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어깨 나의 무릎

1화

by 안스

'우연이 욱하면 운명이 된다.'

가라앉은 서호의 시선은 휴대폰 화면 위의 문장에 머물렀다가 이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운명은 얼어 죽을. 우연이란 놈, 내 눈에 띄기만 하면 아주 약을 잔뜩 올려서 발끈하게 만들 자신 있는데.' 그의 머릿속에 시답잖은 생각이 문득 튀어 올랐다. 우연이란 게 있긴 한 걸까. 십 사 년 동안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우연 비슷한 놈이 어슬렁 거리는 꼴을 본 적이 없단 말이다.


그때 서호의 휴대폰이 낮게 웅웅 울렸다. 상단에 뜬 ‘박서준’ 세 글자 이름을 확인한 그는 휴대폰을 금방 귓가에 갖다 댔다. 연결 편 문제로 비행기 시간이 40분이나 지연되었고, 그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에서도 느릿한 피곤함이 배어 나왔다.


“어.”

- 감독님. 아직 비행기 안 타셨어요?

“지연되는 바람에. 이제 곧 탈 거 같아. 왜?”

- 아뇨, 급한 건 아니고요. 스튜디오 안 들리시고 바로 댁으로 가실 거예요?

“잠깐 들를 거야. 스케치 확인 해야지.”

- 그럼 저 기다리고 있을게요. 콘티 한 번 같이 봐주셔야 할 거 같아요.

“… 도착하면 한 일곱 시 즘 될 거 같다. 저녁 먹고 있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며 서호는 고개를 양쪽으로 돌리며 뚝뚝 소리를 내었다. 비행기 시간은 오후였지만 꼭 이 집 해장국을 먹어야 한다는 배영의 성화에 못 이겨 새벽댓바람부터 부산을 떨어댄 탓에 철야의 피곤함은 더욱 그의 뒷목을 짓누르는 듯했다.


십 수 번 째 오는 제주는 이제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게 중 휴가나 리프레시를 목적으로 이 섬에 디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게 큰 이유겠지만. 서호는 팔짱을 낀 채 탑승구 앞 대기 좌석에 앉아 반대편의 두꺼운 유리창 너머로 천천히 움직이는 비행기들을 멍하니 보았다.


2박 3일의 기간 동안 제주의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하루에 300km를 넘게 운전하며 뮤직비디오 로케 장소를 찾아다녔다. 이 섬에 대해 속속들이 꽤 안다고 자부했던 그였지만, 같은 장소여도 계절마다 날씨마다 전혀 다른 분위기를 뿜어내는 스폿이 많았다. 권서호 감독 특유의 대쪽 같은 직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촬영 장소는 꼭 직접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정은 곧 결과물에 대한 완벽한 퀄리티로 이어졌다.


토요일 오후의 꽤 번잡한 분위기 속 국내선 탑승구 앞에 앉은 서호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음들에 적당히 정신을 내맡기며 머릿속으로 이번 뮤직비디오의 흐름을 다시금 그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앉아있던 12번 탑승구 앞의 승무원들이 탑승 수속 준비를 시작했다. 그 움직임을 눈치챈 오후 17:40분 제주발 김포행 탑승객들은 일제히 한 줄로 줄을 잇기 시작했고, 서호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작은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메었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곧 슛 들어갈 뮤직비디오 촬영 준비로 스튜디오 ‘Erst’의 단톡방은 활발했다. 간간이 서준이 보내는 콘티 수정 관련 의견에 적당히 대답하며 서호는 길게 이어진 탑승 대열에 합류했다.


마지막으로 배우들의 움직임을 따라 카메라를 한 대 더 추가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서준의 의견에 그러라는 단답을 입력한 후 서호는 그제야 휴대폰에 박혀있던 시선을 떼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타이밍은 언제나 찰나로 비껴 들어온다. 그것은 바람과도 같아서 가까이 다가왔다 싶을 때면 어느샌가 머리카락 사이로 스산히 흩어지고, 물과도 같아서 꽉 쥐려 하면 오히려 손가락 사이로 후드득 떨어진다. 아무런 전조의 느낌을 받지 않을 때에야, 각종 잡념들로 뇌 속이 뒤죽박죽 엉켜있을 때 나타난 타이밍이란 요물은 그제야 나 여기 있지 하고 등 한가운데를 훅 찌른다. 그러니까 등 뒤에서 찌르는 놈을 무슨 수로 잡냐고.


서호가 서있던 12번 탑승구 옆, 13번 탑승구를 통해 5분 간격으로 먼저 출발하는 제주발 김포행 다른 항공편의 탑승 줄이 줄어들고 있었다.


한 명 한 명 탑승권 바코드를 인식하며 일사불란하게 승무원들이 승객들의 탑승을 도와주고 있었고, 마침 서호의 시선에 승무원에게 건네준 탑승권을 다시 받으며 비행기로 향하는 브리지를 걸어 들어가는 누군가의 옆모습이 포착되었다.


“… 윤이진.”


그의 입술 사이로 십 사 년 만에 한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기다란 탑승권을 반듯하게 접으며 천천히 브리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서호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급하게 앞으로 향했다. 그 바람에 서호는 자신의 앞에 먼저 서있던 중년의 여성과 부딪혔다.


“아이, 뭐 하시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곧이어 형체가 사라진 이진의 흔적을 찾기 위해 우왕좌왕거렸다. 서호는 고개를 돌려 이진이 방금 탑승한 입구 상단의 전광판으로 시선을 올렸다.


오후 17:35분 출발 김포행.


잘하면 김포공항에서 만날 수 있다. 5분 간격이니 서두르면 수화물로 보낸 캐리어를 기다리는 이진을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서호의 머릿속은 이미 1시간 뒤 김포공항에서 어색하게 마주한 이진과 자신을 떠올리고 있었다. 십 사 년 만에 만난 이진은 언뜻 봐도 고등학교 때의 도도한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윤이진. 윤이진. 그녀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십 사 년 전의 여름 이후로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진의 이름을 떠올린 그였다. 아니 그럼 방금까지 몇 미터를 사이에 두고 같은 공간 속에 있었다는 말인데, 어떻게 그걸 몰랐던 거지? 주변을 돌아볼 생각을 왜 하지 않았던 거지? 하다못해 항상 면세점에서 사던 담배를 왜 이번에는 그냥 건너뛰려고 했었던 걸까. 그러지만 않았다면 적어도 삼십 분 전에 옆 대기 좌석에 앉아있는 이진을 발견했을 텐데. 각종 자조 섞인 생각이 중구난방으로 서호의 머릿속에 튀어 올랐다.


이진은 이미 비행기에 올랐고, 그녀가 탄 항공편은 이내 김포를 향해 떠오를 것이다. 서호가 서있는 12번 탑승구는 아직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조바심에 아랫입술을 집어들 무렵 그의 휴대폰이 다시 웅웅 울렸다. 10여 분전과 같이 ‘박서준’이라는 이름을 확인한 서호는 귓가에 대며 서준의 말이 들려오기 전에 먼저 낮게 읊조렸다.


“서준아. 좀 닥쳐봐. 너랑 얘기하다가 나 방금 첫사랑 놓쳤잖아.”


우연이 욱하면 운명이 된다고. 조소하며 홱 넘겼던 문장 속 우연이 어느샌가 씩씩대며 그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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