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얼굴의 우울

<고기능 우울증>을 읽고

by 엠마

"오늘 점심에 샌드위치를 드셨군요. 그럼 그 샌드위치, 무슨 맛이었나요?"


<고기능 우울증>의 저자 주디스 조셉 박사가 인터뷰에서 환자에게 던졌다는 이 질문에, 나조차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분명 무언가를 먹긴 했는데 맛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오후의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연료를 주입하듯 씹어 넘겼을 뿐이니까. 박사는 이를 무쾌감증이라고 불렀다. 맛을 느끼지 못하는 혀처럼, 삶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마음.


나는 내 하루를 내려다보았다. 새벽 5시 기상, 영어 토론 스터디 접속, 엄마표 영어 그룹 리딩, 시니어 영어 교육 이수, 한국어 교원 자격증 공부, 그리고 다음 학기 강의 준비까지. 누가 봐도 성실하게 사는 사람의 스케줄 표다. 미국에서 귀국하고 벌써 영어 관련 자격증을 5개나 땄다.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에너지가 넘치냐고 묻는다. 나는 그 칭찬에 '아니고, 아니에요.' 라며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하지만 현관문을 닫고 신발을 벗는 순간, 내 미소는 전원이 꺼진 로봇처럼 즉시 사라진다.


겉으로는 일상적인 기능을 문제없이 수행하지만,
내면에서는 지속적인 우울감과 공허함을 겪는 상태.


주디스 조셉 박사가 정의한 고기능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마주했을 때,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훈장처럼 달고 있던 이 바쁨이, 사실은 내 마음의 구멍을 가리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미국에서의 꿈같던 3년을 뒤로하고 한국에 돌아온 날 느꼈던 막막함, 그 낯선 공포를 잊기 위해 나는 숨이 찰 정도로 달리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우울증이라 하면 어두운 방, 이불 밖으로 나오지 못해 우는 모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나의 우울은 달랐다. 알람이 울리면 망설임 없이 일어나고, 기계처럼 하루를 완벽히 살아낸다. 겉은 멀쩡한데 속은 텅 빈, 기쁨의 스위치만 고장 난 상태. 그게 바로 나였다.


몸은 정직하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시간에 쫓겨 식탁에 제대로 앉아본 기억이 흐릿하다. 허기는 그저 귀찮은 신호일뿐이라, 빵 한 조각이나 달달한 과자로 대충 끼니를 때웠다. 그러고는 쏟아지는 잠을 쫓기 위해 카페인을 들이부었다. 그렇게 하루를 버티니 정작 쉬어야 할 밤에는 잠이 오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잠들지 못하는 새벽, 나는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찾았다. 불안을 잊으려 무의미한 영상을 넘기거나, TED 강의를 틀어놓고 누군가가 계속 떠드는 소리를 들어야만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잠드는 순간까지도 뇌를 쉬게 두지 못한 것이다. 이런 내가 싫어 핸드폰 감옥을 사서 가둬보기도 하고 전원을 꺼보기도 했지만,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핸드폰 소리가 사라진 뒤 찾아오는 그 무거운 정적을 견디는 게 더 괴로웠으니까.


주디스 조셉 박사의 말에 뜨끔했다. 그녀는 우리가 먹는 초가공식품이 뇌에 염증을 일으키고 기분을 망친다고 했다. 스트레스를 받을수록 설탕이 든 가공식품을 찾게 되는데, 이것이 우울감을 증폭시키는 악순환을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내 몸을 좋은 연료가 아닌, 나를 더 지치게 하는 것들로 채우고 있었다. 식사가 엉망인데 마음이 괜찮을 리 없었다.


이제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 한다. 나는 지금 외롭고, 미국에서의 삶이 그립고, 한국에서의 시작이 여전히 조금 두렵다. 바쁨을 훈장처럼 여기느라 소홀히 했던 내 몸과 마음을 이제는 돌봐야 한다. 강의를 하나 더 하고 자격증을 하나 더 따는 것보다 중요한 건, 오늘 점심 한 끼를 제대로 차려 먹는 일이다. 쫓기듯 과자 봉지를 뜯는 게 아니라, 따뜻한 밥과 반찬을 그릇에 담아 식탁에 앉으려 한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맛과 질감을 온전히 느끼며 천천히 씹어 삼키는 것. 그 사소한 식사 시간부터 나를 다시 챙기기 시작할 것이다.


나아가 내 곁의 사람들과 진심으로 연결되려 한다. 미국에서 만난 친구들이 내게 나눠주었던 그 따뜻한 시간들은 나를 괴롭히는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내가 이곳에서 만들어가야 할 삶의 이정표다. 이제 나는 조금 천천히 가려 한다. 치유는 더 많은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커피 한 잔의 향을 온전히 느끼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의 눈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됨을 믿으니까. 그렇게 천천히, 내 마음의 빈 공간을 따뜻한 밥심과 사람의 온기로 채워가고 싶다.


그리운 건 그곳이 아니라...

그때 나눴던 마음과 세계 각지의 음식들, 그리고 그 따뜻했던 시간들이다.

IMG_7435 2.HEIC
IMG_1960.HEIC
IMG_2642.heic
IMG_2744.HEIC
IMG_3502.HEIC
IMG_6140.heic
IMG_6910.HEIC
IMG_8166.HEIC
IMG_8522.heic
IMG_0436.HEIC


이전 10화곁에 있지 않을 때, 아이를 키우는 방법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