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부부, 잠들지 못하는 성벽

정현종의 시 <빈방>을 읽으며

by 엠마
책을 모두 내다가
마루에 쌓는다
장작 더미 같기도 하고
성벽 같기도 하며
폐허 같기도 하다
방이 텅 빈다...... 오오
나는 꽉찬다
이렇게 좋구나
이렇게 좋구나
빈 책장을 향하여 나는
춤을 춘다. 발작적으로
그는 서가를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빈 걸 끌어안으며, 이렇게

— 정현종, <빈방> 中



성벽이자 폐허인 나의 책상

정현종 시인은 방 안을 가득 채운 책들을 보며 '성벽'이자 '폐허'라고 했다. 지금 나의 육아휴직 기간도 딱 그 모습이다. 내 방 책상 위에는 한국어 교육론 리포트, 영어 수업 스크립트, 그리고 아이를 위해 고민하며 만든 보드게임 캐릭터 카드들이 장작더미처럼 높게 솟아 있다. 이 성벽은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더 나은 내가 되게 해줄 요새 같지만, 동시에 해치우지 못한 과업들이 무질서하게 널브러진 폐허이기도 하다.

무언가 더 해내야 한다는 강박은 종이 뭉치와 고민의 무게를 더한다. 욕심만큼 다 해치우지 못하고 바둥거리다 보면, 어느새 방은 꽉 차 있는데 마음은 시의 구절처럼 지독하게 '빈 것'을 껴안고 허덕이게 된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감각

이 불안은 밤이 되면 침대로 고스란히 옮겨온다. 사실 나의 불면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예민한 신경을 잠재워준 건 남편이라는 존재였다. 미국에서의 3년, 낯선 땅에서도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던 건 내가 무언가를 해내서가 아니라, 나를 무조건 믿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평온함 덕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남편은 곁에 없고, 잠은 다시 멀어졌다. 내가 두려운 것은 혼자 사는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 시간 속에서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감각이 옅어질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이 흐릿해질 때, 빈 침대에 눕는 일은 아무런 무장 없이 광야에 던져지는 것 같은 공포로 다가온다. 그 공포가 무서워 나는 밤마다 잠자러 가기를 주저하며 책상 앞을 떠나지 못한다.


임시 방편의 체크리스트

다음 날의 스케줄을 위해, 그리고 내가 그토록 갈구하는 공부의 효율을 위해 잠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요즘은 '잘 자는 것'을 목표로 삼고 나만의 생존 프로토콜을 가동한다. 내일 할 일을 적고, 스트레칭을 하고, 디바이스를 끄고, 책상을 깨끗이 치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체크리스트들이 정말 나를 살려줄 수 있을지 여전히 회의적이다. 그것은 무너져 내리는 성벽 아래에 임시로 괴어놓은 나무토막 같아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다시 불안의 악순환 속으로 나를 밀어 넣을 것만 같다. 책상을 다 치웠을 때 찾아오는 찰나의 평안 뒤에는 '이게 정말 최선일까'라는 의문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내 피요 내 살인 꽃 한 송이

시인은 시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책에서 해방돼야지
말에서 해방돼야지
.....

할 만한 일 하나를 말하노니
내 피요 내 살이요 뼈인 꽃 한 송이를 폭발시켜야지.

— 정현종, <빈방> 中

시인은 결국 장작더미와 성벽, 그리고 그 모든 폐허에서 벗어나라고 손짓한다. 머리로만 쌓아 올린 텍스트의 숲을 지나, 내 생명 자체인 '꽃 한 송이'를 피워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나의 꽃 한 송이는 무엇일까. 허공을 맴돌며 내 불안을 증식시키는 자격증과 커리어에 대한 강박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을 걷어내고 남은 날것의 나일까. 나는 이제 책장을 넘기는 대신 어디를 향해 손을 뻗어야 할까. 어쩌면 내가 그토록 무서워하는 그 '빈 침대'야말로, 내 피와 살과 뼈를 가진 꽃 한 송이를 폭발시키기 위해 마주해야 할 고독의 정원일지도 모른다.


성벽 같은 책상 앞을 떠나 빈 침대에 몸을 뉘어본다. 여전히 무섭고 불안하지만, 시인의 말처럼 이 폐허에서 해방될 그날을 꿈꾸며. 나는 내일 책 대신 펴보일 나의 '살아있는 손'이 어디를 향해야 할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더듬어본다.




IMG_8847.jpeg 이제 진짜 자자 ....
IMG_8848.jpeg 나의 빈 방



이전 12화AI 시대에, 나는 뭐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