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거나 말거나.
서른여섯 살, 순수함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을 수 있지만.. 순수함이 아직 있다고 믿고 산다.
내가 순수하다고 믿는 데는 여러 가지 증거가 있다. 우선 난 비를 보면 아직도 쫄딱 맞으며 뛰어다니고 싶다. 이걸 순수한 게 아니라 그냥 똘끼라고 치부한다면 또 할 말이 없지만, 속옷까지 다 젖을 정도로 비를 맞고 다니면 자유로운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너의 시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하며 대범하게 삶을 맞이하는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은 느낌이랄까? 훗. 난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살지. 젖은 옷은 갈아입으면 돼. 속옷? 비추면 어때. 끈팬티도 아닌데 까짓 꺼.
여기까지 글을 쓰다가 근데 이게 '순수'와 맞닿는 지점인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순수란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음.' ,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음.'이란다.
그렇다면 말이 달라지네.
내가 순수하다는 다른 증거로 '난 사람을 만날 때 첫인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첫인상 자체에 크게 관심이 없기도 하고, 사람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의 숨은 의도나 저의도 모른다. 알아차리지 못해서 뒤통수를 맞고 산다. 뒤통수도 한두 번으론 깨닫지 못하고, 여섯일곱 번은 맞아서 주변에서 나의 미련함에 치를 떨 정도가 돼야 '아... 그런 사람이구나' 한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은 나와 상극인데, 뭐가 진짜인 지를 아예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늘 "으아아~~~~"하면서 창 하나 들고 직선으로 뛰어가서 돌파하는 성격인지라... 상대도 나 같을 거라고 착각하면서 산다. 그래서 숨은 의도를 갖고 말하거나 판을 짜면서 상대를 공략하는 사람이 제일 피곤시렵다.
관계에서의 계산도 적다. (없다고 썼다가 고쳐 썼다.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한 번 나의 세상으로 들어오면 그때부터는 뭐가 이득이고 손해인 지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없다. 늘 내가 받게 되는 관계가 있고, 내가 주는 관계가 있다. 그렇게 돌고 돌아서 우린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며 산다.
회사에서 친하게 지내는 짝꿍 과장님은 날 순수하다고 가장 많이 말해주는 사람이다. 말하는 것 그대로, 보이는 것 그대로가 나란다. 가끔은 정말 내가 그런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순간도 있지만 (쓰레기 같은 생각도 많이 하기 때문에), 옆에서 치켜세워 준 덕에 36살의 내가 아직도 순수하다고 믿고 사는. 그렇게 믿는 걸 보니 진짜 순수한 건가?
이번 글은 망한 거 같다.
의식의 흐름대로 썼더니 그렇다.
글도, 인생도 편집이 필요하군.
그래도 이번 글은 '좋은 글로 인정받고 싶은 사사로운 욕심 없이' 순수하게 발행하련다.
#가장순수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