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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큼은 되지 않더라도

그래서 고마운 하루

by 한울

출처가 여러 곳인 찝찝한 기분들이 며칠간 쌓여, 오늘 하루는 뭔가 망가질 것만 같은 날.

나에겐 어제가 꼭 그랬다.


남자친구와 오래전부터 보기로 약속한 김일두의 공연이 있는 날. 합정의 카페 겸 공연장인 제비다방에서 열리는 공연이라 별도의 티켓 없이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공연을 볼 수 있는 구조이다. 근처에서 밥을 먹고 한 시간 전에는 들어가서 자리를 잡아두는 게 우리의 목표였기 때문에 일찍 준비를 마치고 지하철과 버스 시간표를 본다. 뭘 선택하든 약속시간보다는 꼭 10분 정도 늦을 거 같은 상황. 미리 늦을 거 같다고 연락을 남기고 길을 나선다. 저녁에 추워질 것을 대비한 긴팔 하나와 과제용 노트북 덕에 무거워진 가방을 메고 걸으니, 평소보다 느려진 발걸음 때문인지 눈앞에서 지하철을 놓치고 말았다. 괜히 더 무거워진 것 같은 가방 탓을 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다시 카드를 찍고 개찰구를 나와 버스를 탄다. 그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결국 약속시간보다 정확히 10분을 늦었는데, 오히려 남자친구가 나보다 5분 정도 더 늦었다. 첫 번째 생각대로 되지 않은 부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보니 2시간이나 이르게 도착하게 될 것 같아 정처 없이 거닐고 있었는데, 나의 방앗간인 인형 뽑기 가게를 발견했다. 나는 키위새 인형고리를 계속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거기에 마침 키위새 인형고리가 있는 거 아닌가. 3000원에 6번 기회를 주는데 5번째에 인형을 뽑아버렸다. 두 번째 생각대로 되지 않은 부분이었다.


키위새를 가방에 달고 카페로 이동했다. 마땅히 갈 곳 없을 때 만만한 게 프랜차이즈 카페다. 기프티콘으로 음료를 마시고 정확히 한 시간 전쯤 제비다방에 도착했는데, 이미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오가며 부딪히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우리 뒤로 계단에도 사람들이 꽉 차있는 것을 보고 반포기하고 있었을 때, 맨 뒤 직원 테이블에서 자리가 두 개 남으니 괜찮으면 합석하겠냐고 물어주셨다. 세 번째 생각대로 되지 않은 부분이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우리는 옆 책장에 가득 꽂힌 책을 꺼내 읽었다. 나름 이 분위기에 취해 시집 같은 것을 읽고 싶었는데 찾지를 못해서 아무 책이나 읽었다. 테이블 옆에 서 있던 분들은 계속 얘기를 주고받으셨다. 나는 이럴 때마다 내가 말재주꾼이 아닌 것에 약간 실망한다.


김일두의 무대가 시작되고, 편안한 분위기에 책장에 머리를 살짝 기대었는데 갑자기 내 시야에 시집이 보였다. 그 순간은 마법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분명히 없었던 것 같은데, 노래 한곡이 끝나고 쳐다볼 때마다 시집이 한 권씩 더 생겨났다. 김일두의 음악을 배경 삼아 시집의 아무 장이나 펼쳐 읽으며 몇 개의 시를 읽었다. 김일두 씨는 내가 듣고 싶었던 노래를 모두 불러주었고,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왔는데 사람들이 아직 많이 모여있었다. 인파를 뚫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예상만큼 춥지 않은 날씨에 놀랐다. 네 번째 생각대로 되지 않은 부분이었다.


뭔가 망가질 것만 같다는 기분으로 시작했던 하루를 곱씹어보면 약속시간에 생각보다 크게 늦지 않았고, 3천 원이라는 적은 금액으로 성취감을 획득했고, 김일두의 공연을 앉아서 편하게 보는 행운을 누렸고, 날씨는 여분의 긴팔이 필요 없을 만큼 좋았다.


생각만큼은 나쁜 하루가 되진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런 하루를 예상했기 때문에 작은 행운들을 더욱 감사히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최악을 상상했던 하루는 며칠간 때문힌 기분들을 풀어주는 하루가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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