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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우너 Oct 11. 2021

책을 선택하는 일

  작은 책방을 운영하다 보면 공간의 한계 때문에 '좋은' 책을 '잘' 선택해야만 하는 숙명을 마주하게 된다. 공간은 협소한데 수많은 출판사에서 이목을 끄는 신간들은 끊임없이 나오기에 어떤 책을 들이고 어떤 책을 뺄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고민은 시간이 지나면 좀 줄어드나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책방을 운영하면 할수록 더 심해졌다. 


책방이라는 곳은 소비자 입장에서는 책을 파는 일처럼 보이지만 책방지기의 입장에서는 순전히 책을 선택하는 일의 연속이다. 유행처럼 독립서점, 동네 책방이 많이 생기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 생긴 수만큼 사라지는 책방들이 있다. 책은 온라인 구매가 너무도 편리하고 당연해진 상황에서 오프라인에서 작은 규모로 책을 판매해서 살아남아야 한다면 책 선책, 즉 큐레이션이 그 책방의 색과 존재 이유를 결정한다. 결국 책 선택이 책방의 생존문제라는 것을 여실히 깨달을 때쯤, 즉 서당개 3년 차 정도 되니 책 선택이 더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잘 선택했다면 파는 일은 그다음 문제이다. 생텍쥐베리의 <야간비행>에서 '완벽함이란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고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상태'라고 했듯이, 늘 책방을 둘러보며 뺄 책을 찾는다.

 

 책방에서 어떤 기준으로 그림책을 선택하는지 종종 질문을 받는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정답은 없지만 시간이 흐르며 쌓인 개인적 취향은 있다. 내가 지극히 별로라고 생각했던 그림책이 다른 책방에서는 추천 그림책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기도 하고 내가 극찬한 그림책을 어떤 손님은 어디가 좋았다는 건지 재차 물어보기도 한다. '좋은'이란 것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이지만 여러 해 동안 많은 그림책을 선별하고, 같은 책을 수십 번 보기도 하고, 다양한 손님들에게 책을 권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오롯이 걸러진 그림책들이 있다. 처음부터 어떤 기준을 정하고 고른 것은 아니지만 책방에 오랫동안 빠지지 않고 자리를 차지하는 책들이 있고 결국 그 책들이 내가 책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었다.


우선 그림책이란 장르의 매력을 십분 살린 책이 좋다. 그림의 메시지가 풍성하고 텍스트는 단순하고 간결할수록 좋다. 그래서 해석보다는 직관으로 먼저 다가오는 책. 텍스트 없이 그림으로만 스토리를 전개하는 글 없는 그림책(Wordless)도 매력적이다. 텍스트가 적은 게 무조건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텍스트가 적으면 독자가 해석할 수 있는 폭이 넓다는 장점이 있다. 같은 책이라도 보는 사람마다 자신의 상황을 투영해서 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스토리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같은 사람이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상황을 대입해 보게 된다. LESS IS MORE. 최소한의 텍스트(text)는 최대한의 콘텍스트(context)를 만들어낸다. 


예상을 벗어나는 반전이 있는 그림책도 좋다. 요즘은 드라마도 그렇지만, 책도 많이 보다 보면 예상 가능한 내용들이 있다. 영화, 소설 등 문학이나 예술 작품에서 조금 뻔한 이야기의 흐름을 클리셰라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스토리가 진화를 거듭하면서 클리셰를 깨는 반전 또한 하나의 클리셰가 되긴 했다. 국내에서 출판되는 그림책의 경우 주제의 범주가 그리 다양하지 않다 보니 내용이 충분히 예견 가능한 경우가 많다. (우리 엄마가 어느 날 옆집 아저씨와 사랑에 빠져 집을 나가는 그림책은 아직 보지 못했다. 막장 드라마에서는 너무 뻔한 이야기지만) 그런데 기대하지 않았던 그림책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론을 만나게 되면 상당히 재밌다. 마치 수줍음 많고 얌전한 사람이 장기자랑 시간에 꺾기춤을 추면 너무나 매력적이듯이. 반전의 효용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것, 바로 질문을 던지는 그림책이다.

하나의 기준을 꼽으라면 뭐니 뭐니 해도 이것뿐이다. 위의 두 기준도 이 기준을 충족할 때 효력이 생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좋은 책은 질문을 남긴다. 비단 그림책뿐만 아니라 좋은 예술작품은 어떤 형태로든 보는 이에게 질문을 남긴다. 그 질문은 작가가 품었던 '화두'일 터이다. 화두는 불교에서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구 하는 문제를 뜻하지만 요즘은 일상적인 삶에서도 개인이 풀고자 하는, 혹은 몰두해있는 무언가를 의미하기도 한다. 화두는 주제에 따라 철학자의 질문이 되기도, 과학자의 가설이 되기도, 또는 종교인의 믿음이 되기도 하고 예술가의 작품이 되기도 한다. 책을 만드는 작가 역시 시작은 화두가 아닐까. 화두에 대한 작가의 성찰은 책으로 남는다. 그래서 좋은 책은 작가가 품었던 화두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책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은 독자의 몫이다.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은 누군가를 통찰로 이끈다.

그림책 한 권으로도 읽기 전과 다른 감정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 그 감정이 늘 유쾌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불쾌함일 수도, 불편함일 수도 있다. 내가 외면해왔던 감정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좋은 그림책은 그림책테라피, 즉 심리상담의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대학에서 전공이 심리학이라 그런 그림책에 관심이 많기도 하거니와 개인 상담이나 집단 상담에서 그림책을 활용해보면 상담 도구로서 손색이 없다. 물론 좋은 그림책만 있다고 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책방에서 3년째 그림책테라피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모임명은 '깐따삐아'. 깐따삐아는 <아기공룡 둘리>에서 도우너가 온 행성의 이름이기도 하고 타임 코스모스를 움직이는 주문이기도 하다. 둘리와 친구들은 도우너와 함께 고장 난 바이올린과 빨간 고무다라이를 타고 깐따삐아로 출발한다. 좋은 그림책은 나를 찾는 여행을 시작하게 해주는 도구, 타임 코스모스가 될 수 있다.


Read much, but not many books.
많이 읽어라. 그러나 많은 책을 읽지는 마라.


책방 한 켠에 붙여둔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명언이다.

한 권의 좋은 그림책을 오래두고 깊이 사귀어본다면 열 친구보다 나을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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