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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고 Apr 01. 2018

01. "비극이여도,  내 인생을 후회하진 않아."

Edith Piaf, 『Non, Je ne regrette rien』

난생처음으로 음악은 언어를 초월한다는 말을 느꼈던 곡이 있다.

고등학교 때 우연한 기회로 라디오에서 이 노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해가 안 되는 가사, 우스꽝스러웠던 발음에 호기심을 느끼면서 끝까지 집중해서 들었다. 조용히 시작한 노래는 후반부로 갈수록 표현할 수 없이 먹먹한 마음처럼 커져만 갔고, 마지막 가사까지 모두 불렀을 때에는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이 찌릿한 감동이 흘렀다. 그 노래가 바로 이 곡이었다.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아뇨, 전 후회하지 않아요. (Non, Je ne regrette rien) >
Edith Piaf - Non, Je ne regrette rien

https://youtu.be/Q3Kvu6Kgp88


프랑스의 국민 가수로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작은 참새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는 그 어떤 수식어로도 설명이 부족한 가수 중 한 명이다. 그녀의 생애는 슬프기 짝이 없었고, 비극적이었으며, 사랑과 외로움이 가득했다. 내가 친구들에게 피아프를 이야기할 때는 '진정한 사랑의 노래를 부를 줄 아는 몇 안 되는 예술가'라고 말하곤 한다.


Edith Piaf - Je ne regrette rien, [180g, Gatefold Double Vinyl]



사랑을 노래하던 작은 참새, 그녀의 생애


그녀는 어려서부터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했다. 아버지는 곡예사였고, 어머니는 가수였는데, 둘 다 육아에 뜻이 없었고, 매우 가난했다. 외할머니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이후 매춘업소를 경영하는 친할머니에게 맡겨진 피아프는 부모의 사랑 대신, 그녀를 친자식처럼 돌봐준 매춘 여인 '티틴'의 사랑을 받았다.

사랑이 없는 척박한 땅에서도, 그녀에게 물을 주는 사람은 있었던 것이다.

티틴은 피아프가 각막염에 걸려 앞이 안 보일 당시, 그녀를 데리고 성녀 테레사의 성지에 가서 기도를 올린 적이 있었는데, 후에 이 덕분에 피아프의 각막염이 나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장면은 그녀의 일생을 담은 영화 '라 비앙 로즈(La vie en rose)'에도 나온다.


영화 '라 비앙 로즈(La vie en rose)'에서 티틴과 함께 성녀 테레사에게 기도하는 피아프


그녀는 이후 아버지를 따라 곡마단에 들어가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아버지와 갈라서고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당시 파리에서 잘 나가던 나이트클럽 사장인 '루이 레플리'는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는 자신의 클럽으로 데려와서 '라 몸므 피아프(La Môme Piaf)'라는 예명을 지어주고 무대에 데뷔시켰다.

 

이후 2년 동안 그녀는 첫 전성기를 맞게 된다. 그녀는 두 번의 레코딩 앨범을 통해 호평을 받고, 많은 팬들이 생긴다. 하지만 그런 행복도 잠시, 그녀를 캐스팅했던 루이 레플리가 총에 맞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주요 인물로 피아프가 거론된다. 졸지에 자신을 캐스팅한 루이의 살인범으로 누명을 쓰게 되고, 그녀는 정상에서 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작사가였던 '레몽 아소(Raymond Asso)'는 실의에 빠져있는 피아프를 다시 양지로 끌어올린다. 그는 라 몸므 피아프였던 그녀의 예명을 더욱 로맨틱하게 보이기 위해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로 바꾸고, 그녀는 이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피아프는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누구나 아는 최고의 가수가 되었고, 수많은 작곡가들이 그녀에게 곡을 들려주기 위해 매일같이 찾아왔다. 대중들에게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당대 저명한 예술가들로부터는 끊임없는 찬사를 받았다. 말 그대로 '장밋빛 인생'이었다.


유명해지면서 그녀는 몇 번 연애를 하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는 프랑스의 유명한 남자 가수인 '이브 몽땅(Yves Montand)'이 있다. 그녀의 노래 중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의 가사는 이브 몽땅과 연애할 당시, 넘치는 사랑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쓰인 것이라고 한다.


https://youtu.be/kFzViYkZAz4


내 시선을 내리깔게 하는 눈동자. 입술에 사라지는 미소. 이것이 나를 사로잡은 그분의 수정하지 않은 초상화예요. 그가 나를 품에 안고 가만히 내게 속삭일 때, 나에게는 장밋빛으로 보이지요.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 中


1946년 1월 1일, 이브 몽땅과 에디트 피아프


직접 가사를 쓸 정도로 열렬한 사랑을 했던 그녀였지만, 훗날 그녀는 자신이 평생 사랑한 남자는 마르셀 세르당(Marcel Cerdan) 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피아프가 뉴욕으로 가서 공연을 할 당시 마르셀은 자식이 셋 있는 유부남이었지만 둘은 뉴욕에서 운명처럼 만나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세간에서는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에디트 피아프를 질타했지만, 이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하였다.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

1949년, 마르셀은 피아프의 부탁으로 그녀를 만나러 오는 도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목숨을 잃고 만다.

배를 타고 오겠다고 하는 것을 피아프의 부탁으로 비행기를 타고 왔던 것인데 이에 피아프는 엄청난 죄책감과 함께 오열을 하고 모든 공연을 연기시킨다.


피아프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지만, 결국 노래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실의에 빠져서 고통과 절망 속을 오가며 직접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를 작사했는데, 이 곡 또한 현재까지 에디트 피아프의 명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쓴 가사가 매우 감동적이다.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

https://youtu.be/znQxWx5yrBQ

푸른 하늘이 무너져버리고 땅이 뒤집힌다 하여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날 사랑해준다면 난 세상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요
사랑이 밀려오는 동안에는, 내 몸이 당신의 팔 안에서 떨리는 동안에는
그런 건 아무 상관없어요
내 사랑이여, 난 지구 끝까지라도 가겠어요. 
내 머리를 금발로 물들일 수도 있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중략)

당신이 죽어서 나와 함께 있을 수 없게 되어도 
괜찮아요,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
나도 죽을 테니까요. 우린 영원히 이어져 있어요,
무한한 푸른 공간 속 하늘에선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내 사랑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걸 믿나요?
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해줄 거예요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 中


이러한 비극들 속에서도 그녀의 인기는 식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인기는 더욱 물올라 프랑스 전역에서 그녀에게 공연을 요청했다. 그녀는 차를 타고 전국으로 공연을 다니던 중 몇 차례 사고를 당하게 되는데, 특히 한 번은 매우 심한 사고였는데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녀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모르핀에 의존하며 공연을 이어갔고, 이는 결국 그녀의 삶을 갉아먹는 원인이 된다. 모르핀에 너무 의존하게 된 피아프는 결국 중독으로 재활센터에 들어가게 되지만 끝내 고치지 못했다. 그녀의 간과 췌장은 약물을 걸러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고, 그 와중에도 그녀는 끊임없이 공연하고, 레코드를 녹음했다.


1959년 12월 13일, 드뢰에서 공연을 하던 피아프는 공연 도중 몸 상태가 악화되어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의사는 몸 상태를 고려해 공연을 중단하고 관객들을 돌려보내라고 말하지만 피아프는 노래를 해야 된다며 고집을 부리고 무대 위로 올라가고, 결국 쓰러지고 만다.


그 당시 그녀의 몸은 더 이상 그녀를 지탱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 같은 몸을 이끌고 곧 있을 올랭피아 극장에서의 공연을 위해 연습을 계속했다.


공연에서 부를 곡들이 결정되어 그녀가 하루 종일 연습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 작사가였던 '미셸 보케르(Michel Vaucaire)'가 작곡가인 '샤를 뒤몽(Charles Dumont)'을 데리고 노래를 들려주기 위해 에디트 피아프를 만나러 온다.


이미 선곡이 완료된 탓에 그녀는 별 감흥 없이 일단 노래를 들어보자고 했고, 그는 피아노를 치면서 후에 그녀의 대히트곡이 될 <아뇨, 전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를 들려주게 된다.


피아프는 이 곡을 듣고 자신의 노래라고 기뻐하고 바로 공연의 선곡 리스트에 이 곡을 올린다. 그리고 1960년 12월 29일, 네 번째 올랭피아 극장 공연에서 이 곡을 세상에 공개했다.


이미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에디트 피아프가 생명을 끌어올리며 부르는 듯 한 노래에 사람들은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 나는 아무런 후회도 하지 않아요. 남들이 내게 한 일은 좋건 나쁘건 나에게는 같은 거예요.
그것은 이미 청산되었지요. 깨끗이 청소가 끝났어요. 잊어버렸어요. 나는 과거를 저주하지 않아요.
추억과 함께 슬픔과 기쁨에 불을 붙였어요.

그런 것은 이제 필요가 없어요.
사랑도 그 트레몰로도 모조리 청산해 버리고,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나의 인생도 나의 기쁨도 지금 당신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아뇨, 전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 中


피아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1963년 10월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47세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애도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자신의 장례가 가톨릭 식으로 치러지길 바랐지만 당시 보수적이었던 프랑스 가톨릭 교단은 그녀의 삶이 가톨릭 신자의 삶 답지 못했다고 미사를 거부했다. 대신 그녀의 장례식은 에디트 피아프를 애도하는 수만 명의 프랑스 국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치러졌다.


에디트 피아프의 장례는 국장급으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이처럼 그녀의 삶은 장밋빛 인생처럼 아름답지만도 않았고, 사랑의 찬가처럼 찬란하지도, 운명으로 믿었던 사랑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의 삶은 술과 모르핀에 중독되어 있었고, 그녀 인생의 극장에는 언제나 비극이 자리를 채웠다. 그녀는 그 비극들 앞에서 사랑을 노래를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마지막까지 비극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녀의 마지막이자 최고의 히트곡인 <아뇨, 전 후회하지 않아요>처럼, 유곽에서 비극적으로 살아온 피아프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피아프도, 평생을 노래에 바친 피아프도, 어느 것 하나 후회할 만한 인생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녀의 노래에는 작은 참새가 갖기에 너무 거대한 힘이 숨어있고, 그녀의 노래는 절규가 되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 마음을 파고든다. 그 어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목소리를 가지고, 진정한 사랑을 노래한 그녀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하늘에서는 가슴이 찢어지는 비극이 아닌 그녀의 노래같이 장밋빛 인생을 살고 있기를 열렬한 팬의 마음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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