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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고 Sep 19. 2018

27. 당신의 노래는 계속 들릴겁니다.

Fukui Ryo, <Scenery> / <Mellow Dream>

본 글은 소설의 형식을 빌려 후쿠이 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일화를 따라 가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작가의 상상력이 포함되기도 하였습니다.


방은 온통 어둠에 휩싸여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한가운데에 앉아있었다. 아니 떠다니고 있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망망대해에 돛도 없는 통나무 뗏목이 폭풍우를 만나 이리저리 흔들리듯. 나는 방의 어둠에 집어삼켜져 이리저리 파도가 부딪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의 뗏목에는 유일하게 라디오 하나만 자리 잡고 있었다. 유일하게 그 폭풍우 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용한 녀석이었다. 이 녀석은 내가 어떤 상황인지는 관심도 없다는 듯 신나게 음악들을 뽑아낸다. 나는 자포자기하고 폭풍우에 몸을 맡기며 앞으로 어떻게 벌어먹고 살지 고민하고 있었다. 가진 것은 피아노와 손가락. 음악이 좋아서 시작했던 일인데 어느 순간 슬럼프가 왔다. 계속해서 연습하고 또 연습하지만 이 슬럼프라는 가랑비는 폭풍우가 되어 나를 집어삼켰다.


그렇게 나는 뗏목 위에 널브러졌다.


라디오에서는 유명한 재즈 아티스트들의 명연주와 노래들이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주긴 할까?


"꿈 깨시지!"

차가운 물벼락이 뺨을 세차게 때린다. 다시 한번 넉 다운.


위대한 그 사람들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점점 마음이 무거워진다. 내가 저 사람들만큼 잘할 수 있을까. 음악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텐데. 난 왜 여기에서 포류하고 있는 걸까. 음악을 하면 안됐을까. 피아노를 독학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안일했나.


폭풍우는 며칠이 지나도 멈출 줄 몰랐다. 오히려 더 거세졌다. 결국 나는 어느 정도 현실을 인지하고, 재즈 피아니스트라는 뗏목에서 내려야겠다는 결론으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조금만 큰 파도가 오면 쉽게 뒤집힐게 뻔한 아슬아슬한 뗏목 따위 버리는 게 낫다. 공장에 들어가 기술을 배워도 먹고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겠지?


마음을 고쳐 잡았지만 여전히 마음은 불안했다. 손에서 재즈를 놓기란 너무 어려웠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이 부정당하는 것만 같다. 며칠 더 괴로운 나날들이 지속됐다.


이제 정말 끝이려나. 결국 나는 배에서 내리기로 결심했다. 아직 괜찮았다. 나는 20대고, 지금 배를 버리고 물에 뛰어든다면 어떻게든 헤엄쳐서 가까운 해변이나 다른 배 까지는 넘어갈 수 있다. 물론 지금 당장은 폭풍우 때문에 힘들겠지만, 지금만 버티면 된다. 아직 힘이 있으니 어떻게든 다른 배를 탈 수 있을 거야.


나는 뗏목에 남아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바다에 빠트리기로 결심한다. 피아노는 무거우니 일단 내버려두어야지. 그 외에 버릴 것을 찾지만, 작고 초라한 뗏목 위에는 내 마지막을 추모하며 멀리 던져버릴 물건들이 별로 없었다. 초라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라디오를 집어 들었다.

라디오에서는 버드 파웰의 곡이 막 끝나가고 있다. 여전히 이 양반의 연주는 끝내주는구만. 이 연주는 세기가 넘도록 기억되고 사랑받겠지. 예전 같았으면 부러워했겠지만, 이 배에서 떠나기로 결심하니 그다지 아쉽진 않은걸? 노래야 그냥 들으면 되지. 다들 그러잖아.


한 차례 박수소리가 끝나고 다음 곡이 이어진다. 한 곡만 더 들을까?

고민하는 와중에 라디오 진행자가 다음 곡을 소개한다.


"그럼 이어서 엘라 피츠제럴드(Ella Fitzgerald)의 C Jam Blues를 듣겠습니다."

https://youtu.be/osI1QoRgxiU

Ella Fitzgerald, 'C Jam Blues'


아, 엘라 피츠제럴드만큼 엄청난 사람도 없지. 그 리듬 감하며,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스캣. 얼마나 잘하면 '재즈의 영부인'이라는 칭호까지 받게 됐을까. 토미 플래너건의 피아노와 바비 더햄의 드럼 소리가 신명 나게 노래의 시동을 건다. 경쾌하기 짝이 없다. 뒤 이어 엘라 피츠제럴드의 경쾌한 스캣이 에디 데이비스의 트럼펫 반주에 맞춰 춤을 춘다. 음과 박자의 위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는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여자다. 나이는 들었지만 충분히 그렇게 보인다. 그 열정, 그 기교. 나의 우상.


노래가 끝날 때쯤. 배를 버리겠다는 생각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어느 순간 눈물을 흘리며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나무들을 뗏목에 덧대어 조금 더 튼튼하게 보강했고, 그러는 사이 폭풍우도 순식간에 물러갔다. 바다는 잔잔해지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다. 이번엔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릴 것 같은 해만 남았다. 하지만 마음은 너무 편안했다. 바다는 잔잔했고, 라디오에서는 끊임없이 재즈가 흘러나왔다.


나는 아마 평생 가도 이 배를 버리지 못하겠지.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마음 편하다. 내가 배를 버리지 못하는 것을 알고 나니, 다른 배를 구하거나 물에 뛰어들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꿋꿋하게 노를 만들어 앞으로 젓는 수밖에 없다. 이건 꽤 명쾌한 해답이다. 나의 행동에는 군더더기가 없어지고, 해야 할 목록들만 남는다. 다채로운 음색들이 무지개가 되어 귀에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위대한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았다.




후쿠이 료에 대해.

후쿠이 료(Fukui Ryo) (1948-2016)

후쿠이 료(Fukui Ryo)는 다른 많은 재즈 아티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유튜브 덕에 알게 된 아티스트였다. 어느 순간부터 유명한 재즈 아티스트들의 영상을 보면 빠지지 않고 후쿠이 료의 1집이 추천 목록에 올라왔다. 노래는 좋지만, 그에 대한 정보는 많이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몇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그의 생애에 대해 써 놓은 글을 볼 수 있었다.


후쿠이 료는 23세 때부터 혼자서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웠다고 한다. 그는 여느 위대한 음악가들이 경험했듯 지독한 슬럼프에 빠졌고, 한동안 방구석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엘라 피츠제럴드(Ella Fitzerald)'의 'C Jam Blues'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재기를 결심한다.


28살. 그는 존 콜트레인, 빙 크로스비 등의 재즈 스탠다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첫 앨범 <Scenery>를 발매한다. 그리고 이듬해 <Mellow Dream>까지 발매한다.


https://youtu.be/Hrr3dp7zRQY

Fukui Ryo, <Scenery>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가 곡을 쓸 때에 재즈의 본 고장인 미국에서는 기존 재즈 장르에 대해 무감각해져 있었고, 사람들은 퓨전 재즈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재즈는 계속해서 새로운 실험이 계속되었고, 후쿠이 료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자신만의 색을 띤 앨범을 만들었다. 오히려 그가 재즈의 본 고장이 아닌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만의 순수한 재즈를 연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후쿠이 료는 삿포로에 "Slow Boat"라는 이름의 재즈 클럽을 오픈해, 그의 뒤를 이을 재즈 연주자들을 양성하며 평생을 보냈다. 그리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에서는 2012년 삿포로 문화 장려상을 받았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16년, 후쿠이 료는 악성 림프종으로 세상을 떠난다.


유튜브 역주행과 앨범 발매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유튜브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앨범이 추천 목록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호기심에 눌러본 사람들은 후쿠이 료의 음악이 내뿜는 매력에 빠져버렸고, 이후 많은 재즈 팬들의 찬사를 받으며 그의 모든 앨범이 재평가되었다.


여기에 더해 스위스 기반의 신진 레이블 <WRWTFWW>의 자매 레이블인 <We Release Jazz>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데뷔 앨범 <Scenery>와 2집 <Mellow Dream>을 재발매하기로 한다.


Fukui Ryo의 1집과 2집. 대작이라고도 평가받는 그의 두 작품이 We Release Jazz를 통해 재발매 되었다.


그가 살아생전 발매한 앨범은 다섯 장으로, 다른 아티스트들보다 그 수는 훨씬 적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섯 앨범들은 모두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독학으로 배운 피아노를 통해 쿨, 밥, 모달 등 여러 장르에 대한 다양하고 자유로운 해석으로 자신만의 음악을 확연히 뽐낸다. 개인적으로는 2집의 첫 번째 트랙인 'Mellow Dream'이라는 곡이 굉장히 마음에 든다. 노래가 지루하지 않다. 모든 악기들이 하나하나 자신의 역량 이상을 뽑아내는 느낌이다. 


https://youtu.be/KxlvMmUjpTY

Fukui Ryo, <Mellow Dream>. 'Mellow Dream'이라는 곡은 이 앨범의 첫 번째 트랙이다.


당신의 노래는 계속 들릴 겁니다.

정말 아쉬운 점 중 하나는, 그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 것이 유튜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라이브 영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유튜브에 올라와있는 영상들은 그의 앨범을 올려놓은 게시글들 뿐이다. 우리는 앨범을 통해서만 그를 기억할 수 있다. 정말 아쉽다.


비록 그는 이 세상에 없지만, 언젠가는 그의 노래가 또 다른 뗏목을 타고 부유하는 다른 젊은 아티스트들의 지친 마음을 달래줄 희망의 노래가 되기를 바라본다. 






글쓴이 / 하고(HAGO) / 前 음악 듣는 기린

소개    / Crate Digger, 어쩌다가 LP의 매력에 빠져버려서 모으기 시작한 게 취미가 되어, 블로그와 브런치를 오가며 음악을 소개해 주는 글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후에 개개인의 취향을 저격하는 음악들만 골라서 소개해 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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