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어깨 나의 무릎

4화

by 안스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서호와 이진 둘 사이에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끼어들지 않았다. 얼음, 하고 누군가가 그 둘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얼려버린 듯 서호는 이진을, 이진은 서호를 응시하며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촘촘하고 어색한 침묵을 결국 먼저 깨뜨린 것은 서호였다.


“윤이진. 오랜만이다.”


드디어 그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두 주먹을 꼭 쥔 채 귀신이라도 만난 것처럼 바짝 얼어붙어 덜덜 떨고 있는 이진의 표정을 바라보며 서호는 작게 침을 삼키고는 애써 태연한 척 작업실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덧붙였다.


“빈 손으로 오긴 좀 그래서.”


작업실 중간에 위치한 네모난 테이블로 다가간 서호는 그 위에 커피가 든 캐리어를 올려놓았다. 아직도 그 자리에 멀뚱히 서있는 이진을 향해 시선을 돌린 서호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섰다.


“나 약속 잡고 온 거야. 스튜디오 에어스트 대표가 나야.”


네모 반듯한 명함을 이진의 앞에 내민 그의 손이 한동안 무안하게 떠있었다. 가만히 그가 내민 명함을 내려다보던 이진의 시선이 다시 올라가더니 미세하게 떨리던 서호의 두 눈으로 향했다. 고작 삼십 센티를 사이에 두고 이진의 얼굴을 마주하자 서호의 내면에서 알 수 없는 복받침이 서서히 밀고 올라왔다. 이 얼굴을 보자고 십 사 년을 헤맸단 말이지. 언젠가 다시 마주하게 되면 어떤 날카로운 비난의 말을 쏟아낼까 수십 번 상상했었는데. 그 상상은 수포로 돌아가고 현실에 서있는 그의 입은 오히려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었다.


화장기가 없는 이진의 피부는 여전히 하얗고 투명했다. 잔뜩 경계심서린, 불안함에 버무려진 그녀의 눈빛은 이제 한결 편해 보였다. 서호는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속으로 생각했다. 이진은 천천히 손을 들더니 그의 명함을 받아 들었다. ‘스튜디오 Erst 대표이사 권서호’라고 적힌 글을 내려다보던 이진의 떨리는 입가가 고스란히 서호의 시선에 포착되었다. 그는 뒤로 돌아 중앙 테이블로 다가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확히 십 사 년 만이네. 네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그날 이후로 말이야.”

“어떻게 찾았어?”

“… 지극히 우연히. 제주에서 네가 강연한 걸 봤거든. 와서 앉아. 너한테 따지러 온 거 아니고, 진짜로 협업 제안하려 온 거니까.”


서호는 의자를 꺼내 앉더니 한쪽 다리를 꼬고서 가만히 이진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이진은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결심이 선 듯 서호의 맞은편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럼 나도 본론을 말할게. 미안하지만 그 제안 거절할게.”

“그 이유가 혹시 나 때문인가?”

“아니. 지금 다른 일에 신경 쓸 여력 없어. 조만간 전시회도 있고.”

“하루면 충분히 끝나는 일이야. 네 시간 오래 안 뺏어. 걱정 마.”

“그래도 싫어.”

“이진아.”


서호는 이진의 두 눈을 보며 말하고 있었지만, 이진은 계속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말하고 있었다. 서호의 입에서 다정히 그녀의 이름이 불리어지자, 이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서호를 보았다.


“적어도 수천번, 아니 수만 번 너랑 다시 만나는 걸 상상했어. 길을 걷다가 서울 한 복판에서 우연히 만난다던지, 접촉사고가 났는데 상대방 차주가 너였다던지, 소개팅에 나갔는데 그 상대가 너였다던지 하는 별의별 상상을 다했거든, 나.”

“….”

“혼자서 지지고 볶고 영화 찍고 드라마 찍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그때마다 내가 딱 바란 건 하나였어. 네가 옛날보다 여유로워졌으면 했어. 더 이상 길고양이 같던 모습 말고, 집에서 곱게 자란 고양이처럼 지냈으면 했어.”

“….”

“지금 보니까 하늘이 그 기도는 들어준 것 같다.”


흐트러진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 애써 어금니를 꽉 깨물던 이진의 눈빛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촉촉해진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서호의 얼굴 또한 점점 다시 상기되어가고 있었다. 그때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서호의 입에서 대뜸 질문이 튀어나왔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 결혼했냐?”

“… 뭐?”

“결혼했냐고. 했으면 애는 있어?”


잠깐 머뭇거리던 이진의 입에서 선뜻 대답이 흘렀다.


“응. 결혼했고 애도 있어.”

“아…. 아깝네. 결혼 안 했으면 대놓고 좀 꼬시려고 했는데.”


그녀의 거짓말을 단번에 관통했다는 듯 형형해진 눈빛으로 서호는 이진의 흔들리는 시선을 붙잡으며 덧붙였다.


“결혼 안 했고, 애인도 없으면 내가 너 다시 제대로 꼬시려고 했거든.”

“… 권서호.”

“좋다. 네 입에서 내 이름 다시 불리는 거.”

“….”

“이진아.”


서호는 이진에게 향해있던 시선을 돌려 창밖으로 향했다. 맑은 여름 하늘만 보이던 창 밖 아래에는 담장을 타고 흐드러지게 핀 능소화가 보이겠지. 불러도 대답 없는 이진을 바라보지 않은 채 서호는 여전히 창 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직이 말을 이었다.


“이 동네는 능소화가 엄청 폈네. 서울은 능소화 찾기가 힘들어.”

“….”


그의 입에서 능소화란 단어가 튀어나오자 그녀의 목울대는 대답대신 작게 한 번 일렁거렸다.


“야, 윤이진. 나는 그날 이후로 매년 여름마다 이 꽃 생각이나. 너도 기억하지? 능소화 꽃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툭 소리가 나니까 너 화들짝 놀랐었잖아.”


그때가 떠오른 듯 서호의 초점이 순간 멍해졌다. 순간 울컥한 듯 그의 눈가는 빠른 속도로 촉촉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아랫입술을 작게 베어문 서호의 입가에서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그때만큼은 둘은 같은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테이블 아래 앞치마 자락을 꼭 쥔 이진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고, 맞은편에 앉은 서호의 속눈썹도 미세하게 진동이 일었다. 몇 번 느리게 꿈벅거리던 그의 시선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 이진의 얼굴로 향했다. 낮게 숨을 들이마시던 서호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안쪽 호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이진이 테이블 위에 올려둔 자신의 명함을 가져가더니 뒷면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과거는 과거고. 내 제안은 진심이야. 이번 뮤직비디오랑 네 글씨 분위기랑 잘 맞을 거 같거든. 이건 이번 뮤직비디오 노래 제목이야. 거절은 거절할게. 천천히 생각해 보고 연락 줘.”


또박또박 글자를 써 내려간 서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이진의 앞에 다시 명함을 쓱 내밀었다.

그 위에 써진 글씨를 따라 주욱 흝어내려가던 이진의 눈빛이 다시 처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모를 리 없는 서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펜을 다시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시선 끝에 방금까지 이진이 화선지 위에 쓰고 있던 한자 ‘忘’이 들어왔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입구로 돌리며 서호는 마지막으로 이진을 향해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아메리카노는 내가 가져갈게. 너는 라테 마셔.”


다시 종을 딸랑 울리며 서호가 작업실을 빠져나가고 그가 내민 명함 위에 적힌 이번 뮤직비디오 노래 제목을 내려다보던 이진의 눈에서 결국엔 굵은 눈물이 툭 떨어졌다.


‘다시 시작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p.s. 사실은 사적인 감정이 들어간 제안임. 십 사 년 동안 나는 여전히 걸어 다니는 네잎클로버.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계단을 내려온 서호는 건물 밖을 빠져나오자마자 보이는 능소화 담을 향해 주저 없이 걸어갔다. 주홍색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능소화 덩굴을 향해 바짝 다가간 서호는 멍하니 꽃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서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고 서호는 커피를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통화버튼을 눌렀다.


[감독님. 미팅은 끝나셨어요?]

“어. 잘 끝났어.”

[… 어떠세요? 감독님 제안 받아들이실 거 같으세요?]

“…어. 조만간 연락 올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그런 게 있어. 지금 스튜디오로 갈 테니까 마지막으로 콘티 다시 확인해 보자. 타이포는 맨 마지막에 작업하는 걸로 잡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전화를 끊은 서호의 눈에는 아직도 능소화가 머물러있었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매일같이 작업실 밖으로 보이는 능소화. 한쪽 벽에 붙은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검정치마의 앨범. 그녀의 손목에 걸려있던 네잎클로버 모양의 팔찌. 이만하면 너도 나를 못 잊었다는 증거가 충분하지.


그리고 하나 더. 서호의 머릿속에 그녀가 방금까지 쓰고 있었던 한자 ‘忘 ’이 떠올랐다.

그 옆에 더 그어진 점 하나는 미련인가, 아니면 후횐가.


서호의 한쪽 입가가 점점 올라갔고, 이내 그는 한 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끝을 둥그렇게 모으더니 바로 앞에 있던 능소화 꽃잎 하나를 꿀밤 먹이듯 건드렸다. 그 바람에 간신히 매달려있던 능소화 꽃 하나가 바닥으로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서호의 머릿속에 십 사 년 전 어느 여름 날, 그의 앞에서 눈을 꼭 감고 있던 이진의 어깨가 깜짝 놀라 움츠러드는 것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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