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어깨 나의 무릎

3화

by 안스

서호의 검은 SUV는 골목 옆에 다가가 섰다. 더 이상 골목 안으로 진입하면 주차하기가 번거로워질 것 같았다. 좁은 골목으로 밀고 들어가기엔, 그의 SUV는 너무 크고 화려했다.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던 서호의 표정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내비게이션 상으로 앞의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백여 미터만 더 가면 바로 이진의 작업실이었다. 서울에서 한 시간 즘 떨어진 경기도의 어느 동네. 그 곳에 이진이 있었다.


빈 손으로 가기엔 좀 민망하여 서호는 조금 뒤에 위치한 카페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의 카페 내부는 한적했고 카운터에 앉아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직원이 서호가 들어서자 곧장 일어나 반갑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테이크 아웃이세요?”

“네. 일단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랑….”


메뉴를 내려다보던 서호의 시선이 멈칫거렸다. 어떤 걸 골라야 하지? 아메리카노는 여전히 싫어하려나. 순간 고민하던 그는 민망한 듯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들어 직원을 향해 물었다.


“… 혹시 근처 서예가 윤이진 작가님도 이 카페에 자주 오시나요? 바로 옆 골목인데.”

“아… 윤이진 작가님요. 거의 매일 오시죠. 저희 단골이신걸요.”

“그럼 작가님은 어떤 커피를 주로 드시나요? 제가 작가님 취향을 잘 몰라서요.”

“음. 이런 말씀드리긴 뭐 하지만….”


직원은 목소리를 낮추며 카운터 너머 서호를 향해 상체를 가까이 댔다. 카페 내부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지만 누가 듣기라도 할 것처럼 조심스러워하며 직원은 은은한 미소와 함께 나직이 덧붙였다.


“윤이진 작가님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실 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드시고요. 기분이 좋으실 때는 아이스 라테를 드십니다.”


직원의 말에 서호의 입가에 참을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단속하려 서호는 손을 들어 입가를 문질렀다.


“그럼 아이스 라테도 한 잔 주세요. 작가님께서 저를 보고 부디 기분이 좋으셨으면 좋겠네요.”




커피가 준비되는 동안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덧붙이고는 서호는 카페 밖으로 나왔다. 그의 시선에 흡연자를 위해 카페에서 준비해 놓은 듯한 뚝배기 그릇의 재떨이가 포착되자 그 곁으로 다가간 서호는 연초를 꺼내 물었다. 그 끝에 불을 붙이며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다가 이내 휴대폰 너머에서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뭐 하냐.”

[바빠. 아주머님들 새참 준비하고 있어.]

“아, 이제 슬슬 밭일 바빠질 때네. 그럼 용건만 간단히 할게.”

[무슨 일인데 그래?]


스피커폰을 켜놓고 말하는 듯 배영의 목소리는 좀 떨어진 거리에서 들려왔다.


“배영아. 나 윤이진 찾았다.”

[뭐!? 아, 나 깜짝 놀라서 지금 미숫가루 통 엎었어. 젠장. 난리 났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너 진짜야? 윤이진 찾았다고?]

“어. 십 분뒤에 만나러 갈 거야.”

[대박. 실화냐 진짜? 어떻게 찾았는데. 어딨는데 걔 지금.]


흥분으로 잔뜩 데시벨이 올라간 배영의 목소리가 서호의 귀에 빠르게 타고 넘어왔다. 연초 끝을 길게 빨며 서호는 그 김에 숨을 고르는 듯했다. 바닥을 한 번 내려다본 그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해 줄게. 너한테 첫 번째로 말해주고 싶었어.”

[… 권서호. 일단 윤이진 만나면 애인은 있는지, 결혼은 했는지 그거부터 먼저 물어봐 알겠지.]

“뭐라는 거야.”

[이제 나도 죄책감 좀 덜어도 되냐.]

“그건 두고 보고.”

[자식. 아무튼 축하한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술래잡기 드디어 끝났네.]

“이따가 다시 연락할게.”


통화를 끊은 서호의 입가에는 아직 내려가지 못한 입꼬리가 두둥실 떠있었다. 아직도 길게 남은 장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그는 카페 안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캐리어에 든 두 잔의 커피를 한 손에 쥔 채 이진의 작업실로 향하는 서호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카페에서 나와 골목길을 꺾자마자 어느 단독주택의 담장을 타고 보인 주홍빛의 능소화를 발견하자마자 제동이 걸린 듯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가만히 주홍빛으로 물든 담장을 멍하니 쳐다보던 서호의 시선이 왼쪽으로 돌아가더니 맞은편 건물 2층에 위치한 이진의 작업실로 향했다. 그리고 점점 밑으로 내려간 그의 고개는 바닥의 검은 아스팔트로 향했다. 무슨 생각에 잠긴 건지 몇 분을 그곳에 요지부동으로 서있던 서호는 일순 정신을 차렸는지 이진의 작업실이 있는 건물로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에 아주 조금 처연함이 묻어있었다.




“제 연락처를요?”
[네. 제주에서 강연한 거 보고 저희 도서관으로 직접 연락이 와서 작가님 연락처를 물어보시더라고요. 작가님 커리어에 정말 좋은 기회인 것 같아서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처를 드렸어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거기가 영상 스튜디오라고요?”

[네. 요즘 핫한 뮤직비디오랑 광고영상들은 다 거기서 찍은 거라고 하더라고요. 리스트를 언뜻 들었는데도 대단하던데요? 이번 뮤직비디오 타이포에 꼭 작가님 서체를 싣고 싶다고 하셔서요. 작가님도 이제 초야에 묻혀있지 마시고 빛 좀 보셔야죠.]


휴대폰 너머에서 구구절절 말을 잇는 도서관 직원의 설명을 듣던 이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래서 사람들 모아놓고 하는 공개적인 강연 섭외를 거절했던 것이었는데. 이모와 연이 닿아있던 도서관장의 간곡한 부탁에 어쩔 수 없이 한 번, 딱 한 번 강연을 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일이 커질 줄이야. 끝까지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자신을 탓해야지 누구를 탓하겠나 싶어 이진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쪽에서 연락 오면 일단 들어는 볼게요. 감사합니다.”


언짢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써 감사의 표시를 전하며 이진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벼루에 담은 먹을 제대로 갈기도 전에 곧바로 처음 보는 번호로 통화가 걸려왔다. 이진은 혼잡한 마음을 다잡으려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전화를 받았다. 자신이 스튜디오 Erst의 조연출 조미라라고 소개한 여자는 이진의 서체를 감명 깊게 보고 있었으며 이제 곧 작업 들어갈 뮤직비디오에 꼭 그녀의 서체와 함께 하고 싶다고 전했다. 말 수 없는 이진을 조곤조곤 설득하는 미라의 말투는 당찼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혹시 모레 오후에 방문드려도 괜찮으시겠냐는 정중한 질문에 이진은 탁상달력을 흘깃 보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전화를 받기 전에는 분명히 거절의 의사를 표하리라 다짐한 그녀였으나, 미라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설득이 된 듯했다. 거기에는 얼마 전 만난 도서관장의 노파심 섞인 당부가 한 몫했다. 이제 과거는 잊고 앞으로 나아가라며.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이제는 당당하게 이름을 떨치고 살기를 그 누구보다도 혜숙은 그걸 바랄 거라는 말이. 다른 촬영 일정 때문에 본인대신 대표님이 직접 작가님을 방문드릴 거라는 말을 끝으로 이진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것이 모레 전 일이었다.


감색 앞치마를 입고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채로 이진은 벼루에 먹을 갈던 속도를 점점 늦추었다. 석 달 뒤에 열릴 지역 서예가 전시회에 출품할 작품을 쓰려 요 근래 온통 여기에만 신경을 쏟고 있었다. 이진은 붓을 들어 천천히 검은 먹을 입혔다. 붓 끝이 스스로 먹을 마실 때까지 조급해하지 않고 검게 물들어가는 붓을 바라보던 이진의 시선에는 한 점 떨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내 그녀는 붓을 들어 하얗게 펼쳐진 화선지 위에 한자 하나를 그려나갔다. 그녀의 손 끝에는 거리낌이 없었고, 붓 끝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때 종이 딸랑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가 이진의 작업실로 들어서는 기척이 들렸다. 입구와 뒤로 마주 본채 작업대 위에서 붓을 놀리던 이진의 어깨가 일순 멈추었고 그녀는 천천히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쥐여져있던 붓은 막 쓰기 시작했던 ‘忘 ’ 자 옆에 하나의 방점을 덧붙이며 작업대 위로 떨어졌다.


손에 두 잔의 커피를 든 채 십 사 년 전보다 조금은 차분해진 서호는 입을 꾹 다물고 이진을 보았다. 십 사 년 전보다 더욱 표정이 없어진 이진의 얼굴은 지금은 어느 때보다 당황함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 발끝 까지도.


어느샌가 서호에게 바짝 붙어온 우연이란 녀석은 그의 등 뒤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이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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