촬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클라이밍도 꾸준히 다녔고.


이제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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