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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마 Nov 30. 2023

뿌리 없는 나무 2

미국 주재원 부인으로 사는 삶


 기괴한 오렌지 나뭇가지가 앞마당에서 발견됐다. 말라죽은 나무뿌리 옆에서 자라나 온 이 나뭇가지에는 나뭇잎만큼 크고 많은 가시가 달려있었다. 아무도 물을 주지 않으니 나무는 비상상황이라 인식하고 스스로 나뭇잎을 가시로 변하게 한 것일까. 조금 멀리서 봤을 때는 그것을 평범한 나뭇가지라고 생각했다. 가시는 새로 나온 잎과 같은 크기, 색깔로 위장해 있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자 그것은 어린잎을 가장한 윤기 나는 가시였다. 가시는 보는 순간 손가락에 찔릴 것을 염려하게 될 만큼 크고 날카로웠다. 나는 물레방아의 날카로운 바늘에 찔려서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에 빠져들 거 같은 예감에 바로 그 가지를 잘라버렸다. 뭔가 기분 나쁜 것을 본 느낌이었다. 다시 오렌지 나무는 새까만 침묵에 싸였다.


 가시 돋친 나뭇가지는 집 안에서도 발견됐다. 나는 미국 주재원이 된 남편을 따라 평생 살던 터전을 떠나왔다. 우리는 미국에 몇 년 살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미국에 오면서 나는 흙을 잃어버리고 뿌리를 의심했다. 솜털 같은 뿌리라도 내리면 됐을 것을, 제대로 발을 뻗지 못한 채 1년이 흘렀다. 미국에 평생 살 계획이었다면 앞마당에 나가 이웃들과 더 교류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대문을 나서면 시작되는 영어 스트레스, 곧 떠날 이방인이라는 자격지심은 몇 발자국 너머 앞마당조차 나가지 못하게 했다. 집 안에 스스로 갇힌 나는 가시만 뾰족하게 세웠다. 남들에게 내보일 수 있는 자격증, 수료증, 학위, 점수를 만들어야 하나 하는 조급함과 갓 태어난 둘째 아이에게 결박되어 돌봄 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일상 속에서 나는 시들어갔다.


 나는 그동안 매일 창 밖을 내다보면서도 이 나뭇가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집 안에서 창 밖을 내다보는 일은 쉬웠다. 하지만 나무가 말라죽어가고 비명을 지르고 끝내 가시로 흉측하게 변해가는 소리를 듣는 일은 어려웠다. 그건 웃음소리였을까, 비명소리였을까. 내다보는 것만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문 밖으로 나가서 오렌지 나무를 가까이 들여다보아야만 가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나는 나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여유가 있었다면 나뭇잎이 가시로 변하기 전에 영양분을 전해줄 수 있었을까. 기괴한 나뭇가지를 보자마자 잘라버렸던 건, 숨기고 싶었던 내 가시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을지 모른다.


 나뭇가지를 잘라낸 후에도 찝찝한 기분이 가시질 않아 아들과 남편에게도 그 가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아들은 오히려 반색하며 그 나뭇가지를 다시 가져와서 키우자고 했다. 나는 무서운 걸 봤다고 했는데 아들은 그것이 특별한 것이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아들은 집 한가운데 있는 식탁 위 화병에 그 나뭇가지를 꽂아 두고 ‘스파이크’라고 이름까지 지어줬다. 아들은 가지에서 가시가 사라지고 오렌지 열매가 맺힐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 모습은 한국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한국에서는 나도 식물을 많이 키웠다. 우리 집에서 가장 튼튼해서 질긴 ‘고무줄’이라고 한 고무나무, 봄이 되면 아기 손 같은 새잎을 내밀던 ‘황칠이’라는 황칠나무. 각종 덩굴 식물은 꼬불거린다고 해서 ‘꼬머리’라고 했다. 식물들은 아이와 함께 자랐다. 하지만 우리는 몇 년 후에 돌아가야 하니 뿌리내린 식물을 샀다가 나중에 처분해야 할 걱정 때문에 식물을 집에 들이지 못했다.


 아들이 ‘스파이크’를 식탁에 둔 날 이후 나는 앞마당에 소리 없이 자라난 풀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잡초라고 하기엔 너무 싱그러운 녀석들을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잎이 둥글고 색이 진한 몇 개를 조심스럽게 삽으로 파서 뒷마당에 심었다. 묘목을 마트에서 새로 사지 않더라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뿌리내린 식물들을 키우면 되는 거였다. 아기 초록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자 집 안에 생기가 돌았다. 뿌리 잘린 꽃을 사다가 꽂아 두면 곧 시들어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을 먼저 우려했는데, 이번에는 찰나를 사는 존재가 아니라 제법 긴 시간을 걸쳐 시간을 견디어 내는 생명의 에너지를 집에 둔 기분이었다.


 ‘스파이크’는 여전히 우리 집 식탁 한가운데에서 머물러 있다. 오렌지가 곧 열릴 거라는 아들의 허무맹랑한 말을 이번에는 나도 한번 믿어 보기로 한다. 드라마를 볼 때 허구를 실재라고 믿음으로써 이야기를 즐기게 되듯이 나는 아들의 상상력에 살포시 기대어 내 비장함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동안 ‘인생이란 한 치 앞을 모르는 게임이야’라며 우연으로 점철된 불확실하고 덧없는 시간을 견딜 수 없어했다. 허망함을 잊으려고 목표를 세우고, 가시를 세웠다. 사실 나에게 필요한 건 ‘반드시 나의 끝은 해피엔딩 일 거야’라는 동화 같은 믿음이었던 것도 같다. ‘산타 할아버지가 소원을 이루어 주셨나 보다’ 하고 메마른 가지 대신에 슬쩍 잘 자란 오렌지 나무 가지로 바꿔 치기 해 해피엔딩을 만드는 것도 결국 나의 몫일테다. 하지만 이제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까지 종종 앞마당에 나가 오렌지 나무에 새 가지가 나지 않나 살피게 될 것이니, ‘스파이크’가 말라가는 것을 보는 것도 그리 슬프지만은 않을 것 같다.



집 앞에 오손도손 자라난 잡초 아닌 잡초들. 혼자서 이만큼이나 자랐다.
우리 집에 데려온 귀여운 녀석들 몇 개도 잘 자라고 있다.
뒷마당 한 곳도 초록이들이 오니 한층 밝아졌다.
오렌지 나무야, 잘 자라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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