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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겨움 Dec 28. 2019

제 (마음)건강비결이요?

흔들리는 나를 잡아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겨움아.. 모두가 너처럼 중심이 서 있진 않아. 난 네 아픔보다는 그 속에서 어떻게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는지를 썼으면 좋겠어.”


친한 친구 녀석이 브런치 글을 읽고 내게 말했다. 그러게... 어쩌다가 난 한 번도 일탈을 하지 않고 성실하게 꾸역꾸역 지금까지 살고 있는 걸까?


세상 쾌활하고 씩씩하고 열정 넘치는 사람으로 말이다. 오랫동안 그 이유가 뭘까에 대해 고민했고 이 글을 쓴다.



부디 그대 나를 잡아줘.
흔들리는 나를 일으켜.
제발. 이 거친 파도가
날 집어삼키지 않게.

-부디, 심규선-




어렸을 땐, 밝은 척을 하고 산다고 생각했다.

감당하기 벅찬 하루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그냥 우는 것뿐이었으니까.


근데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었다.

난 선천적으로 밝은 사람이라는 걸.


1. 쾌활 유전자


밝은 성격은 친엄마를 쏙 빼닮았다. 엄마랑 나는 정말 말도 안 되게 쾌활하다. 숱한 사건들 속에서 밝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을 ‘엄마의 피’로 꼽는다. 엄마는 쾌활 유전자를 주었고, 나는 그 유전자를 잘 보존하고 키웠다.


아빠가 난동을 부리고 나가면 엄마와 나는 서로 벌겋게 팅팅 부은 눈을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아빠와 전쟁을 치르면서 피가 거꾸로 솟았다가, 눈물만 계속 흘리다가, 이렇게 말하면 이해해 주겠지 하고 애원을 하다 보면...


배가 고프다.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아빠가 휭~ 나가버리면 우리는 바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때 먹는 라면은 정말 꿀맛이었다.


아빠의 존재가 너무 버거운 날이면 볼멘소리로 “어쩜 그렇게 남자 보는 눈이 없어?”라고 엄마를 탓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내가 속았지 속았어.” 엄마는 받아친다. “엄마. 아빠는 진짜 심하게 어디가 아픈 사람 같아. 진짜 내 아빠 하기 싫어.” 계속 투덜거리면 “그래도 네 아빠가 널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데.” 엄마는 말한다. “아니, 왜 이럴 때만 내 아빠래? 엄마 남편이면서.” “어머나.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얘. 내 남편이라니..” 서로가 감당해야 하는 존재로 아빠를 미루면서 토닥토닥거리다 보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엄마가 자신의 동굴 안으로 숨거나 희망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해줘서 난 웃으며 자랄 수 있었다. 그런 순간에도 툭툭~ 털고 일어서는 힘을 엄마에게 받았다.



2. 단 한 사람


돌이켜보면 정말 죽으라는 법은 없었나 보다. 키워주신 엄마가 이혼을 하겠다고 언니를 데리고 집을 나갔을 때, 집에는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나를 가장 아꼈다. 아들만 좋아하는 할머니가 손주 둘을 제치고, 밖에서  데리고 온 손녀를 예뻐했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참 아이러니하다. 키가 갑자기 커서 시력이 뚝뚝 떨어질 때도 “아침부터 안경 쓴 여자를 보면 하루 재수가 없다”며 안경을 쓰지 못하게 했고, 치킨을 먹을 때 닭날개를 먹지 못하게 했던 쾌쾌 묵은 가부장적 정신의 결정체가 할머니였다. 계집애가 바람난다는 이유 하나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난생처음으로 닭날개를 먹었을 때 그 배신감은 말로 못한다. 그렇게 맛있는 날개를 어린 시절 내내 못 먹게 하다니...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 암튼 어린 시절 내 곁에는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의 가장 아픈 손가락은 나였다. 배움이 짧아 글을 읽지 못하는 할머니는 4살에 글을 읽는 내가 자랑스러워 경로원에 매일 데리고 다녔고, 초등학교 시절 등교와 하교를 직접 시켰다. 오빠에게 맞을 때에도 할머니는 내 대신 오빠들에게 온갖 저주와 욕을 퍼부어주었고, 키워주신 엄마가 나를 조금이라도 구박한다고 치면 엄마를 되레 구박하여 고부갈등의 중심에 섰다. 그리고 아빠에게 내가 얼마나 구박덩어리로 크고 있는지 몰래 일러바쳤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내 엄마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단 한 사람이었다.


할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신 후, 친엄마와 아빠는 재혼을 했다. 아빠는 다시 폭력적인 사람이 되었고 그 상대만 바뀐 느낌이었다. 그 시절 아빠에 대한 증오는 내 정신을 갉아먹을 만큼 거대했다.


하지만 친엄마는 내게 무한한 사랑을 주며 따듯한 양지로 이끌어줬다. 우리는 수다쟁이 었다. 어떤 날은 새벽 3시가 될 때까지 졸린 눈을 비비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처녀였던 엄마가 유부남인 아빠를 어떻게 하다 만났고, 왜 아빠에게 어린 나를 버리고 갔으며, 그 이후에 결혼한 아저씨와의 결혼생활은 어땠는지, 외할머니를 떠나보냈을 때 그것이 엄마가 처녀의 몸으로 나를 낳으면서 맘고생을 시킨 결과 같아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었다. 우린 같이 울고 웃으며 함께 하지 못했던 세월들에 대한 감정을 공유해갔다.


한 번도 내가 예쁘거나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엄마를 만난 후에야 나도 사랑받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엄마의 인생이 나로 인해서 많은 부분 부서진 만큼 잘 커서 보답하고 싶었다. 그래서 방황할 수 없었다. 공부를 더욱 열심히 했고,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 흔한 사춘기도 겪지 못했던 건 나보다 더 사춘기 같은 아빠 때문도 있었지만, 엄마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0대와 20대에 나를 잡아준 건 엄마였다. 나를 믿는 엄마의 마음에 보답하고 싶은 욕심으로 컸다.



20대와 30대, 내 곁엔 진짜 친구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친구 한 명과 대학교 친구 두 명, 총 4명의 계집애들이 서울에서 첫 살림을 차렸다. 방 두 개의 작은 원룸이었다. 집에서 갖은 식기를 갖고 와서 방을 꾸미고 일 년에 4번씩 서로의 생일날에는 순대와 떡볶이, 피자를 시켜서 거대한 생일 파티를 했다.


7년의 세월 동안 우린 함께 살았다. 서로의 방황하는 밤들을 함께 보냈고, 함께 웃고 울었다. 아빠가 뇌경색으로 쓰러지던 날도 친구들은 내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 키워주신 엄마가 몰래 혼인신고를 한 것을 알게 된 후에 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라는 존재를 저주하고 사라지고 싶었다. 약을 많이 먹고 죽어버려야겠다고 다짐하고 약상자를 찾았는데 망할. 친구 녀석이 며칠 전에 정리를 하면서 내가 모르는 곳으로 약상자를 옮겨놨다. 약상자도 못 찾는 나를 한탄하며 펑펑 울었다. 그렇게 울고 나니 죽을 용기가 다시 사라졌다.


힘든 날은 몇일을 계속 잠만 잤다. 그러면 친구들은 잠든 내 옆에 먹을 것을 사다 주고 까치발로 조심조심 다녔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술에 취해서 음식을 만들어주고, 아무 말없이 나를 꽉 안아줬다.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친구들이 있어 2.30대를 건강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 녀석들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많이 삐뚤어지고 세상에서 나만 힘든 줄 아는 이기적인 징징이가 되었을 것이다.



3. 아픈 손가락을 보이기


“겨움아. 아픈 손가락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마. 나중에 자기들이 궁지에 몰리면 그 손가락을 무는 게 사람이야.” 친구들에게 속을 비추고, 연애를 시작하면 가정사부터 까발리고 만나는 내 모습을 엄마는 많이 불안해했다.(지금도 탐탁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아픈 손가락을 내 사람들에게 보인다. 천운인지 아직까지 그 손가락을 앙~하고 문 녀석은 없다.


브런치에 글을 하나씩 쓰면서 어떤 날은 눈물이 펑펑 났고, 글을 쓰고 나서 발행을 할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철저히 1인칭 시점으로 쓰인 이 글이 유명해져서 아빠에게, 다른 가족들에게 상처가 될까 봐 무섭기도 했고(그럴 일은 없을 듯하다), 내 삶을 글로 쓰면 쓸수록 그 무게가 가벼워지는 게 딱히 기분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내 감정을 다시 들여다보고, 그것을 남에게 이야기하듯이 풀어 헤치는 것 자체가 ‘치유’가 되었다. 그래서 이 변태 같은 집안사 밝히는 글을 지속적으로 쓰고 있나 보다.


모두가 녹록지 않은 삶을 보내고 있다. 어린 시절 내게 있었던 그 힘듦의 에너지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친구의 아픔에 같이 펑펑 울 수 있는 공감의 폭을 만들어 줬고, 폭력과 고성을 용납하지 않고 당당히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당돌한 나를 만들었다.


그래서 난 나라는 사람의 뿌리를 감추기보다는 드러내고 싶다. 그랬을 때 사람들과 진심으로 연대할 수 있고, 굳이 거짓말하지 않아도 될 때 편안함을 느낀다. 지금 내 곁의 진실된 사람들은 모두 내 아픈 손가락을 어루만져주는 존재들이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기에 건강한 삶을 만들 수 있었다.


누군가 지금 깜깜한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있을 것이다. 내 가장 아픈 손가락을 보이는 이 글들이 한 줄기의 빛이 되었으면 좋겠다.


결국은 끝이 날 것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지겠지만 그럼에도 젠쟝. 더럽게 힘드네~하하하 웃어버릴 것. 주변에 숨기지 말고 아픈 손가락을 보이면서 구조신호를 보낼 것.


그럼 누군가 당신의 손을 잡아줄 테니.




이상, 나는 마음이 건강하다는 자뻑글이었음.

부끄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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