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AI와 공부한다> 를 읽고
아이의 숙제 옆에서 시작된 질문
아이의 숙제를 옆에서 지켜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이 잦아졌다. 연필을 내려놓고 머리를 싸매고 있는 아이의 손을 바라본다. “이건 대체 무슨 뜻이야?”아이의 질문은 늘 사소한 데서 시작하지만, 대답하는 나는 언제나 조심스러워진다. 너무 앞서 가르치지는 않았는지, 너무 빨리 답을 주지는 않았는지. 가르치는 일보다 스스로 깨닫도록 기다리는 일이 더 어렵다는 걸, 부모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이 옆에서 하고 있는 이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 정답을 알려주는 사람도 아니고, 대신 풀어주는 사람도 아니다. 아이가 포기하지 않도록 옆에 앉아 있는 사람, 다시 시도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사람에 가깝다.
바로 그때 마음속에 오래 묻어두었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가르치고 싶은가. 한국어와 영어 교육으로 이어가고 싶은 이 커리어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선택일까. AI가 빠르게 교육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은 이 질문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만들었다. 설명은 점점 더 정확해지고, 반복 학습은 기계가 대신하는 시대에 사람이 가르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살만 칸의 《나는 AI와 공부한다》는 아이의 숙제 옆에서 시작된 이 질문을 끝까지 따라가 보기 위해 집어 든 책이었다.
부모의 마음은 늘 양가적이다.
아이를 스크린에서 멀리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좋은 도구는 놓치고 싶지 않다. AI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혼자 화면을 보며 문제를 풀고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지다가도, 같은 설명을 지치지 않고 반복해주는 모습을 보면 솔직히 안도하게 된다. 내가 매번 같은 온도와 같은 인내심으로 아이를 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부모의 현실과도 닿아 있다. 아이의 학습에서 가장 힘든 순간은 문제를 틀렸을 때가 아니라, 연필을 내려놓으며 “나 이거 못해”라고 말하는 순간이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아이가 의자를 뒤로 밀고, 눈길을 피한 채 종이를 접어버릴 때. 그 말 한마디에는 실력보다 훨씬 큰 감정이 들어 있다. 이미 몇 번 시도했고, 이미 스스로에게 실망했고, 더 이상 해보고 싶지 않다는 신호다.
그 순간 부모의 마음은 늘 갈라진다. 지금 포기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다시 앉히고 싶다가도, 억지로 밀어붙였다가 아이의 표정이 더 굳어질까 봐 망설이게 된다. “조금만 더 해보자”라는 말이 격려인지 압박인지 스스로도 헷갈린다. 하루 종일 쌓인 피로 위에서, 부모 역시 완벽한 인내심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이때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다. 틀린 이유를 설명하는 말도, 더 쉬운 문제도 아니다. 다시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감각, 실패해도 괜찮다는 믿음이다. 누군가 곁에 앉아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충분해”라고 말해주는 마음이다. 기술은 이 마음을 대신해줄 수는 없지만, 반복 연습과 설명처럼 에너지가 많이 드는 부분을 대신 맡아줄 수는 있다. 그 덕분에 부모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의 상태를 바라보고 기다려주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
수업이 아니라, 역할이 바뀌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장면이 있다. 미국에서 뭐라고 배우고 싶어서 온라인으로 들었던 한 작문 수업이다. 그 수업에서 교수는 AI 사용을 금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제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학생들은 먼저 AI로 초안을 쓰고, 그 글을 스스로 고쳤다. 다시 AI에게 피드백을 받고, 최종 원고를 완성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늘 같았다. 이 과정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를 돌아보는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 교수는 한 번도 문장을 대신 써주지 않았다. 대신 질문을 던졌다. “왜 이 문장을 살리고 싶었나요?” “이 선택은 누구를 위한 건가요?” 학생들이 어디에서 막히는지, 어떤 피드백에는 반응하고 어떤 조언은 흘려보내는지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동시에 매일 읽어야 할 분량과 제출 루틴을 관리했다. 그의 역할은 글의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과정이 무너지지 않도록 구조를 설계하는 일에 가까웠다.
이 경험은 살만 칸이 말하는 미래의 교실과 정확히 겹친다. 그가 그리는 교육의 변화는 부분적인 보완이 아니라, 수업 방식 자체를 뒤집는 전환이다. 강의는 더 이상 교실에서 할 필요가 없다. 설명은 집에서, 각자의 속도로 AI와 함께 듣는다. 되감고, 멈추고, 다시 묻는 일은 컴퓨터 앞에서 훨씬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
그 대신 학교는 전혀 다른 역할을 맡아야 한다. 학생들은 교실에서 사람을 만나야 한다. 함께 문제를 정의하고, 역할을 나누고,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의견이 충돌하고, 계획이 어그러지고, 실패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 실패를 다시 설계하는 과정을 통해 사고력과 협력 능력을 기른다. 작문 과제 역시 교실에서 설명을 듣고 집에서 혼자 완성해 오는 숙제가 아니라, 함께 읽고 고치며 사고를 확장하는 협업의 결과물이 된다.
지금처럼 교실에서 강의를 듣고, 집에서 과제를 하는 구조는 AI 시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 방식은 정보를 전달하기에는 효율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생각하는 힘과 관계 맺는 능력을 길러주지는 못했다. 이제는 순서를 뒤집어야 한다. 설명은 집에서, 배움의 핵심은 학교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모든 생각은 질문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나는 지금 ‘루틴 잉글리시’라는 이름의 엄마표 영어 공부 스터디 모임을 운영하고 있으며, 동시에 매일 공부를 인증하는 온라인 영어 수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이 모임에는 거창한 커리큘럼도, 누군가의 성취를 평가하는 시험도 없다. 대신 아주 단순하지만 분명한 원칙이 있다. 매일 공부할 것,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함께할 것이라는 원칙이다.
참여자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영어를 읽고, 듣고, 써본다. 완벽하게 해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일이다. 서로의 인증을 보며, 오늘도 누군가는 책을 펼쳤고 누군가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누군가는 하루를 건너뛰고, 누군가는 느린 속도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 모임에서는 그 누구도 뒤처진 사람으로 남지 않는다.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서로를 기다리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내가 이 글에서 말해온 교사의 재정의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나는 이 모임에서 지식을 전달하는 선생님의 역할을 맡고 있지 않다. 대신 학습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고, 매일의 루틴이 무너지지 않도록 환경을 설계하며, 참여자들이 포기하지 않도록 관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AI가 도움을 주고, 나는 사람으로서의 자리를 지킨다.
이런 실천을 이어가며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AI 시대에 교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강단 위에서 설명하는 존재에서, 배움이 지속될 수 있도록 흐름을 만드는 존재로 역할이 이동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 흐름 안에서, 누군가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스스로도 배우는 사람이 된다.
미국에서 보낸 시간은 이 선택의 배경이 되었다. 그곳에서 영어는 나와 아이 모두에게 생존의 언어였다. 학교 알림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하루가 불안했고, 아이가 친구들과 나눈 대화를 온전히 알아듣지 못하면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 시간을 지나며 나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언어를 가르친다는 일은 단순히 표현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덜 불안하게 만들어주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이 교사의 재정의 안에서 계속 성장하고 싶다. 한국어와 영어를 가르치는 사람이자, 동시에 배우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정답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이와 어른 모두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