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꾸준히 읽고 싶은데 이런저런 이유로 습관이 잡히지 않은 분들을 만나면 일단 독서모임에 참여해 보시라고 권한다. 일명 독서모임 전도사. 물론 권한다고 다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10명에게 추천하면 진짜 오는 분은 두세 명 정도이고 서너 명은 시간과 여건이 맞지 않아 못 오고, 나머지는 참여를 주저하며 꺼린다. 그런 분들의 마음에는 어떤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는데, 책 읽고 이야기 나눌 때 자신이 말을 똑부러지게 잘 못 할까 봐 걱정한다. ‘저는 말주변이 없어요’, ‘남들 앞에서 얘기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요.’라고 말한다. 그냥 책 읽고 편하게 자기가 느낀 것들을 얘기하는 시간이라고 강조해도 남들과 비교해 자신의 수준이 낮은 것은 아닌지 두려워한다. 이런 두려움들, 다 한국의 일등제일주의, 주입식 교육 탓으로 치자. 자기 생각을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그걸 누군가 평가하거나 비난할 거라고 여긴다. 그리고 토론이라고 하면 서로의 논리로 이기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걸 떠올린다. 말을 잘하는 것에 대한 기준도 높아서 손석희 정도 되어야 당당히 내가 말 좀 한다고 할 수 있으려나.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말을 미리 걱정하는 사람치고 말을 못 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말에 대해서 아침 저녁으로 걱정을 해도 모자랄 사람들, 즉 말이 지나치게 많거나 누가 봐도 부적절한 소통을 하는 분들은 이런 문제의식조차 없다는 게 문제다.
독서모임에서는 대화하는 능력은 당연히 중요하다.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정리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돋보이기도 하고 그런 부류가 중심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흔히 대화라고 하면 서로 말하는 모습을 연상하고 말을 잘하는 것이 대화의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독서모임을 오래 해오면서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걸 알게 되었다. 대화란 내가 말할 때 타인은 듣고 타인이 말할 때는 내가 듣는 상호작용을 말한다. 말하는 능력만큼 잘 듣는 능력이 필수인데,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 잘 듣는 사람이 훨씬 귀하다. 그리고 잘 듣는 것이 말 잘하는 것보다 고수의 능력이다. 총명하다고 할 때 총명의 한자 聰明을 보면 귀이耳 변을 쓰는 ‘귀밝을 총’이다. 총명함의 기본은 ‘잘 듣기’이다. 잘 듣는 사람은 깊이 생각할 수 있고,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잘 말할 수 있다.
요즘 독서모임 풍경 중에 예전과 많이 달라진 점은 남이 말하는 동안 휴대폰을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누군가 말하는 동안에도 카톡으로 용무를 주고받는다거나 갑자기 모르는 것을 검색하는 등 말하는 사람에게 집중하지 않는 이런 모습을 뭐라 할 수도 없는 것이 다들 공사다망하기도 하고 이제는 휴대폰이 신체의 일부, 제2의 뇌가 된 느낌이다. 누군가 말할 때 우리가 종종 머리 속으로는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처럼 제2의 뇌 속으로 자연스럽게 손이 간다. 휴대폰을 하면서도 남의 말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심리학자 M.스캇펙의 말처럼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면서 동시에 다른 일을 할 수는 없다.” (You cannot truly listen to anyone and do anything else at the same time) 듣는다는 것은 귀로만 하는 단일업무가 아니다. 눈도 듣는다. 눈은 다른 것을 보면서 귀로만 하는 경청이란 없다. 그런데 이게 뭐라고 핸드폰 하는 다 큰 어른들에게 보지 말라고 말하기도 그렇다.
성경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가복음 4장 23절)라는 구절이 있다. 어릴 적 저 성경구절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구절 외에도 예수님은 성경에서 거듭 듣기를 당부하셨다. 귀가 있으면 듣는 것은 당연한데 당연한 소리를 왜 반복하는지 몰랐다. 독서모임에서 많은 사람들을 접하면서 저 말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정말 듣지 않는구나! 듣고 있지만 듣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말을 듣지 않거나 흘려듣거나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예수가 말하는 들음이란 단순히 소리를 듣는 행위만을 말하지 않는다. 엄마가 밥먹어라 했을 때 그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은 소리를 듣는데 있지 않고 밥을 먹는 행위에 있다. 잘 들음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경직된 나를 버리고 빈 마음으로 듣는 행위다. 귀가 있다고 듣는 게 아니고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들린다. 단순히 소리를 듣는 행위를 물리적 듣기라 정의하고 내 삶을 변화시키는 듣기를 존재적 듣기라고 한다면 우리는 두가지 모두에서 자주 실패한다. 타인의 말은 물리적으로 듣는데 실패하고 책의 내용은 존재적으로 듣는데 실패한다. 이게 바로 독서모임의 설상가상이다.
상담 심리학을 공부해보면 상담 고수들의 핵심 능력은 '경청'에 있다는 걸 깨닫는다. 비싼 상담 비용을 내고 상담사는 ‘그렇군요’ 몇 마디만 하고 쉽게 돈을 번다고 농담처럼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몇 마디만 하는 것이 아무나 다다르기 힘든 경지임을 나도 상담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초보 상담자일수록 내담자보다 말이 많다. 종이도 여백이 있어야 글씨를 쓸 수 있고 가득 찬 항아리에는 물건을 더 넣을 수 없듯이 마음에도 빈 공간이 충분해야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들을 수 있다. 내 그릇이 이미 커서 다른 사람들을 충분히 담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연습이 필요하다. 내 마음에 빈 공간을 만드는 연습, 내 마음의 그릇을 조금씩 키우는 연습. 그 연습의 결과는 남의 말을 잘 들을 수 있게도 하지만 가장 큰 혜택은 내 안의 작은 목소리도 들을 수 있게 해준다. 내가 잘 말하지 못하고 잘 듣지 못하는 것이 독서모임에 오지 못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독서모임에 와야할 이유가 된다. 연습하기 참 좋은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