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을 기다린다는 것은

발을 동동 고개를 추욱

by 하영

최근 내 브런치북 두 번째 글의 주인공에게 다시 연락을 했다.

5월까지 참아보려 했는데, 나의 손은 이성보다 빨랐다. 감정은 항상 몸을 이끄는 주체가 된다.

이성은 꼼짝도 못 하지.


[잘 지내고 있어요?]


카톡을 보내두고 하루 뒤, 그에게서 답이 왔다. 잘 지내고 있다고.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지 뭐야! 그리 다정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정말 예의차린 답이었는데 말이다.

그것은 아마 내가 그의 연락을 기다렸기 때문일 것이다.

기다림은 항상 설렘과 함께 상상을 낳는다. 상상은 불안이 되어 나에게 돌아오고, 돌아온 불안은 설렘을 삼켜버린다. 그때부터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상상의 바다에서 표류해야 하는 것이다. 가라앉거나.


'그가 내 연락을 무시할까?'

'연락하지 말라는 답이 오는 거 아니야?'

'싫은데 억지로 답하면 어떡하지?'

'분명 봤는데 무시하는 거야. 내가 싫어서.'


이 놀라운 사고의 흐름을 보라. 어찌나 찌질하고 찌질한가. 창피해서 제일 친한 친구에게조차 말 못 한다.

불안은 확신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의 연락을 받고 나니 그저 나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상모 돌리기까지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자괴감이 된다.

아, 나는 연락을 기다리는 게 정말 힘들다. 어쩌면 실제로 차이는 게 덜 힘들지도 모른다.


기다림은 왜 힘들까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아마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가능성에 대해 최악의 상상을 하도록 진화한 것은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최악을 대비해 미리 조심하거나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남편이 사냥을 나갔다가 매머드에 밟혀 죽거나, 아들이 장을 보러 나갔다가 우연히 혁명에 휘말려 참수당할 경우가 거의 없는(사람일은 모른다.) 현대에는 생존에 불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물론 현대에도 대형사고와 전쟁 같은 비극은 일어난다. 그런 경우엔 어쩌면 이런 상상력이 도움이 되겠으나, 나처럼 이런 자질구레한 연락을 기다리는데 최악의 상상을 하는 것은 생존에 좋지 않다. 죽고 싶어 지거든!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

어쩌면 나는 연락을 기다리다 조금 맛이 간 것 같다.

아무튼, 그에게 내가 당신을 좀 귀찮게 해도 되겠냐고 물었고, 그는 군대에 있기에 연락이 드물겠지만 괜찮다고 했다. 아싸.

그런데 정말 많이 드물긴 하다. 군인 치고도 드물다.

지금 나는 다음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진동이 울린다. 나는 또 말벌아저씨처럼 휴대폰을 향해 달려간다.

광고 푸시다. 나는 또다시 물미역 마냥 축 쳐진다.


마음의 방향이 같지 않음을 인정하도록 노력하는 오후 6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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