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아빠> 뇌경색에 걸린 아빠와 딸의 이야기

by 정겨움

-어디 가세유?

-나는 972번 타고 00공원 가유

-아 00공원, 거긴 왜 가는데?

-그냥 가서 좀 걷고 산책할라고 가징~ 근데 연세가 어찌되셨댜?

-아 나는 72살이어유.

-아이구 한창이네~ 난 75살!

-진짜? 왜케 어려보여? 주름살이 하나도 없네~ 뭐 먹는댜?

-뭐 특별한 거 없는데.. 나 주름 많은데, 많잖어?

-아니여. 하나도 없구먼~

버스 정류장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엿듣는다. 길을 걷던 아버지가 힘드시다며 정류장에 앉으셨다. 할머니는 연로하셨지만 정정해 보인다. 얼굴에 보이는 활력과 생기에서 삶의 건강함을 엿 볼 수 있다.


건강하게 늙는다는 건 얼마나 큰 복인가!

할머니들 옆에 앉아 계신 아빠를 보는데, 세상에.. 아빠가 딱히 젊어 보이지 않는다. 나한테는 영원한 아빠인데… 벌써 할아버지가 된 거구나. 인정하기 싫다.

(할머니) 아저씨는 몇 세에유?

말 잘 붙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아빠에게 말을 건넨다.

(아빠) 75세..요.

(할머니) 아이고 그럼 나보다 위네? 오빠구먼~ 깔깔깔

아빠는 낯선 사람과 잘 대화를 하지 않는다. 최대한 공손하게 “예~예~”하고 답하지만 깔깔 거리는 분위기를 시끄러워하고 누군가의 관심을 불편해 한다.

그나저나, 또 아빠가 나이를 속였네? 75세 아닌데….

나이를 제대로 말해주려고 했다가 아빠한테 가자미 눈흘김과 손으로 툭툭~ 치면서 ‘가만히 있어!’ 압박을 받은 적이 많아서 이번엔 가만히 있기로 한다.

내가 모르는 으르신들의 세상에서는 나이가 많다고 해야 편한 가 보다.

아빠는 늘 그 무리에서 최고 으르신과 동일한 나이를 말한다. 거짓말쟁이.

쭈글쭈글~ 그러고 보니 우리 아빠 얼굴에 주름살이 정말 많네?

할아버지가 된 나의 아빠를 쳐다본다.


아빠가 건강했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빠는 여전히 세상 혼자 사는 듯 성질을 부리면서 사업을 하고 계실테지, 가끔 나를 보러 서울에 오고, 어쩌면 해외 여행도 한 두번 같이 했을 지 모르겠다. 아빠는 해외의 좋은 풍경을 내게 보여주고 싶어하셨으니까.

분명 여자친구도 있었을 꺼다. 아빠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분이셔서 누군가 곁에 두길 원하셨을 것 같다. 또 결혼했으면 나 3번째로 엄마 생기는 거였는데…


(아버지, 그래주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는 두 명이면 충분한 것 같아요.)

아빠가 아프지 않고, 그래서 서로를 불신하고 할퀴는 사건들이 없었다면

가족들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첫 월급을 탔을 때 키워주신 어머니께 화장품 선물을 드렸던 내 마음 그대로,

언니와 처음 술을 마시던 날 나를 미워했다는 언니의 마음을 품고 싶었던 그 마음 그대로,

작은 오빠의 딸이자 나의 조카인 아이에게 줄 선물을 영국에서 국제소포로 보낸 마음 그대로,

있었을 수도 있었을까?

그렇게 나는 그들에게 동생으로, 그들은 내게 언니 오빠로 남을 수 있었을까?

잠시 상상해 본다.

마음이 아린다.


나만큼이나 언니 오빠도 상처가 깊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우리 모두가 안다.

그 강이 아빠의 주름살 속에서 흐른다. 이제는 깊게 패여서 건널 수 없는 강, 그 속으로 사라져버린 버린 나의 가족들.

아빠의 병으로 배우고, 보이게 된 것들이 많아서 감사하지만 때로는 그 시간들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만약에,

그럴 수 있었다면,

상상을 했다.

오랜만에.

간만에.




끊겨버린 가족들.
그래도 행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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