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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우너 Oct 03. 2021

그림책을 팝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세상엔 참 많은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조직생활에 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혼자두고 보면 똘똘하고 성실한데 조직 안에 있으면 어리숙해지는 사람. 또 책을 좋아하고 책 안에서 답을 찾고 책의 한 문장에서 감동과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굳이 안 해봐도 되는 일을, 똥인지 된장인지를 직접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일을 처리할 때 세세하게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즉흥적으로 움직이다 낭패를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성향들이 어찌 보면 좀 효율이 떨어지는, 즉 돈 벌기에는 힘들어 보이는 유형인데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나 그 모든 유형의 교집합이 나였다.


 직장 생활이 성격에 잘 맞지 않는다는 걸 일찌감치 깨닫고 20대 후반의 많은 날들을 무용한 일들만 골라하며 지냈다. 친구들은 대학 졸업해서 번듯한 직장에 취직해 무난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하던데 나도 그렇게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장소가 나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직장생활에만 끈기와 인내를 요구하는 건 아니다. 직장을 선택하지 않고 홀로 돈을 벌어 사는 데에도 끈기와 인내가 필요했다. 거기다 용기까지. 돈이 좀 생기면 목적지도 없이 세계 여행을 다니기도 했고,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창업을 해보기도 했고, 여기저기 선배들의 일을 도우며 알바도 했고, 명동의 한 중식당 주방에서 일하기도 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며 사람은 번듯한 회사에 다니지 않아도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진다는 걸, 그 시절 경험했다. 아무데서나 아무렇게나 아무렇지않게 사는 법을. 하지만 돈도, 정신없는 그 와중에도 내 곁에는 항상 그림책을 포함한 다양한 책들이 있었다. 그닥 열심히 보지도 않으면서 애착 인형이나 이불 들고 다니는 아이 마냥 일단 가방에 책을 넣고 다녀야 안심이 되었다.


 그러다 결혼을 했고 첫째 아이를 낳고 남편의 일 때문에 아는 사람이 없는 대구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어느 날 첫째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아주 오랜만에 서울에서 아는 언니가 대구에 왔다기에 앞산의 한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카페 사장님이 곧 카페를 접고 다음 임차인을 찾는다 대화를 듣게(?) 되었다. 바둑에서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이 있는데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난 단고 끝에 악수 둔다. 공간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고 월세가 35만 원이라 그 정도는 수월하게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공간에서 무엇을 할지 구체적 계획이나 포부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며칠 후 공간을 계약했다. 당시 일본에서 일하고 있던 남편에게 전화로 공간을 계약했다고 이야기했더니 "넌 왜 그렇게 하고 싶은 게 많냐"라며 핀잔을 주기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공간의 이름은 '하고'가 되었다. 기존의 인테리어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 빈 공간을 내 스타일대로 꾸미려고 집에 가지고 있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그림책들을 가지고 와서 채우고 나니 얼추 그림책방이 되었다. 그렇게 내 마음속에 있던 자기만의 방이 3D로 나오고 말았다.


그 후 7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어쨌든 아직 책방 문이 열려있고, 시작했던 공간에서 두배 정도 더 넓은 곳으로 이사까지 한 걸 보면 망하지 않았나보다. 책방을 운영하며 책 판매로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걸 진작에 알았지만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내 마음속에 자동 재생되는 노래가 있었으니 가수 김국환의 <타타타>.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노래 가사처럼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전개에 의하면 난 옷도 입고있고 책도 많으니 이 정도면 수지가 괜찮다고 본다.

  

   하고 싶은 일들이 머릿속에 넘쳐났던 20대의 어느 날, 한 직장에서 20년 가까이 일한 40대의 선배에게 한 곳에서 오래 일 할 수 있는 비결을 물었다. 그 선배는 그 일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40대의 가장이 되니 할 수 있는 선택이 별로 남지 않아서 그렇다고 했다. 그때는 갸우뚱했던 그 말을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무턱대고 시작했던 많은 일들을 통해 내가 잘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게 되었고 굳이 안 해도 되는 일은 덜하게 되었다. 30대 중반에 무턱대고 시작했던 그림책방과 함께 40대가 되었다. 이제는 그림책이 너무 좋아서 책방을 한다는 열정보다는 그저 덤덤한 일터가 되었지만 그 덤덤함 때문에 가늘고 길게 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동네 한 모퉁이에서 그림책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그림책을 알면 알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참 매력적인 매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이 작은 사각형의 물성 안에서 배어 나오는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일본의 인기 그림책 작가인 요시타케 신스케는 <있으려나 서점>이라는 책에서 서점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희망과 실망, 욕망, 타인의 인생과 본 적이 없는 풍경, 세계의 비밀과 또 하나의 자신 등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살 수 있는 곳”이라고. 신스케의 말의 연장선이겠지만 나도 책을 팔면서 많이 하는 생각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 중에서 가장 가성비가 높은 재화는 책이 아닐까. 물론 좋은 책이라는 전제 하에. 그리고 어린이, 어른 모두 읽을 수 있는 그림책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책방에서 판매하는 책을 선택할 때는 부끄럽지 않기 위해 고심하게 좋은 책이라는 확신을 주는 책들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나의 다른 자아를 소환한다. 내성적인 책방지기에서 입에 거품을 물며 강매를 서슴치 않는 '진격의 책팔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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